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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령이름들~

하늘재(충북 충주/경북 문경)

by 마루금 2007. 6. 1.

 

 

하늘재

 

하늘처럼 높은 령(嶺)'이란 뜻이겠지만, 실제로는 여타 3곳의 새재보다도 높이가 낮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이면 '하늘재'라 했을까?  다른 뜻은 아닐게다. 너무 먼 길을 걸어온 '그들'이기에 이미 많이 지쳐있었을 것이므로 그렇게 높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들'이란 바로 소와 말을 끌고 다니는 사람들을 뜻하는데, 옛날 관리들은 쇠똥이나 말똥이 길을 더럽히는 것을 싫어하여 그들에게 문경에서 갈평(葛平)과 관음(觀音)리를 거쳐 하늘재로 돌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이 령에서 내려간 지점에는 세계사(世界寺)와 석불등이 있는 미륵리(彌勒里)가 있고, 그 곳에서 서쪽으로 커브를 틀어 대안리(大安里)까지 나가서  비로소 여느 도로와 합쳐지게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큰 새재와 작은 새재를 넘는 길보다 20리(8km)를 더 돌아야 했고, 양반들만 다니던 구 새재 길보다는무려 65리(26km)나 돌아야 했다. 실로 소와 말을 끌고 가는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으로 점철된 고개인것이다.

 

구 새재가 가장 높고 나머지 3개는 모두 높이가 비슷하지만, 하늘재가 그 중에서 령답지 않은 령이다. 남쪽 관음리 쪽은 알듯 모를듯한 경사도이고,  북쪽인 미륵리 쪽은 약간 심하긴하지만 다른 령보다는약하다. 물론 령 기슭이 다른 령들보다 이미 많이 높아져 있기때문이지만......  령의 모습도 그렇지만 실제로도 가장 초라하다.  양쪽마을 주민 외에는 별로 넘어다니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항상 오솔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괄세받는 쪽은 항상 정해져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러나 마루턱에서 2km 내려간 미륵리에는 보물 96호인 석불(石佛)과 95호인 석탑이 있을 뿐 아니라일직선을 이루면서 북으로 뚫린 계곡은 묘하다.계곡 이름이 덕주(德周)계곡이고, 도중에서 약간 우측으로 올라간 곳에  덕주사(德周寺)가 있는 것들을 보아  신라가 종말을 고할 무렵  금강산으로 들어간 마의태자(麻衣太子) 일행이 이 계곡을 통과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당시 덕주공주는 신병으로 일행과 헤어져 여기에 남아서 일생을 마쳤다는 것이다.


하늘재는 계립령(鷄立嶺)이라고도 하였다. 그외에도 여러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고개가 언제 뚫렸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동국여지승람>'연풍편', '문경편'에서 다같이 초점(草岾)이라 한다'고 했다. <고려사>'지리지'에는 문경의 북쪽에 주흘산이 있고, 험하게 막힌 곳이  있으니 초점,  이화현(伊火峴), 관갑천(串岬遷)이라 한 것으로 보아  고려 때부터  개통된  듯하며 조령이라고는 조선 왕조 때부터  불리게 된 것 같다.  전설에는 태종이 처음  새재의  길을  닦았다고 하나,  남북으로 18리에 이르는 석성을 쌓고  조령관,  오곡관(烏谷關),  주흘관(主屹關)의 세 관문을 세운 것은 숙종이다. 백두대간의 등뼈를 이룬 고산준령이 병풍처럼 이어져 충북과 도계를 이룬 천험의 요새인 조령은 새계곡을 따라 제3관문까지 이어진다. 조선시대부터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큰 대로(영남대로)로서  '영남'이란 명칭도  조령의 남쪽지방이란 뜻이다.  조령의 다른 이름인 '새재'는 <고려사>에는 초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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