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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령이름들~

새재(鳥嶺:조령, 충북 충주 괴산/경북 문경)

by 마루금 2007. 5. 31.

 

 

'재가 너무 높아 하늘을 나는 새도 쉬어서 간다' 하여 새재,  또한 새(억새의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자란다 하여, 새로 생긴 길이라 하여 새재라 불렸다는 이 고개는 통칭 문경새재라 한다. 그 험준함을 진도(珍島) 아리랑에서는  '문경 새재 물박달나무, 구비야 구비 눈물이라네' 라고 노래로  읊기도 하였다.  어떻든 새재가 옛날부터 많이 알려졌음은 영남의 길손들이 서울인 한양(漢陽)으로 오려면 반듯이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새재를 다녀보지 못한( 그런 사람이 극히 드물겠지만.....) 사람들은 고개가 하나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을테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작은 새재(小鳥嶺), 큰 새재(大鳥嶺 또는 梨花嶺으로도 부른다), 옛날의 새재(舊鳥嶺)까지 모두 3개가 있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또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을 하늘재라 부르고 있다. 이 재는 약간 동쪽에 있으며, 이 하늘재야말눈물의 고개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소조령과 대조령 아래로 터널이 시원스레 뚫려 있으며, 고속도로같은 3번 국도가 이곳을 지나고 있다.  또 근처에 중부내륙고속도로까지 인접하여서 굳이 관광목적이 아니라면  옛 고개를 넘어야할 필요성이 적어졌다. 한편 영남대로는 신도로에 밀려 뒷켠에서 그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작은 새재(小鳥嶺:소조령)

  

4개 중의 하나인 작은 새재는 수안보(水安堡)온천에서 나즈막한 고개 하나를 넘은 대안보(大安堡)라는 마을에서부터 시작되어 올라가다가 괴산(槐山)으로 갈라지는 마을인 연풍(延豊)까지 숱한 구비를돌면서 내려갔다.4개의 새재는 많이 알려진 것에 비하여 높이가 낮은 편이며, 작은 새재는 옛 새재가는 갈림길 역활을 하였으며, 약간 내려간 곳에는 수옥정(漱玉亭)이라는 좋은 폭포가 있다.

 

4개 중에서 큰 새재와 함께 가장 정다운 령(嶺)의 모습을 가진 작은 새재는  옛날 한강을 오르리던길손들이 옛 새재를 넘어 대안보와 수안보를 거쳐 충주로 빠지는 길목 역활을 하였다.마루에 서면수안보 뒷산이 약간 보이고, 반대쪽은 조령산과 그 북쪽 능선이 내려오다가 푹 낮아진 곳의 새재(이화령)쪽이 훤히 바라보였다. 옛 새재와 작은 새재 중간에 있는 마을이 고사리(高沙里)이고. 남쪽으로 푹 들어간 계곡에 약간의 집들이 있었는데, 옛날에 보부상들이 그 길로 다녔다.


큰 새재(大鳥嶺 /梨花嶺: 대조령 또는 이화령)

 

작은 새재를 넘어서 연풍까지 쑥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서 문경으로 넘어가는 령(嶺)이다. 이 길은 작은 새재와  엇비슷한 높이를 이루면서  마루턱이 되었다가  다시  구비구비 4km를 내려가 옛 새재로 올라가는 갈림길 삼거리를 지나 2km를 더 가면 문경읍에 닿는다. 이화령이라고도 부르는이 령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도계(道界)를 이루며, 마루턱 광장에는  이화령휴게소가 있다. 

 

마루턱에  서서 보면 북쪽은 별것 아니지만, 남쪽의 전망은 매우 좋다. 1079m인 운달산(雲達山)에서 조정산(鳥井山)을 거쳐  서남쪽으로  흐르는  소백산맥의 또  하나의 지맥이  병풍처럼 서있고, 훨씬 가까운 곳에 주흘산(主屹山) 남쪽 절벽이 바라보인다. 

