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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재(전북 전주/진안) 모래재 전북 전주에서 고원지대인 진안을 가려면 높이 700m가 넘는 만덕산(萬德山)을 끼고 넘어가는 곰티재(熊峙)를 넘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 재가 너무 험하여 차량 사고가 빈발하였다. 한 때는 1백명 가까운 대형 사고까지 있었다. 이것을 걱정한 전주의 몇몇 유지들이 앞장서서 도로를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곰티재는 확장이 어려워서 포기를 하고 대신 만덕산에서 서북쪽으로 약간 더 이동한 곳에 새 도로를 신설하기로 하여 오늘의 모래재가 되었다. 이 모래재는 1970년대 초쯤에 개통되었다. 모두 99구비라 하여 곰티재는 일명 99구비재라고도 불렀지만 실제는 66구비 밖에 안되었다. 모래재도 구비의 수로는 곰티재와 비슷하지만 커브의 각도가 많이 부드러워졌고, 마루턱에 100m 정도의 터널을 만듦으로서 고도를 약간.. 2007. 6. 21.
마티재(馬峙, 충남 공주/대전) 마티재(馬峙) 위 그림에서는 공암재라 표기하였는데, 이런 이름으로 불리어졌는지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옛 문헌 에 의하면 '마치현'(馬峙峴), '마치'(馬峙/麻峙)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개음화 현상으로 따져보면 '마치고개'라고 발음하는게 맞는데, 실제 '치'와 '티'로 발음하여 함께 쓰여 왔다. 여기에서 '말'과 '마'는 모두 '산'이라는 의미의 옛말 '마리', '마루'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말티고개'는 '산에 있는 고개'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충남 태반의 재가 순전히 차령산맥(금북정맥)을 넘기 위하여 생긴 것인데, 마티재는 원칙적으로 다르다. 어떤 산맥과도 연결 없이 홀로 서 있는 것이 계룡산이라지만, 역시 그 산의 지맥 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우산봉(雨傘峰) 주변의 산을 넘기위.. 2007. 6. 20.
한치재(충남 공주/청양) 한치재(大峙:대치) 공주(公州)에서 청양(靑陽)으로 넘어가는 36번 국도에 걸친 령(嶺)이다. 멀리 북쪽인 오대산에서 갈라져 서남쪽으로 흐르던 차령산맥이 충남 끝머리인 장항(長項) 전방에서 바다속으로 숨어버리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부린 조화라고나 할까.. 공주에서 청양으로 이어지는 국도가 청양 전방 12km 지점에서 높이 561m인 칠갑산(七甲山) 북쪽 능선을 가로지르는 재로서, 이것을 한치재(一寸峠) 또는 한치령(一寸嶺)으로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우리나라에서 '한'은 크다는 뜻이고 '치'는 '상'(峠)자를 가르키는 것이므로 결국 '큰 고개'라는 뜻이다. 실제로 차령산맥도 이 부근까지 내려와서는 많이 약화되어있고 칠갑산만한 산도 드물기때문에 큰 고개라 생각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이야기다. 실제로도 큰 고개.. 2007. 6. 15.
기름재(충남 공주) 기름재 동서로 뻗은 산맥에 천안~공주간의 국도(23번)가 나있어 차령이 생겼다면, 남북으로 뻗은 산맥에 광정(廣亭)~마곡사(麻谷寺)를 연결하는 지방도(604번)가 동서방향으로 나 있어서 생긴 것이 '기름재'이다. 차령산맥이 서쪽을 향하여 잠시 달리다가 방향을 다시 남쪽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재 이름에서는 별로 엿보이게 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아주 오래된 사건으로서, 한 때 이 곳이 아편으로 험하게 이름났던 곳이다. 위법 행위인 아편의 밀경작업이 험준한 강원도 오지에서나 대대적으로 횡횡되었던 것이 상례였는데, 1960년대에 이 근방에서 그것이 발견되어 신문을 장식할 정도였다고 한다. 재(嶺)라고하여 양쪽 경사도가 한결같이 균형을 이룬 것은 아니다. 대광령이나 진부령 또는 엽전재처럼 한쪽만이 급경사를 이.. 2007. 6. 14.
