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행*여행/산길따라~

만월산과 철마산.....2006.8/27

by 마루금 2006. 8. 28.

산행일정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바쁜 한 주가 지나 갔다. 일요일도 거의 종일 집에서 밀린 일을 처리 했었는데, 저녁이 가까워지자 머리가 무겁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저녁까지 간간이 연결된다.. 몸이 다소 찌부두하여 동네 뒷산을 찿기로 했다. 두 눈만 뜨면 응접실에서 매일 바라보는 바로 그 산으로 갔다.

 

응접실에서 바라본 만월산(우측)과 철마산(중앙)

 

아파트에서 출발하여 만월산과 철마산을 원형으로 한 바퀴 돌면,  도상거리가 7.5 키로미터 이다. 실거리는 대략 8키로미터가 넘을 것인데, 산행하기에 그리 만만한 거리는 아니다. 휴식시간 없이 속보로 걸으면 대략 2시간으로 마무리 할 수 있다.

 

아파트 후문을 나서면 바로 산으로 진입 하는데, 능선은 한남정맥의 마루금이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이사 온 지 20년을 넘기고도 몇 해가 더 지났다. 이 산과 인연이 닿은 것도 이사 온 햇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몇 번 올랐는지 헤아릴 수 없지만 언제건 올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그런 산이다.

 

한남정맥의 마루금인 산책로, 경인국도의 원통이재를 지나, 뒤로 보이는 만월산과 연결된다.

 

만월산에 '약사사'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과거에 '약산'이라고 불렀던 때가 있었다. 등산로가 정비되고 이정표가 생겨 나면서 지금은 '만월산'이란 이름으로 거의 통용이 되고 있다. 처음 이 곳으로 이사 왔을 때는 만월산이란 이름을 몰랐다. 한동안 약산으로만 알고 지냈었고,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불렀었다. 하물며 큰넘이 동암초등학교 다닐만 해도 학교에서 '약산에 소풍간다'고 했었다.

 

만월산 정상 부근의 태극기 ....

 

높이 187.1m의 만월산은 원래 이름이 '주안산'이었다.  '주안'이란 이름은 바로 이 산 이름에서 나온것으로 전해지며, 그 원래 위치도 지금의 주안이 아닌 이곳 간석동 일대를 가리키는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때 발간 된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인천도호부 북쪽 11리 되는 곳에 주안산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바로 지금의 '만월산'을 말하는 것이다.

 

만월산 정상부의 암반지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주안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원통산 또는 선유산이라고도 불리어졌다. 전설에 따르면 이 산의 동쪽에 고려가 건국될 때 왕명으로 새워졌다는 절 개국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절과 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는 늘 이 곳에 100여명의 스님들이 수행, 정진하고 있다해서 백인사라고도 했다. 

 

젊었을 때  한 겨울,  가끔 여기에 매달려 오르곤 했다. 서너 스탭이면 오버를 넘는다.

 

산 서쪽에는 조선 초, 주안사라는 절이 세워졌는데. 그 뒤 불교를 배척하는 풍토에 밀려 절은 결국문을 닫고, 수행하던 스님들도 뿔뿔히 흩어져 폐허가 돼버렸다고 한다. 이 산의 서쪽 기슭에  행가가 나는 돌우물이 있어  조선 세종 때  사람들을 보내어 물맛과 향기,  약효 등을 조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데 그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다.

 

만월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광.... 우측의 산군은 한남정맥, 가운데 아파트촌엔 마루금의 보금자리가..

 

만월산이라는 이름은 1932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하던 보월스님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우연히 이곳을 지나 가다가 산 정상에 올라서서 보니 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동서 남북이 한눈에 다 보이고,  산세가 팔을 뻗어  시가지를 감싸  안은듯한 모양을 갖추었기에 그 이듬해 이곳에 작은 암자를 짓게 하고 '약사암'이라 칭하였다 한다.  

 

소래산(가운데)이 안개에 쌓인 모습으로 멀리 희미하게 보인다,

 

약사암은 지금의 약사사보다 조금 더 산 위쪽으로 있었는데, 사바세계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설법을더 쉽게 대할 수 있게 해주려는 뜻이었다. 보월스님은 그뒤 오래지 않아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갔고,뒤를 이어 인천 해광사에서 수도 중이던 한능해 스님이 이 곳을 지켰다. 그는 1960년대 들어 지금의위치에 대웅전 등을 새로 짓고, 약사암을 약사사로 높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월산에서 바라본 철마산의 모습 ....

