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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산사람들~

한국 산악계의 태산준령 .... 김정태

by 마루금 2010. 7. 21.

언제나 등산현장에 있던 '문무겸전의 산악인


어릴 때 외아들 응석받이로 자랐다. 별난 것을 좋아해서 소년단에 넋을 팔고 다녔고, 훈련 가는 산과 들에 나가기를 좋아했다. 1976년 한국산악회에서 발행한 문고판 <등산50년>에서 김정태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다. 어두운 골목길을 드나들지 못할만큼 겁보였고, 말까지 더듬으며, 무척 수줍어 하던 아이 김정태가 우중충한 흉가집을 놀이터로 받아들이고, 말도 더듬지 않게 되고, 수줍은 끼도 없어지게 된 계기는 당시 살던 대구의 동네산 '아지랑이산'에서였다. 유치원시절 동네 개구장이들과 올랐다가 해가 지도록 못다 내려온 산에는 울다못해 방망이질 하는 가슴으로 뒹굴다시피 내려선 후, 어린 김정태는 겁 속에 숨어있는 일종의 쾌감을 일찌감치 느꼈다. 그의 산에 대한 기억은 이때부터 비롯됐다. 응석받이가 한 나라의 산악계와 기둥으로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등산을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서울로 이사와 어머니를 따라 불공드리러 북한산을 찿아간 데 있다. 1927년 나이가 불과 11살인 소년 정태는 백운대 정상에서 산에 대한 등정을 싹티우곤 소년단에 입단한다. 그가 첫 바위를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부친의 공부 채근에도 불구하고, 틈만나면 백운대를 오른 그에게 인수봉을 오르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1929년 봄 그는 선교사들에게 가르쳐달라고 하진 못하고, 함께 올라온 사촌들과 함께 백운샘에서 백운대를 오르는 모험등반을 감행한다.

 

다행히 모두들 무사히 올랐고, 이 경험으로 그는 인간과 바위가 밀착해 생동하는 촉감에 완전히 매료되고 만다. 이 때가 그의 나이 열넷, 이후 그의 등반경로는 어느 누구도 말릴 수도 없었고, 비견하기도 힘들 정도로 독보적으로 발전되어  한국산악 30년사(1930년~1960년까지)를 거론할 때 그를 빼놓으면 마치 이 빠진 호랑이 애기를 듣는듯 맥이 빠진다. 1960년대 이후에도 그는 산악사 정립과 후배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에게서 직접 산을 배운 후배들은 그를 늘 큰 스승으로 마음 속에 모시고 있었다.


독학으로 배운 등반기

 

1930년 봄 그는 드디어 인수봉을 오르기로 한다. 바위를 적실 정도의 비가 오고 있었다. 앞선 일본인 청년 3명이 포기하고 내려오면서 그들 일행을 보고 돌아가라는 충고를 했지만 그는 톱으로 인수봉 정상에 섰다. 이후로 인수봉은 그에게 어려운 대상이 못되었다. 이듬해 그는 도봉산으로 무대를 바꾼다. 선인봉 서측면을 통해 만장봉 북동면을 오른 것이다. 하강도중 사촌동생이 추락하면서 다쳐 고된 구출작전이 이어졌고, 집에서 금족령이 내려졌다. 그도 자숙하는 마음으로 산을 금하면서도 대신 윔퍼의 <마터호른 등반기>, 자벨의 <산의 명상>, 영의 <등산기술> 등 산악명서를 섭렵한다. 그러면서도 당시로선 거리가 멀었던 북한산, 도봉산을 피하고, 북악산이나 인왕산 또는 채석장 등 가까운 바위산으로 가서 책에서 배운 기술을 자습했다.

 

1년이 지나자 그의 산병은 도져 아무도 몰래 단독행이 시작된다. 인수봉, 우이암, 오봉 등 오를만한 데를 찿아 혼자 올랐다.  당시 가장 어렵다는 주봉 등반에 나서려할 때 그는 엄홍섭씨를 만나게 된다. 천생연분의 자일파트너를 찿은 것이다. 두 사람은 많지 않은 기존 코스를 자주 오르면서 2년동안 호흡을 맞췄다. 이후 34년부터 두 사람은 초등반 기록은 찬연하게 이어진다.