차령(車嶺, 충남 천안/공주) 차령(車嶺) 180m 충남 천안에서 1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다가 행정리(杏亭里)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갈라지며, 여기서 새로 시작되는 23번 국도를 따르면 만나게 되는 령(嶺)으로 천안(天安)과 공주(公州)의 경계에 걸쳐있다. 이 고개에서 남으로 내려간 지점이 광정(廣亭)인데 지금은 큰 도심지가 되어있지만, 옛날에는 조그마한 마을과 조선조 때 장이 섰다는 동쪽 2백m 지점의 큰 마을 등 2개의 마을로 되어 있었고, 여기서 도로는 다시 공주행과 마곡사행 등 2개로 갈라져 있었다. 차령은 이조 때 호남 길손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한양을 오르내리는 호남 길손들은 이 재를 넘어야했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 북상을 하던 도중에 공주에서 모이게 되고, 공주쪽에서는 금강(錦江)을 건너는 나룻배를타기 위하여 공주성(.. 2007. 6. 13.
엽전재(葉錢峙, 경기 평택/충남 성환/충북 진천) 엽전재(葉錢峙) 차령산맥(금북정맥)을 가로지르는 령(嶺)이다. 경기도 평택과 인접하면서도 충남 땅인 성환(成歡)에서 동쪽을 향하여 곧바로 나있는 34번 국도 위에 있고, 이 재를 따라 내려가면 충북 진천(鎭川)이 나온다. 엽전재란 이름의 유래는 확실한 것이 없다. 주변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옛날 장을 보려고 이 재를 넘나드는 사람이 많았는데, 숲이 워낙 깊어 장꾼을 노리는 도둑이 많았던 관계로 자연 '돈'과 연관있는 이름으로 불리워졌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건 그렇고 엽전재도 한쪽만이 성급하고 다른 쪽은 '모른 척'이다. 충남 입장(笠場)에서 4Km쯤의 지점부터 무수한 구비를 이루면서 마루턱이 되는데, 마루턱의 너머쪽(충북쪽)은 갑자기 극히 밑밑한 시골길로 바뀌므로 힘들여 걸어올라간 쪽이 싱거워진다... 2007. 6. 12.
말티재(馬峙, 충북 보은) 말티재(馬峙) 옛날 당나라에서 돌아온 의상(義湘)조사가 절을 건립하기에 마땅한 장소를 찿아 전국을 답사하던 때의 이야기다. 충청도 중심부에서 무턱대고 동쪽으로 걸어가니 보은땅이 나왔는데, 스님은 계속 동쪽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약 10km쯤을 가니 눈앞에 병풍처럼 들려싼 일련(一連)의 산맥에 부딧혔다. 의상은 용기백배하여 결국 산허리를 넘어갔으나, 넘고나서는 오히려 실망하는 빛이 얼굴에 역력하였다. 의상은 그 산맥이 육지의 끝에 가로 놓인 것으로 생각하여, 그 너머에는 동해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의상은 다시 용기를 내어 그 산 밑에까지 이르러서 여기야말로 속세를 떠난 산이라 하고 속리산(俗離山)이라 이름을 붙여 부르는 동시에 그 기슭에다 절을 지어 법주사(法主寺)라 불렀다. 처음 그.. 2007. 6. 7.
하늘재(충북 충주/경북 문경) 하늘재 하늘처럼 높은 령(嶺)'이란 뜻이겠지만, 실제로는 여타 3곳의 새재보다도 높이가 낮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이면 '하늘재'라 했을까? 다른 뜻은 아닐게다. 너무 먼 길을 걸어온 '그들'이기에 이미 많이 지쳐있었을 것이므로 그렇게 높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들'이란 바로 소와 말을 끌고 다니는 사람들을 뜻하는데, 옛날 관리들은 쇠똥이나 말똥이 길을 더럽히는 것을 싫어하여 그들에게 문경에서 갈평(葛平)과 관음(觀音)리를 거쳐 하늘재로 돌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이 령에서 내려간 지점에는 세계사(世界寺)와 석불등이 있는 미륵리(彌勒里)가 있고, 그 곳에서 서쪽으로 커브를 틀어 대안리(大安里)까지 나가서 비로소 여느 도로와 합쳐지게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큰 새재와 작은 새재를 넘는 길보다 20리(8km)를 .. 2007. 6. 1.