 

인천에는 세 곳의 철마산이 있다. 계양구 효성2동과 서구 가정동 / 심곡동에 걸친 철마산(227m),  부평구 산곡1동과 서구 가좌동에 걸친 철마산(165m),  남동구 만수2동과 부평구 일신동의 철마산(201m)이다.  이 세 곳 모두가 한남정맥에 걸쳐서 이어져 있다.

 

철마산 능선의 쉬기 좋은 벤취....

 

철마(鐵馬:쇠로 만든 작은 말)가 있었다고 해서 철마산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고, 원래의 이름이 천마산(天馬山)인데, 산 서쪽 기슭 골짜기에서 용마가 태어났다고 해서 철마산이 됐다는 얘기도 전하며, 또 이와 함께 철마산 바위에 말발굽처럼 파인 자국들이 남아 있어 말발굽봉우리라는 뜻으로 마제봉(馬蹄峰)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철마산 공원묘지의 순환도로.....

 

굴포천의 발원지가 바로 이 '철마산' 북동쪽 계곡의 칠성약수터이다. 십정동을 지나 세월천, 청천천, 목수천, 계산천 그리고 귤현천과 합류하며, 부평 평야와 김포 전호리 평야를 거쳐 한강 하류에 흘러드는 17.8km의 길이로 한강 제1의 지류이다.  이 천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동부간선수로(東部幹線水路), 서쪽에는 서부간선수로(西部幹線水路)가 남북으로 축조되어 있다.

 

가을을 느끼는 곳....

 

고려 제23대 고종 때  권세를 잡은 무신 최이(崔怡)는 굴포천을 이용해 한강에서 인천까지 운하를만들 계획을 세우고, 전호리에서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계양면 상야리(지금의 인천 계양구 상야동)까지 공사를 진척시켰으나 권세의 몰락과 함께 중단되었다. 그 뒤 조선 제11대 중종 때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운하 공사를 재개했으나 원통이고개(圓通峴)를 뚫지 못하고 중지되었다. 

 

철마산의 휴게소...

 

철마산에 50만5000평 규모의 '부평묘지공원'이 있다. 내년부터 명칭이 '인천가족공원'으로 바뀐다고 한다. 묘지공원 7부 능선 이상의 묘역을 모두 없애고, 대신 그 자리에 나무를 심고, 실개천이나 화원, 생태학습장, 장미동산, 잔디밭, 조각공원 등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부평 공원묘지...

 

만월산과 철마산 사이의 골짜기에 부평농장이라는 지명이 있다. 지금은 공장지대로 바뀌어 농장이었던 흔적은 전혀 찿아볼 수가 없어서, 부평농장이라기 보다는 공단이라고 칭하는 것이 오히려 알맞을 것 같다. 인천으로 이사 온 후 처음으로 만월산을 올랐을 때 이 골짜기는 돼지와 소, 양계를 하는 동물농장들 이었다. 

 

팔각정 쉼터....

 

부평농장은 만월산과 철마산으로 둘러 쌓여 외부에서 그 곳에 마을이 숨어 있는지도 모를 정도의 오지였다. 지금은 부평삼거리에서 진입하는 큰 길이 있고, 만수동에서 고개를 넘어 올 수 있게도 연결이 되어있지만 그 당시는 지금의 SK주유소가 있는 길목의 입구만이 유일한 통로였다.

 

등나무 쉼터...

 

부평삼거리에서 간석오거리 방향으로 경인국도를 따르다보면 부평농장지역이 산으로 가려있었다. 그래서 외부에서는 안쪽 마을을 보기가 어려웠다. 만월산이나 철마산을 올라야 그 마을이 나타났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 곳은 전염성이 없는 나환자들이 농장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렸었다고 한다.

 

 

철마산에서 바라본 건너편의 만월산...

 

바쁜 일이 생겨서 먼 산행을 놓칠 때면 언제나 이 곳을 찿았다. 일기가 불순하여 먼 산행을 놓칠때도 역시 이 곳을 찿았다. 평일의 짧은 짬이 생기는 시간이면 틈바구니 산행으로 이 곳을 찿았다. 산에 가까이 있어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아닐까 싶다.....  

 

산행을 끝내고 귀가 하는 길.... 

 

728x90
728x90

'산행*여행 > 산길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등산 '민들레' ........2006. 9/10  (0) 2006.09.12
삼각산 까마귀봉.......2006.9/3  (0) 2006.09.05
병풍암......2006. 8/13  (0) 2006.08.16
왕방산 .... 2006.08.06  (0) 2006.08.07
虹瀑 ........2006. 7/30  (0) 2006.08.0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