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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산사람들~

에베레스트 첫 무산소 등정자 / 페터 하벨러(Peter Habeler)

by 마루금 2013. 11. 30.

 

 

페터 하벨러(Peter Habeler) ~

1989년 10월 14일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닷새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10월 17일 슬라이드 쇼를 열었고, 국내 산악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한 때 라인홀트 메스너와 단짝을 이루었던 그는 고향에서 등산학교를 운영하다가 1880년대 중반쯤 들어 다시 히말라야 등반에 나서게 되었다.

 

그와 메스너는 또 하나의 큰 일을 저질렀다. 1978년 다른 8천m 급이라면 몰라도 에베레스트만큼은 무산소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의학계에서 내린 그 단정을 깨버리고, 에베레스트에 오른 것이었다.  8천m 급에서 최초로 알파인 스타일을 구사해 히든피크(8,068m)를 메스너와 함께 5일 만에 등정한 기록은 당시로서는 전 세계 산악계의 찬사를 독차지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시대를 앞서가는 기록적인 등반을 해낸 하벨러가 갑자기 고향산에 파묻혔다는 사실을 극동 산악인들에게는 은퇴로 받아들여지기 쉬웠다. 그런데 1980년을 넘기고 중반에 들면서 그는 다시 히말라야라는 무대에 재등장했다. 물론 옛날과 거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메스너와의 관계는 짧아 ....

그와 라인홀트 메스너는 1974년에 만났다. 둘 다 알프스 등반에는 이골이 날 정도여서 새로운 스타일을 모색하고 있던 중 의기가 투합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알프스 3대 북벽을 하루에 해치우려는 생각이 서로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은 의도대로 아이거 북벽을 10시간 만에, 마터호른 북벽을 8시간 만에 해치움으로써 매스컴의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등반은 히말라야로 이어졌다. 그러나 기존의 히말라야 등반 방식이 그들에겐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알프스에서 등반하던 식으로 8천 m 급을 해치우려는 대담한 계획을 짜냈다. 1975년 히든 피크(가셔브룸 1봉) BC에 도착한 그들은 5일 만에 무산소 알파인스타일로 정상을 등정해버렸다. 대인원이 모여 캠프를 전진시키는 극지법이 히말라야에서는 최상의 방법으로 여기던 당시의 산악계는 단 둘이서 해낸 이 등정 소식에 충격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후로 그들의 등반은 세계 산악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1977년에는 두 사람이 다울라기리 남벽에 도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산악계는 놀라움과 함께 그들을 주목했다. 가능한 한 쉬운 루트로 정상을 밟으려 했던 당시의 히말라야 등반 조류에 획을 긋는 등반이 충분히 될 수 있는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남벽을 통한 등정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 후 1978년 두 사람은 역시 상식을 초월한 등반을 저질렀다.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올라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죽이 맞아 멋진 등반을 해내던 단짝이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지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메스너는 히든 피크 등반 후 <도전>이라는 책을 냈고, 에베레스트 등반 후에는 <에베레스트>라는 책을 냈다. 두 책을 낸 메스너는 단짝이 자기에게 베푼 우정을 소홀이 취급하거나 무시했다.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워낙 자의식에 도취해 난해한 글을 쓰기 좋아하는 메스너라서 그런 것은 그에게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하벨러도 할 말은 있었다. 그래서 에베레스트 등정 후에 책을 한 권 냈다.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메스너에 대한 평이 조금 나온다. "메스너는 각광을 받기 좋아해 자기 어필을 많이 한다. 나는 등반 자체가 좋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이해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등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 그는 센세이널한 점을 부각시켰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었다. 아이거 북벽을 등반했을 때 하벨러는 "아침에 붙어 저녁에 정상을 밟았다." 정도로 저술하는데 반해 메스너는 "10시간 만에 등정했다"며 등반시간을 강조했다.