새재(鳥嶺:조령, 충북 충주 괴산/경북 문경) '재가 너무 높아 하늘을 나는 새도 쉬어서 간다' 하여 새재, 또한 새(억새의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자란다 하여, 새로 생긴 길이라 하여 새재라 불렸다는 이 고개는 통칭 문경새재라 한다. 그 험준함을 진도(珍島) 아리랑에서는 '문경 새재 물박달나무, 구비야 구비 눈물이라네' 라고 노래로 읊기도 하였다. 어떻든 새재가 옛날부터 많이 알려졌음은 영남의 길손들이 서울인 한양(漢陽)으로 오려면 반듯이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새재를 다녀보지 못한( 그런 사람이 극히 드물겠지만.....) 사람들은 고개가 하나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을테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작은 새재(小鳥嶺), 큰 새재(大鳥嶺 또는 梨花嶺으로도 부른다), 옛날의 새재(舊鳥嶺)까지 모두 3개가 있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또 하나가 더 있는데 그.. 2007. 5. 31.
박달재(朴達峴, 충북 충주/제천) 박달재(朴達峴) 453m '울고넘는 박달재'라~노래까지도 있듯이 이 고개를 모르는 이는 아마 드물 것이다. 박달재가 어디에 붙었는지 몰라도 적어도 그런 고개가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제천(堤川) 북쪽에 있는 봉양(鳳陽)과 충주(忠州) 사이 38번 국도가 지나가는 터널 위의 구도로에 있는령(嶺)으로, 봉양에서는 8km 떨어진 지점이다. 마루턱에 서면 동쪽(봉양)은 휘어져 내려간 산 때문에 태반이 가려지지만 서쪽은 다르다. 산과 산미로 빠꿈히 뚫린 저쪽에 충주 방면 들판이 보이고, 오른쪽산은 점점 높아지면서 약간이지만 아득한 구학 산(九鶴山)의 정상 부근을 보여준다. 옛 비석에 있던 글 치악산의 맥이 뻗어 백운산이 되고 그 줄기가 다시 남으로 달려 구학산, 박달산, 사랑산을 이루니 이 박달.. 2007. 5. 30.
설머치(雪馬嶺: 설마령, 경기 의정부/파주) 설머치 고개 옛이름은 '설마령'(雪馬嶺)이다. 323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의정부와 파주 적성면 사이에 있다.경기도에서 가장 령(嶺)다운 령으로서 높이 675m인 감악산 중턱을 가로지른다. 높이 300m가 조금 넘는 설머치 고개의 전체적 모습은 대관령이나 진부령과 비슷하다. 서쪽은 밋밋하고 동쪽은 그와 반대로 매우 험하며 경사도도 급하다. 마루턱 2km 전방인 시앙골까지는 평지, 시앙골에서 마루턱까지도 거의 경사도를 알아보기 어렵지만일단 마루턱에 올라서면 북쪽은 다르다. 험한 산속을 숱하게 많은 구비를 돌면서 4km나 내려가야 한다. 6.25 직후인 1.4후퇴 때 여기에 캠프를 쳤던 우방 영국군 1개 여단이 험준한 산을 타고 야습해온 중공군에게 거의 전멸당한 안타까운 계곡이기도 하다. 그 분들이 전사한 그.. 2007. 5. 29.