 

널리 알려져있듯이 주흘산은 '죽을 산'을 한문으로 옮겨놓은 것이다.옛날 문경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손들이 주흘산 밑을 지나가야했었는데, 살아서 넘기가 어려웠던 사실에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주흘산쪽의 고개와 계곡의 모양이 작은 새재의 경우와 흡사하다.  계곡이 왼쪽으로 나있고, 집들도 드문드문  있었으며, 옛날  보부상들이 다니던 오솔길이 나 있었다. 

 

등짐을 지고 장터를 돌아다니던 보부상들이 문경에서 충주쪽으로 갈 때, 넘기 편리한 구 새재의 통과가  규제되어 새재와 작은 새재를 넘어야 했다. 물론 당시에는 오늘날 처럼의 큰 도로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지만, 만약 있었다하더라도 통행인이 없었을 것이다. 지름길이 바로 이 계곡에 나있는 오솔길이었기 때문이다. 이 오솔길은 괄세받은 인생들... 보부상들의 애환이 깊게 서린 곳이다.

 

문경읍에서 조금만 비켜서면 큰 새재 마루턱이 잘 바라보인다. 실오라기 같은 국도가 구불구불 산을 향하여 계속되다가  푹 둘어간 지점으로 꺼져버리는데, 바로 이지점이 큰 새재이고, 이 산들이 소백산맥(백두대간)에 연결된 산들이다.


옛 새재(舊鳥嶺: 구조령)

 

문자 그대로 옛날 새재를 말한다. 새재는 험준한 소백산맥을 넘는 령을 뜻하는데, 옛 새재는 가장 오래된 것은 물론이지만,  주로 지체 높으신 양반들이나 관리들이 다녔던 곳이다.  그러나 등짐을 지고 떠도는 보부상들은 계곡 오솔길을 도보로 걸어서 이화령과 작은 새재 등 2개를 넘어야 했다.

 

소나 말을 끌고 다니는 천민들은 더 돌아서 하늘재를 넘어가야 했다.뿐만 아니다. 산적과 짐승들이 들끓는 소위  '죽을산'(지금의 주흘산: 主屹山)을 오른쪽으로 끼고 넘어야 했으므로  도중에 3개의 관문을 세워서 다녀서는 안될 사람들을 규제하였다. 소위 지체 높으신분들을 보호한 것이다.  한편 영남 지방을 관장하는 관찰사들이 목적지까지 가지 않고,  여기서 사무인계를 끝마치는 교귀정(交龜亭)도 었다.

 

그러한 이유로 재를 넘을려던 사람들은 불안하여  제1관문(第一關門) 앞에 생긴 객주집에서 몇일을 머무르며 고개를 넘을 동행인을 모았으며, 그래서 옛날에 그 곳은 번창하던 곳이다. 점심은 제2관문을 지나서  제3관문으로 막 올라가려는 지점에 있는  동화원(東花園) 마을에서  사먹게 되어 있었다. 거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마지막 관문으로서 여기서 쉬었다가 고사리(高沙里.) 마을을 지나 작은 새재를 살짝 넘어 현재 제3관문이 서있는 자리를 지났다.

 

1970년 초까지만 해도 제3관문과 제2관문은 구멍만 뻥 뚫려있었고 누각이 없었다. 그 당시 어떤 사람이 이 코스를 지나게되었다가, 관문과 누각을 급속히 다시 세우고, 작은 새재에서문경 전방 2km인 삼거리까지 도로 포장을 하였다.

 

관문과 관문간의 거리는 옛날 리수(里數)로 10리씩이고,  제1관문에서 문경까지는 6km,  옛 새재인 제3관문에서 작은 새재까지는 4km가  약간 모자란다. 따라서 작은 새재에서 문경까지는 18km. 옛새재에 서면  부봉(釜峰)이 양쪽으로 보이고,  부봉 우측의 움푹한 계곡이 소위 높은 분들이 다니던 새재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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