 

백운대 남벽(1934년4월)

인수봉 동벽/지금의 B코스(1935년 5월)

선인봉 정면벽/지금의 A코스(1937년 5월)

노적봉 남벽 슬랩(1937년 9월)

노적봉 남동면 침니코스/지금의 T침니(1937년 11월)
선인봉 측면코스(1938년 4월) 등의

 

고전적인 코스들이 이들 두 사람의 호흡맞는 자일워크에 의해 뚫렸다. 특히 만장봉 북면 2등 때는 영국영사 아처 일행이 초등 당시 7시간 걸렸던 코스를 2시간만에 올랐고(1934년 5월), 인수봉 B코스 개척은 근교 암장의 제일 큰 정면벽을 처음으로 개척했다는 점에서 당시 등정 위주의 짧고, 쉬운 코스의 등반풍조를 일신하는 괄목할 만한 등반이었다.

  

 

 


국내 최초로 빙폭등반 강행

 

산악서적을 통해 자습으로 습득한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 이면에는 당시 서울에서 연속으로 상영된 독일산악 영화 몇 편이 뒷받침하고 있다. 여기에 1932~1933년 간에 일본인들이 열을 올리며, 금강산을 등반하며, 독주하고 있는데 대한 민족적인 반발도 작용했다. 그의 민족주의적 등산관을 현대 클라이머들이나 등반의 순수성 또는 세계성을 내세우는 클라이머들은 가볍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당시 젊은이들에게 나라상실이라는 현실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되지 않는 가슴 저미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일파트너 엄홍섭씨와 문모씨를 대동하고 1934년 1월  자전거로 160리 길을 달려  경기도 화악산 겨울등반에 나선다. 뮌헨에서 알프스까지 자전거로 달려간 독일의 슈미트 형제의 이야기도 그럴듯 했고, 금강산 동계등반에 앞서 훈련한다는 뜻도 있었다.그들은 피켈, 아이젠, 설피, 로프 등을 준비해갔지만 잡목림을 헤치며 무릎 정도 빠지는 눈사면을 지루하게 올랐을뿐 기대했던 설벽과 빙벽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산행에서 우리는 그의 산에 대한 동경과 열정이 얼마나 진지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1935년 1월 교토대학팀의 백두산 동계 초등반을 이룰 때 그와 엄홍섭씨는 차에서 만난 이시이(일본인)를 데리고, 한인 클라이머로서는 처음으로 겨울에 금강산 비로봉을 올랐다. 도중 무봉폭에서 빙폭등반도 해 당시로서는 일인들도 신경쓰지 않은 빙폭등반에 관심을 두기도 했다. 비록 일인들이 먼저 손을 댄 금강산이지만 그는 일본일들의 등반보다 나은 등반을 해내려고 무척 노력했다.

 

1936년 7월에는 일본인들이 두 번이나 실패하고 1935년 독일인 후퍼의 선등으로 겨우 오른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2릉 쿨루아르를 두 시간만에 돌파하고,1937년 1월에는 동북릉 제1봉 쿨루아르 고도차1000m의 설,빙,암 혼합등반을 해내 제2등을 이룩한다.또한 1938년 10월에는 집선봉 동북릉 제1봉부터 제7봉까지 완전종주 초등을 이룩하고, 1939년 1월에는 설악산을 스키등반으로 동계 초등을 이루며, 1937년 10월에는 금강산 최대 최난의 벽으로 악명높은 집선봉 동북릉 제2봉 북벽에 도전한다. 이 벽은 3차에 걸쳐 시도한 끝에 1941년 10월에 김씨, 양두철, 주형렬 3명이 톱을 교대하여 속등,12시간 반만에 끝낸다. 표고차 1100m에 노출된 암반만 800m인 대암벽이 한국인 클라이머들에게 등정된 것이다. 그들은 그해 겨울 백두산 등반을 위해 훈련을 계속해왔기에 컨디션이 최상인 상태였다.

 

 

 

 

 

백령회 주축맴버로 활약

1936년 7월 금강산 집선봉 등반에 참가한 7명의 한인 클라이머들은 순수한 등반클럽을 조직하려는 뜻에서 면식 있는 일본 순사에게 허가수속을 알아 보았다. 그러나 오히려 조사를 받게 돼 중지하고 만다. 이 해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했고,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한 백두산 탐험기가 연재되는 등  민족의식이 고취된 해였다.

 

이들은 당시 삼국석탄기술 실장으로 있는 엄홍섭씨(김정태씨의 자일파트너와 동명 이인)를 회장으로 모시고, 김정태씨를 비롯 양두철, 주형렬, 엄홍섭, 이억원, 이원세, 위형순씨 등 8명이 주축이 되어 1937년 삼일절에 맞춰 비밀리에 백령회를 창설했다. 이후 해방되기 직전까지 채숙, 이재호, 박순만, 방현, 김정호, 유재순, 이기만씨 등 10명의 2차 회원과 고보생으로 엄익환, 이희성, 김종남씨 등이 함께 활약하게 된다.  