용화재(龍化峙, 강원도 삼척) 용화재(龍化峙) 재(嶺)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표고 300m도 못되는 높이지만 그래도 옛날부터 고개로 불리어진것은 사실이니까, 역시 고개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그런 입씨름은 모두 무의미 하다 하겠다. 문제는 그 주변의 경치가 너무 빼어나서 재(嶺)로 인정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기에 너무 아쉽다는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용화(龍化)해안의 아름다움이란 대단하다는 것이다. 대단할 정도가 아니라 동해안 1천리 해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국 제1의 해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곳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용화재'이다. 7번 국도를 따라 삼척에서 맹방, 궁촌을 거쳐 이곳에 이르면 밑밑한 고개를 올라 바다를 바싹 끼고서고도를 점점 높여나간다. 아울러 .. 2007. 5. 24.
화방령(花芳嶺, 강원도 태백) 화방령(花芳嶺)936m 강원도 최남단의 령(嶺)으로 마루턱에서 4km만 내려가면 경상북도 땅에 닿는다. 태백시(옛이름:黃地)와 텅스텐 광산으로 유명했던 상동 사이에 있는데, 31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태백쪽에서는 그저 밋밋하게 올라가게 되어있고, 반대로 상동쪽에서는 보기드물게 험준한 구름재(雲嶺)를 넘어서 오히려 약간 내려간 지점에 있으나 화방재쪽이 훨씬 많이 알려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화방령이 바로 낙동강과 한강의 분수령이기 때문이다. 즉 화방령 서쪽 사면 여기저기서 발원한 개울들은 흘러흘러 녹전리(綠田里)에서 모였다가 더욱 서쪽으로흘러가 '마팥'에서 남한강과 합치고, 동쪽 사면의 물들은 모여서 낙동강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낙동강의 상류발원 지점을 황지(黃地)의 수도국에 있는 연못으로 알고 있지만.. 2007. 5. 24.
아홉사리재(可得嶺:가득령, 강원도 홍천) 아홉사리재 가령(可嶺), 가득령(可得嶺), 아홉고개, 아홉싸리 등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홉사리재'로 통일해서 부르고 있다. 홍천(洪川)~인제(麟蹄)간의 국도변에 걸친 철정(哲亭)에서 현리(縣里)로 넘어가는 령(嶺)으로, 451번 지방도가 지나는 홍천과 인제의 군계에 놓여있다. 구비가 많아 령(嶺)다운 모습을 고루 갖추고는 있지만, 근처에 1000m가 넘는 가득봉(可得峰)과 응봉산(鷹峰山) 등을 끼고 있어 양쪽 봉우리에서 한껏 낮아진 대목을 넘어가기 때문에 700m를 약간 넘는 높은고개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낮게 느껴진다. 아홉사리고개에 유래하는 전설 결혼식을 올린 새신랑이 3일째 되는날 아흔아홉굽이 도로개설공사에 끌려가 날짜가 가는것도 모르고 일만 하다가 공사가 다 끝나고 돌아오니.. 2007. 5. 24.
수라리재(石項嶺:석항령, 강원도 영월) 수라리재 530m 영월 군내에 속해있다. 거의 대부분이 '수라리재'라고 부르고 있으나, 어떤 자료에는 '석항령'(石項嶺)으로 표기한 기록도 있다. 제천에서 태백선(太白) 철도를 따라 영월 읍내를 거쳐 더 지나가면 '석항역(石項)'이란 곳이 나오는데, 여기서 31번 국도를 따라 옛 광산촌이 있었던 상동(上洞)으로 넘어가는 령(嶺)을 말한다. 수라리재는 석항역 마을을 지나면서부터 4km를 올라가고, 상동쪽으로는 녹전(錄田) 근처까지 5km를 내려간다. 이 고개는 옛날에는 겨우 오솔길 정도였으나 해방을 전후하여 상동에서 채굴되는 '텅스텐'이고귀광석(高貴鑛石)으로 판명되면서 광석의 운반 관계로 도로를 넓히게 되었다. 설악산의 한계령 다음으로 역사가 짧으며, 광석 채굴량이 그리 많지 않았고, 너무 오지였던 탓으로.. 2007. 5. 24.
