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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령이름들~

말티재(馬峙, 충북 보은)

by 마루금 2007. 6. 7.

 

 

말티재(馬峙)

 

옛날 당나라에서 돌아온 의상(義湘)조사가 절을 건립하기에 마땅한 장소를 찿아 전국을 답사하던 때의 이야기다. 충청도 중심부에서 무턱대고 동쪽으로 걸어가니 보은땅이 나왔는데,  스님은 계속 동쪽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약 10km쯤을 가니 눈앞에 병풍처럼 들려싼 일련(一連)의 산맥에 부딧혔다. 의상은 용기백배하여  결국 산허리를 넘어갔으나, 넘고나서는 오히려 실망하는 빛이 얼굴에 역력하였다.

 

의상은 그 산맥이 육지의 끝에 가로 놓인 것으로 생각하여, 그 너머에는 동해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의상은 다시 용기를 내어 그 산 밑에까지 이르러서  여기야말로 속세를 떠난 산이라 하고 속리산(俗離山)이라 이름을 붙여 부르는 동시에 그 기슭에다 절을 지어 법주사(法主寺)라 불렀다.


처음 그가 땅의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기어오른 고개가 지금의 '말티재'라고 한다. 이 전설이 얼마나 실성을 지녔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말티재의 수려하고 단정한 모양은 모두가 아는 바다. 기다란 노끈을 보기 좋게 일정한 간격으로 구부려 놓은 듯 크고 적은 차이를 별로 두지 않고 마루턱까지 계속된 커브의 연속을 이룬다. 일부로 규격을 맞추어 만들어 놓은 것같은 그 모습에서  당시의 정교함을 충분히 가늠케 한다. 해방 직후에 만들어졌던 '마음의 고향'이라는 명화(名畵)에서도 최종장면으로 이 고개를 배경으로 한 것이 있는데, 이 마티재의 수려함을 잘 이해하고도 남겠다.

 

말티재의 특색도 대관령이나 진부령처럼 한쪽만이 급경사이다. 즉 서쪽인 보은쪽만이 급경사여서 많은 커브를 이루고 있지만, 일단 마루턱을 넘기만 하면 동쪽은 평지에 가깝고, 그 시야 끝에 병풍처럼 서있는 속리산이 나타나 왠만큼은 답답증을 풀어준다. 반대로 속리산에서 보은쪽으로 내려오면 맑은 장재저수지와 아담한 다리가 나타나 지나는 길손들을 부드럽러운 생각에 젖게 만든다. 


말티고개는 처음 고려 태조가 속리산에 올 때  길이 험하고 가팔라  엷은 돌을 깔고 넘었다고 하여 박석(薄石)재라고도 하는데 1966년 도로포장 공사를 할 당시 옛날의 흔적이 보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1923년 박중양 충북도지사가 처음으로 우마차가 다닐 수 있게 노폭을 넓혔다고 하며, 1935년에는 자동차 1대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확장했다. 그러다가 김영호 도지사 재직시인 1966년 6월 국군과 미군의 장비가 동원되어 말티재를 포장해 11월 1일에서야 폭 10∼15m에 이르는 오늘날의 말티고개가 탄생하게 되었다. 말티고개 정상에는 노산 이은상 선생이 이같은 말티고개의 유래 및 연혁을 담은 표지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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