 

집회는 매주 금요일에 열었고, 월1회 과제연구회도 가지며, '평소에는 등산활동도 정진하면서 민족자립을 생각하고, 언제든 이를 위해 유사시에는 앞장서 나가 싸울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일제하에서 회원 전체가 움직이는 사업은 힘들어 파티별로 자유롭게 활동하며, 표면상으로 일본인과 동조하고, 이용도 하자는 매우 현실적이면서 융통성 있는 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모임이 뒷받침 되어 백두산 동계등반이 서서히 무르익어 간다.

 

1939년3월 김정태씨는 단독으로 관모봉~북설령 동계정찰을 나섰다가 북설령에서 처음으로 백두산의 웅자를 대하게 된다. 이 정찰등반은 그해 겨울 백두산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한국 제3위 고봉인 북수백산(北水白山, 2522m) 등반(1939년 12월 ~1940년 1월)으로 그친다. 그러나 이 등반에서 그는 혹한, 폭풍설의 동계등반을 경험하면서 한 걸음 더 백두산에 다가선다.

 

1941년1월에는 북수백산 등반에서 본 개마고원 연화산(2355m)을 목표로 나섰다. 일종의 일인과의 북한 동계초등 경쟁이었다. 아니 경쟁이라기보다 빼앗기기 싫은 민족적인 그 무었이었다. 그 시기에 일본은 대학산악부를 비롯 경성제대산악부(대부분 일본인)가 겨울이면 북한의 고산을 동계등반해 초등 기록을 올리고 있었다. 이해 3월에는 두류산(2309m)에도 동계초등을 이루는데, 이것은 눈산의 가벼운 등반이었지만 이역시 그런 맥락에서 오른 것이었다.
 
백두산을 놓고, 변죽만을 울린 그와 백령회에서 기회가 왔다. 마천령산맥을 뚫고, 해발 2000m의 개마고원을 가로질러 백두산에 이르는 새 루트를 겨울에 오르는 것이었다. 1942년 1월 비밀결사 백령회의 회원들은 대부분 당시 일본인 중심의 조선산악회에 가입해 있었다. 이 조선산악회의 디딤돌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경비대를 동원하지 않은 한인들만의 백두산행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대장도 일인으로 삼아 전인미답의 마천령산맥을 뚫고, 최악의 극한 상황을 극복해 오늘날까지 국내에서 최대 최난의 동계등반(통산 3등)을 이루고 만다. 이후 그는1942년 여름과 1943년 여름에도 잇따라 백두산을 등정, 3회에 걸쳐 민족의 영산 순례를 마치고 해방을 맞는다.

 

 

항상 현장에 있던 산악인

한 시기를 이끈 첨예 클라이머로서의 김정태씨의 활동은 그의 청소년기인 일제시대에 막을 내리는듯 하다가 암울한 시기에 의기소침 하기에는 그의 기백이 너무힘찼다. 해방이 되던 해 그의 나이는 스물 아홉, 두 동강난 땅에서도 그의 등반열은 식을 줄 모른다. 하지만 이미 한반도 최대 최난의 벽등반과 최대 최난의 동계등반을 성취한 그의 활동반경은 그만큼 작아질 수밖에 없었고, 새나라 건설의 꿈을 펼치는 시기에 순수등반만을 고집하기에는 사회여건이 여의치 못했다.  

한국산악회 창립(1945년 9월15일 조선산악회로 창립한 후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과 동시에 한국산악회로 개칭)과 동시에 총무를 맏으면서 그는 제 나라 땅에서 제 이름을 가지고 벌이는 산악행사에 무섭게 달려든다. 11차에 걸친 국토규명사업은 그의 손에서 기획되고, 그의 지휘로 실현되었고, 그의 솜씨로 마무리지어졌다. 이 때 참가했던 무수한 학자와 학생이 그의 건장한 모습과 명철한 판단력을 기억하며, 그의 이른 타계(1988년)를 안타까워했다.

 

1960년대 이후 그에게서 직접 등반을 배우지 않았던 산악인들도 강연회나 대회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를 대할 때마다 한국산악회를 대하듯 숙연해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등반사를 강연으로 발표했고, 타계하기 한달 전까지만 해도 잡지사에 글을 발표할 것이 있다고, 전화를 걸었던 김정태옹((1916년~1988년),

 

그를 일러 '문과 무를 겸비한 산악인'이라고 누가 그랬듯이 그는 평생을 행동가로서 타계하는 순간까지 등산현장에 있은 한국산악계의 태산준령이었다.

 

 

 

 

END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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