신리재(新里재, 강원도 삼척) 신리재(新里재) 830m 5.16 직후 국토건설대가 제주도의 한라산 횡단도로와 이 新里재 확장공사로 양분하여 수고했던 곳이다. 정확히 동서로 뚫린 이 령(嶺)은 서쪽 태백선 통리역에서 삼거리인 신리까지 이어지는 령으로 통리쪽은별것도 아니지만, 신리쪽은 그야말로 99 굽이에 가깝다. 그 당시 토건(土建)에 쓰이는 기계가 매우 부족했던 때였으므로 젊은 혈기의 건설대가 아니었으면 완성이 쉽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90년대 까지만 해도 신리재의 특색이라면 동서의 색깔이 판이했다는 점이다. 서쪽은 일찌기 현대가 정착되었지만,동쪽은 현대 속에서 4백여년 전의 아득한 옛날이 공존하고 있던 곳이었다. 이중벽에 불을 때서온돌을 대신했던 콧굴이라는 특이한 건축 구조와 지붕은 기와 대신 나무 너와를 썼고, 방아는 그야말로영.. 2007. 5. 23.
뱃재(강원도 홍천) 뱃재 828m 뱃재는 4백리 거리의 홍천~양양으로 이어지 56번 국도에서 구룡령에 이어 두 번째 높은 령(嶺)으로, 서석(瑞石)을 지나 마냥 시골길을 달리다가 삼거리 갈림길에서부터 오르기 시작하는 령이다. 별로 높아보이지는 않지만 주변 지대가 워낙 높은 탓인지 해발 828m나 되는 표고이다. 뱃재를 발음해보면 "배째"라는 소리로 들려 "배째라 배째"라는 어거지 귀절을 저절로 떠올리게한다. 옛날 이 지방에는 오리나무, 피나무, 팽나무 등이 특히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목기(木器)들과 함께 배틀(옛날 가정에서 사용하던 선직기(線織機)인 베틀의 사투리)을 특히 많이 만들어 팔았다 한다. '뱃재'란 이름은 거기서 나왔다는 것이라고 한다. 서석면과 내면(內面)의 면계(面界)에 놓인 뱃재는 동서 양쪽이 모두 .. 2007. 5. 19.
구룡령(九龍嶺, 강원도 홍천/양양) 구룡령(九龍嶺) 1,010m 남한의 고개 중에 구룡령의 단풍은 단연 으뜸일 것이다. 그 현란한 광경에 그저 황홀할 뿐이다. 동쪽면 보다 서쪽면이 더 멋드러지는 풍경을 연출한다. 구룡령은 홍천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4백리길이다. 인제군, 홍천군, 양양군 등의 군계에서 가까운 구룡령의 마루턱을 중심으로 홍천쪽은 6km, 양양쪽은무려 15km가 커브길의 연속인데, 과거에 양쪽 주민들은 서로 각자 자기쪽을 99구비라 말했다.아마 양쪽을 합치면 최고의 커브 수를 가진 것이 틀림없다. 구룡령은 백두대간의 지맥 위에 있는 석봉(石峰)과 약수봉(藥水峰) 사이를 뚫고 넘어가며, 마루턱에올라서면 동쪽이 탁 트여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다.멀리 백두대간의 주맥(主脈)이 많이 낮아진 채로남북으로 흐르고 있고, 그 안쪽은 모두.. 2007. 5. 18.
비행기재(麻田嶺, 강원도 평창/정선) 비행기재 (마전령:麻田嶺) 618m '비행기재'라고 하면 42번 국도에서 예나 지금이나 가장 험난한 곳으로 꼽고 있다. 평창이나 제천방면으로 나들이 가는 정선사람들을 위해서 처음 열어놓았던 차량도로 고개이다. 운동장처럼 넓혀놓은 령(嶺) 마루턱에 올라서면 동쪽인 정선(旌善)쪽으로 정선군 정선읍이란 표지가 있고, 반대쪽인 영월(寧越)쪽으로는 평창군 미탄면이란 표지판이 있다. 옛날(6.25후) 정선을 떠난 버스가 마루턱에 이르렀을 때, 어떤 손님이 거기서 내렸는데, 버스가 고개를다 내려가서 보니, 아까 마루턱에서 내렸던 손님이 버스보다 먼저 내려와 도착해있더라는 것이다. 버스기사가 놀라며 "비행기 타고 왔소?" 하고 손님에게 물어보며 말했다는데서 비롯하였다 한다. 즉 버스보다 더 빠른 것은 비행기 밖에 없었.. 2007. 5. 16.
