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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산사람들~

북한산 백운산장 존폐위기

by 마루금 2017. 7. 7.

 

1992년 화재 이후 백운산장 증축 과정에서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이영구씨에게 20년 유예를 조건으로 기부채납 약정을 요구했고, 유예기간이 올해 만료됐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지난 5월 유예기간이 끝난 만큼 산장을 국가시설로 귀속하겠다고 통보하고, 이씨에게는 퇴거를 요구했다. 산악단체(백운산장 보존대책 위원회)는 "국내 1호의 민간 산장으로서 상징성 높은 백운산장을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며 산악인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백운산장 기원

1924년;  봄에 이해문(이영구씨의 조부)씨가 지금의 산장 터 뒤 백운암 움막에 둥지를 틀면서 시작되었다.
1927년;  한일 재계인사 109명이 백운대까지의 등산로 개설을 목적으로 찬조금 750원을 모금해 중국인 석공들이 3개월의 공사 끝에 계단과 쇠 난간을 설치했다. 경성일보는 등산로 준공기념으로 백운대 등산행사를 개최했다. 
1942년;  산악인들의 모금으로 식수 확보를 위해 우물을 팠다.
1960년;  서울산악회 고 변완철 선생과 안광옥 선생의 주도로 산장이 새로운 모습으로 준공되었다. 백운산장은 사회적인 뉴스의 초점이 될 정도로 화젯거리가 되어 목재를 운반하는 산악인들의 모습과 준공 장면이 리버티 뉴스의 영상물로 보도되었다. 
1992년;  지붕이 전소되는 화재가 발생했다.
1998년;  십시일반 산악인들의 힘을 모아 자재를 나르면서 현재의 모습인 2층 구조의 통나무 건물로 거듭났다.

 

 


 

곰바위능선에서 바라본 인수봉과 백운산장

 

 

거의 100년에 이르는 동안 백운산장에서 많은 희비의 역사가 있었다. 북한산에서 조난당한 100여 명의 목숨을 구조한 곳이 백운산장이고, 조난사고가 일어났을 때마다 이곳은 단순 숙박시설 이상의 역할을 해왔으며, 조난자 수습의 구호소나 지휘본부가 되었던 곳이다. 백운산장은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와 암벽등반의 요람인 인수봉, 리지등반의 명소인 만경대 사이의 팔부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악사고 발생시 1차적인 응급처치 장소이자 베이스캠프 역할을 했다.

 


 

1939년;  인수봉에서 일본인 첫 추락사고 발생
1942년;  김판산의 추락사고 발생
1944년;  인수봉에서 신원미상 세 사람의 시신 발견, 제2대 관리인 이남수씨와 산악인 변완철씨가 시신을 수습한 이래 수많은 부상자가 이 산장을 거쳐 나갔다.
1971년;  11월 28일 한습풍 환경에 노출된 7명이 사망한 인수봉 대참사 발생
1974년;  한국산악회 안전대책위원회가 조난구조대 본부로 사용, 이후 많은 조난자를 구조하였음
1984년;  4월 3일 기상급변에 노출된 젊은이 7명이 사망한  인수봉 대참사 발생. 이곳이 구조본부가 되었음

 


 

 

 

백운산장 출입문에 ‘白雲山莊’이라고 쓰인 한자 현판이 있다.  이것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던 마라톤 영웅 손기정 옹이 남긴 글씨다. 손기정 옹은 양정중학교 산악부원이기도 했다. 또한 백운산장은 각 등산학교 교육생들의 강의실 역할도 해왔다. 코오롱등산학교, 경기도등산학교, 서울등산학교 등을 비롯해 여러 산악단체들의 만남과 소통의 장소로 이용돼 왔다.

 

 


 

 

 

백운산장 공터에 ‘백운의 혼’ 추모비가 있다. 6·25 전쟁 중 후퇴하는 국군장병이 이곳에 숨어들었는데, 국군의 열세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패전의 자책감으로 산장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당시 이영구씨의 부친 이남수씨가 그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이후 그를 추모하는 ‘백운의 혼’ 추모비가 세워졌다.

 


 

본인(마루금)에게도 백운산장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1981년 11월에 동생이 인수봉 서면벽을 단독으로 등반하다가 도중에 추락, 백운산장에서 구조되었다.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촉스톤에 걸린 슬링이 잘못 돼 팬들륨 도중 확보물이 빠졌다는 것이다. 추락한 시간이 대략 3시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해가 뉘엇뉘엇 지고 있더라는 것, 평일이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한 쪽 다리는 골절돼 있었고, 이빨이 깨진 상태, 헬멧을 쓰고 있어서 다행히 머리 부분은 이상이 없었고, 손과 다리 한 쪽을 겨우 쓸 수 있었다 한다.

 

그 때부터 사투 시작, 골절된 다리를 질질 끌며, 1km가 넘는 거리를 6시간 동안 죽기살기로 기어서 백운산장에 도착, 마침 이영구씨가 동생을 발견해서 구조된 것이다. 이영구씨 말에 의하면 방에서 쉬고 있었는데, 밤 10시경이나 되었을까, 밖에서 어렴풋이 "사람살려"라는 소리가 들리고나서 개가 계속 짖더라는 것, 그래서 나가봤더니 동생이 "살려주세요"하고는 한 번 쳐다보고나서 그냥 기절해버리더라는 것이다. 119에 연락해서 수유리 동국병원(당시 이름)으로 급송. 새벽에 연락을 받아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중환자실에서 다리와 얼굴에 기부스를 한 채 몰골이 아니었다. 온 몸이 퉁퉁 부어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으니 . . . 퇴원하는데 반년이나 걸렸고, 병원비로 집 한 채 값을 날렸다. 재활에 2년이 소요되었고, 그후 동생은 또다시 암벽등반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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