 

히든 피크 알파인스타일 등정에 대해서는 하벨러는 메스너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즉 1950년대에 헤르만 불과 디엠베르거가 브로드피크와 초콜리사를 등정했을 때도 하벨러는 알파인스타일로 올랐다고 인정한다. 하벨러가 섭섭한 것은 또 있다. 정상 사진이 대부분 하벨러 자신의 모습인데 메스너는 자기의 책에서 마치 자신인양 아무런 설명 없이 게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후 하산할 때  메스너가 고글을 잃어버려  매우 곤란을 당한 일이 있는데, 그때 하벨러의 도움이 없었다면 매우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는데도 메스너는 자기 책에서 그런 말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면 하벨러의 책에는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는 글이 많이 나온다. 성격의 차이랄까. 하여튼 하벨러는 최상의 등반 스타일을 견지하지만 인간관계만큼은 매우 깊게 유지하고자 하는 스타일이었기에 두 사람은 뜨겁게 만나 쉽게 헤어졌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경량속도 등반을 추구 ~

1942년 오스트리아 마이어호펜에서 출생한 하벨러는 질러탈알프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6세 때부터 산을 찿기 시작했다. 11세 때 이미 부모가 우려할 정도로 등반에 몰두해 부모는 그를 기술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졸업하면서 다시 본격적인 등반에 나서 20세에는 1급 가이드 자격을 따냈다. 후에 그는 가이드협회 회장직도 맡았다. 24세 때인 1964년 그는 몽블랑 프레니필라 2등을 기록할 정도로 왕성한 등반력을 갖춘다.

 

그 당시  그는 알프스에서 속도 등반을 추구하면서 첨 예적인 등반을 많이 해냈다. 1969년 안데스 등반대에 참가해 첫 원정을 보냈지만, 1970년대에 받은 원정대의 초청은 자금이 없어 거절하고 말았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스키강사로 일하면서 요세미티의 앨캡 살라테월 루트를 완등했다. 이 기록은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인 것이다.

 

1974~1978년까지 메스너와 등반을 함께하고, 헤어진 후 그는 고향산에다 등산학교를 차리고, 강사생활로 평화롭게 지냈다. 히든 피크 등반 후에 결혼한 고향친구 레지나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그는 1980년대 초까지 알프스를 떠나지 않고, 강사일에 충실했다. 그러던 그가 히말라야에 발을 내디딘 봉우리는 K2였다. 1984년 K2에 도착한 그는 아부리치능선 등반 도중 미끄러지면서 머리를 다쳐 15 바늘이나 꿰매야 했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계속 등반을 속행했다. 하지만 하늘이 그를 돕지 않아 정상을 밟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1985년에도 그는 곧장 낭가파르밧으로 가 디아미르 루트를 통해 정상에 섰다. 1986년에는 고줌바캉 동릉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지만, 그 옆 봉우리인 초오유는 사흘 만에 등정했다. 그리고 1988년에는 칸첸중가에서도 어렵고, 위험하기로 소문난 북릉에 도전, 거의 죽음 직전의 상황에 처하면서 정상을 밟고 하산했다.

 

그에게는 실패와 성공이 문제가 되지 않고, 오직 등반만이 문제가 되었다.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로 등정을 시도하다가 못 오르면 그만인 것이지 성공 못하면 자기 명예에 큰 손상을 입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인상은 그가 보여준 슬라이드 쇼에서도 잘 나타났다. 그의 슬라이드 쇼는 반다의 것처럼 애절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매력적인 산의 모습과 거기에 이끌린 사람들의 행위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내세울 만한 등반을 해냈지만 그것을 억지로 미화하거나 과대평가를 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의 만족에 족하는 스타일이다. 슬라이드 쇼가 끝나고, 국내 산악인들과의 대담 중에서 누군가가 등반의 궁극적인 목표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등반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묻자, 그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했다. "산에 미치지 않고 당신은 어떻게 산을 오르겠습니까"       
 

2000년 그는 다시 에베레스트를 공략했지만 등정에는 실패했다.


END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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