한계령(寒溪嶺, 강원도 인제/양양) 한계령(寒溪嶺) 950m 남한에서 가장 멋진 고개이다. 한계령을 지나는 44번 국도를 따라가면 옥녀탕, 대승폭포, 장수대, 소승폭포, 여심폭포, 십이폭포,발폭포, 오색온천, 오색약수, 선녀탕 등의 명승지가 줄줄이 이어진다.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북면과양양군 서면을 잇는 령으로서 설악산 속 2개의 봉우리 대청봉과 점봉산의 사이 안부에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높은 봉우리때문에 겨울이면 북풍의 통로가 되어 바람이 거세고 추위가 매섭다.바로 이러한 연유로 한계령(寒溪嶺)이란 이름이 생기게 된 것같다. 과거에 양양군에 해당하는 산을설악산이라 하였고 인제군에 해당하는 산을 한계산이라 했다는데, 고개의 이름이 한계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인제군 원통에서 하늘벽까지 평지로 10km이고, 거기서 한계령까지 완.. 2007. 5. 16.
대관령(大關嶺, 강원도 강릉/평창) 대관령(大關嶺) 832m 대관령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서, 총연장 13㎞에 이르며, 강릉에서 서쪽으로 17㎞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관문으로 주변의 황병산, 선자령,노인봉, 발왕산 등에 가깝게 둘러있다. 대관령을 분수령으로 동쪽은 오십천이 동해로 흘러들며, 서쪽은송천의 지류가 발원하여 남한강으로 흘러 서해에 이른다. 주위에 대관령을 못가본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차량들이 대관령휴게소에서 정차하므로 잠간이지만 주변을 돌아볼 시간도 가졌을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좋다', '편해졌다'고 말하게 되었지만, 한편 사라진 그 옛날의 스릴감과낭만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오랜 동안 우리나라에서 대관령과 진부령.. 2007. 5. 12.
진부령(陳富嶺, 강원 인제/고성) 진부령(陳富嶺) 530m 남한에서는 가장 북쪽에 있다는 령(嶺)으로,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간성읍 사이에 위치해 있다. 북한의 추가령을 포함해서 대관령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령(嶺)으로 불리었다고 한다.이곳을 지나는 도로는 1981년에 국도로 지정되었고, 고개의 길이도 약 60㎞에 이른다. 한계령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설악산으로 가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진부령으로 넘어야 했던 것. 그러면서도 가장 험난하여 버스에 앉아 있으면 식은 땀이 줄줄 날 정도였었다. 그것은 대관령과 마찬가지로 서쪽인 내륙쪽은 경사도가 거의 없지만, 동쪽면인 동해쪽은 그야말로 급경사에다가 커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스릴 만점이었던 진부령도 1970년 초에 한계령 도로의 출현으로 쓸쓸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한계령 도로가 .. 2007. 5. 12.
광치령(廣峙嶺, 강원도 인제/양구) 광치령(廣峙嶺) 614m 광치령은 대관령이나 조령(일명 새재)처럼 오래된 이름이 아니다. 해방되던 해와 6.25가 일어나던 해 사이에 생겨났던 말이다. 광치령은 31번 국도의 강원도 원통에서 양구로 넘어가는 중간에 있고, 행정구역상으로 인제와 양구의 군계에 놓여있다. 이 이름도 어떤 연유가 있어서 광치령이라 불렀을 것이다. 마루턱에서 양구쪽으로 6km 내려가면 '윗광치'라는 마을이 있고, 조금 더 아래에 '아랫광치'란 마을이 있으니, 그래서 '광치령'으로 불려졌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광치령은 6.25 직전에 金日成의 특별명령으로 단 2주일만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6.25 때 양구에서 인제쪽으로 빨리 넘어가기 위해서 이 고개를 신설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당시 여기는 북한땅이었으므로.. 2007. 5. 12.
북대령(北台嶺, 강원도 평창/홍천) 북대령(北台嶺) 1,350m 북대산(北臺山) 월정사(月精寺)를 지나 북대사(北臺寺)를 거쳐 북대산 정상 바로 밑을 끼고 돌면서 고갯마루가 되고, 홍천땅인 목맥동으로 내려가는 령이다. 목맥동에서 3km 내려가면 홍천과 양양을 잇는 지방도로가 나오면서 곧 청도리 마을이 되고, 거기서 평지길을 다시 2km 가면 삼봉(三峰)약수터 입구 삼거리가 된다. 일반적으로 이 일대를 오대산지구로 보지만, 지방 주민들은 오대산과 북대산을 엄격히 구별하기를 좋아한다. 월정사~상원사간의 도로는 평지나 다름없지만, 상원사에서부터는 급경사가 되고 그것을 피하느라 길은 심한 커브를 이룬다. 따라서 상원사에서 첫 번째 고개까지는 4km나 되지만, 직선 거리는 2km밖에안되며, 심한 커브길 돌출부등에서 상원사가 발 밑으로 잘 내려다 보.. 2007. 5. 12.
직지(直指)와 황악산(黃岳山)....2편 황악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인물들... 황악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이 지역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금릉군(金陵郡) 출신의 인물울 살펴본다. 이약동(李約東)은 금릉군 양촌 출생으로 조선 성종 때의 문신이다. 자는 춘포(春浦), 호는 노촌(老村)으로 1441년 진사에 합격하고, 1451년 문과에 급제, 1470년 제주목사에 발탁되었고, 1477년에는 천추사(千秋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경제에 밝았고, 김종직(金宗直)과 친분이 두터웠다. 금산(錦山)의 경렴 춘원(春院)에 재향, 시호는 평정공(平靖公)이다. 허종(許琮)은 성종 때의 문신으로 1434년 금릉군 조마면 장암동 출생이다. 1457년 문과에 급제하여 의영당(義盈唐) 직장 선전관 등을 지내고, 1462년 정언지평(正言持平)을 역임, 146.. 2007. 5. 5.
직지(直指)와 황악산(黃岳山)....1편 황악산의 정기(精氣) 택리지의 팔도총론(八道總論) 경상도 편을 보면 태백산 왼쪽에서 나온 하나의 큰 지맥은 소백(小白),작성(鵲城), 주흘(主屹),희양(曦陽), 청화(靑華), 속리(俗離), 황악(黃岳), 덕유(德裕), 지리(智異) 등 산이 된 다음 남해(南海)가에서 그쳤는데 두 지역 사이의 기름진 들판이 천리이다라고 씌어있다. 이와 같이 황악산은 소백산맥의 허리 부분이며, 경상도와 충청도를 가르는 분수령을 이루는 산이다. 이중환(李重煥)은 복거총론(卜居總論)의 山水편에서도 이 지역에 언급하고 있다. '태백산에서 령(嶺)의 등성이가 좌우로 갈라져서 왼편 지맥은 동해가를 따라 내려갔고, 오른쪽 지맥으로 소백산에서 남쪽을 내려 간 것은 태백산과 비교할 바가 못된다. 이상은 비록 만첩산중이나 산등성이가 이어졌다.. 2007. 5. 4.
돌이 독으로... 돌의 뜻이 독으로도 옮겨가... 돌 관련 땅이름은 한자의 석(石)자로 가장 많이 취해져 있다. 충남 당진군 합덕면 등의 석우(石隅=돌머리/돌모루),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등의 석현(石峴=돌고개) 충북 청원 강내면 등의 석화(石花=돌고지), 전북 부안군 진서면 등의 석포(石浦=독개/돌개), 경남 마산시 등의 석전(石田=돌밭), 충남 청원 직산면 등의 석곡(石谷=돌실/독실), 석교(石橋=돌다리/독다리) 등이 그 예. '돌내'로 불리던 땅이름이 석천(石川)으로 된 예가 있는데 돌내 중에는 물이 둥글게 휘돌아 '도는 내'의 뜻으로 붙여진 것이 있다. '돌'은 남부 지방에서 '독'으로 많이 불러오는 관계로 한자로 '독(禿/獨/篤)이되어 독산(篤山=독뫼), 독도(獨島=독섬), 독내 등의 지명을 이루었다. 또 '독'.. 2007. 4. 26.
제주도의 돌 관련 지명 제주도는 온통 돌 지명 돌 관련 땅이름은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여러 글자로 나타난다. 석(石)자로 의역된 것이 많고, 돌(突), 독(獨/禿), 도(道) 등의 한자로 음역된 것들도 적지 않다. 또 '독'이 '독'(그릇)과 음이 같아서 옹(甕)자로 옮겨진 경우도 있다. 돌이 많은 제주도에는 그 돌만큼이나 돌 관련 땅이름이 많다. 제주도의 들은 온통 돌이어서 들이름에도 온통 '돌'자가 붙어 있다. '돌'의 옛말은 '드르'인데, 이 옛말이 돌 많은 이 섬에 '돌'(독)과 '드르'가 합성된 형태로 많이 남아 있다. 서귀포시 상예동의 '돗드르', '독귀드르',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조천읍 함덕리 등의 '돈드르' 등. '들'이 '다리'로 옮겨간 '독다리'(남제주군 대정읍 무릉리), '독만다리'(남제주군 대정읍.. 2007. 4. 20.
부여 진악산(珍惡山) '돌악산'이 진악산(珍惡山)으로 지금의 충남 부여의 석산(石山)면은 본래 백제의 진악산현 이었는데 삼국통일 후인 신라 경덕왕 때 석산현으로 고쳤다. 경덕왕 당시의 지명 개칭은 몇 가지 원칙에 입각한 듯 이 때 변경된 지명들을 보면 몇 가지의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 중요한 것은 첫째 세 음절 이상으로 된 것을 두 음절로 줄인 것이고, 원래 지명의 뜻이나 음을 반영한 것이었다. 더러는 중국의 지명을 그대로 인용한 것도 있고, 예외적인 것도 보이지만 이러한 점을 생각해서 개칭 전후의 지명을 대비시켜 보면 뜻으로나 음으로나 서로 잘 연결돼 있음을 알게 된다. 석산(石山)과 진악산(珍惡山). 이 두 지명은 어떻게 대응되고 있을까? 두 지명에서 끝 음절 '산'은 같으므로 그 앞의 石과 珍惡을 대비해 볼 필요가 .. 2007. 4. 17.
'돌'의 사투리 말 '돌'의 사투리 무척 많아... '돌'의 사투리는 무척 다양하다. 어느 지방에서나 '돌'이라고 해도 통하지 않진 않지만 각 지방 나름대로의 특색있는 사투리가 있다. 그러나 사투리라 해도 '돌'이나 '독'의 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 '돌맹이', '돌멩이', '돌메이'로 부르는 곳이 무척 많다. 경북 지방에서는 '돌망이', '돌미'라고도 하고, 충남 지방과 전북 지방에도 '돌막'이라고도 한다. 함남 지방에는 '돌맹이' 방언이 있다. '돌삐', '돌삥이'라고도 하는 곳이 있다. 경북의 남부와 경남의 서부일대에서 이렇게 부른다. 경북의 문경/상주 일대에선 '돌팍'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투리는 경기도 안성과 충북 일대에도 있다. '돌'을 옛날에는 '독'이라고도 불렀으므로 그 자취가 사투리에 남아 있다. .. 2007.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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