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峨嵯山) -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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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뫼이름들~

아차산(峨嵯山) - 1편

by 마루금 2006. 10. 20.

 

 

앗과  아차산  

'앗자'에서 '앗'은 '작다'이고 '자'는 '재(山)'이다. 따라서 '앗자'는 '작은 산'의 뜻이며, '앗달', '아사달'과 통하는 이름이다.


아차고개의 전설

(참조: 옛글 모음자의 "아래아"와 "반시옷"을 표식하지 못하므로 그 부분은 적색 처리 하였슴)

서울 동작구 노량진 사육신묘 앞길은 옛날에는 작은 고갯길이었다. 이 고개를 '아차고개'라 했는데, 이 이름은 다음과 같은 전설에 의해 붙여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영등포 남쪽 시흥에 살던 한 선비가 조정에서 사육신을 처형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이의 부당함을 아뢰어 처형을 막고자 말을 타고, 도성을 향해 급히 달렸다. 그러나 이 고개 마루에 이르렀을 때, 그는 육신이 이미 강 건너 새남터(지금의 용산구 서부이촌동)에서 처형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차! 이미 늦었구나!"하고 한탄하며, 울면서 다시 돌아갔다. 그 뒤부터 이 작은 고를 '아차고개'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땅이름 중에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 있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적 드문 고개길에서 한 사람(그것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의  '아차' 소리 한 마디에 그것이 고개 이름으로 붙여지고, 계속 후세 사람들에게 이어져 널리 불려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아차고개 이전에 익히 불렀던 이름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땅이름은 정착성이 짙어 한번 정해지면 여간해서 잘 바뀌지 않는다. 한 땅이름이 정해지기까지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한 '길들여짐'이 필요한 것이고, 그렇게 길들여져 단단히 굳혀진 땅이름은 특별한 사건(?) 없이는 여간해서 바뀌지를 않는다.

 

지금의 과천시 문원동에 전에 '두집메'라는 마을이 있었다. 홍촌말(洪村)에 딸린 뜸이었는데, 원래 두집이 있어서 붙었다던 이 이름은 오랜 세월이 흘러 세 집, 네 집이 되었어도 여전히 '두집메'였다. 이것은 땅이름의 고착/불변성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 주는 한 예가 된다. "아차 늦었다"는 말 한마디에 금방 '아차고개'로 되고,  '아이구 오금이야'라는 한 마디에 '오금골'이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전설따라 삼천리'식의 지명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아차산 근처는 삼국시대 격전지

서울 성동구 광나루 북쪽, 지금의 워커힐 뒷산을 아차산(峨嵯山)이라고 한다.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온 산줄기에 높이 솟아 남행산(南行山)이라고도 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서는 삼국시대에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전투가 여러번 있었다.

 

<삼국사기> 백제 개로왕 21년 9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 왕  거련(巨璉 / 巨連 /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왕도 한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했다. 고구려 군사들이 군사를 4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나아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궁박하여 어찌할바를 몰라 수십 기(驥)를 거느리고, 문을 나서 서쪽으로 달아나니 고구려 군사들이 쫓아가 살해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을 졸지에 당한 것이 아니고, 꽤 오랬동안 있었던 공방전 끝에 패한 것
으로 여겨진다. "이 때, 고구려의 대로(對盧)인 제우(濟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이萬年)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쳐 7일만에 함락하고,  옮겨 남성(南城)을 치니 성 안이 위급하였다. 왕이 도망갔는데 고구려의 장수 걸루 등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하자, 그들은 왕의 얼굴에 세번 침을 뱉고, 그 죄를 다스려 아차성(阿且城)으로 끌고가 왕을 살해하였다. 그런데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본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던 사람들이다"

 

'아차'가 옛 땅이름에 들어간 예로는 삼국시대 백제 땅의 아차산현(阿次山縣: 지금의 전남 신안 압해면)이 있다. 통일신라 때에는 압해(壓海/押海)군이었고, 고려 때에는 전남 나주에 딸려 압해현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압해면으로 되어 고종 때에는 지도(智島)군에, 1914년 군면 폐합 때는 무안군에, 1969년 이후부터 신안군에 속하게 된 곳이다.

 

'앗'에서 나온 말들 많아

그렇다면 이 '아차'는 무슨 뜻인가? '아차산'의 '아차'는 우리말 감탄사의 '아차'는 아닐 것이다. 추측컨대 이말은 '작은산'의 뜻인 '앗자'의 변한 음 일 것이고, 뒤 음절의 '산'(山)은 산이 보통 세 음절의 지명으로 되는 일반적인 예(즉 매봉 자체로도 산이름인데, 매봉산이 된 것같이)처럼 나중에 덧들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앗자'에서 '자'는 산의 옛말이며, 이 말은 뒤에 '재'란 말로 바뀌어 박달재, 곰재같은 산(고개)이름의 틀을 이루어 놓았다.

 

'자'는 자(尺)가 되어 잣내(尺川: 산골 물의 뜻: 강원 홍천 내면), '자머리'(尺旨: 산골 물의 뜻: 경남 산청읍), '고잣말'(高尺:  높은 재의 뜻: 경기 이천 신둔면 등의 이름에 들어가게 했다. 경기 남양주 와부읍 능내리의 '마재'(馬峴)도 원래는 '산(山)고개'란 뜻의 '말자'(자 또는 '말잣')로, 한자로 두척(斗尺)으로 표기 되기도 한다. 이것은 '말자'의 말을 '두'(斗)자로, '자'를 '척'(尺)으로 취했기 때문이다.

 

'앗'()은 원래 '새로', '다시', '처음', '갓'(初) 등의 뜻을 가진 말이었다. 어원 연구가 최승렬(崔承烈)님은 어원 잡지 '말에서 ''은 '알'(卵)에서 파생했다면서 이 말은 '작'(小), '덜'(未), '다음'(次) 등의 뜻으로 되었고, 앝(앛, 侄)으로까지 음이 변해나갔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일본말의 '오토'(弟)도 이 '앝'에서 근거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새로', '다음', 등의 뜻을 가진 이 ''은 많은 관련어를 파생시켰다. '아이', '아씨', '아씨빨래'(본 빨래를 하기전 대강 하는 빨래), '아시갈이'(애벌갈이), '아시매기'(김매기를 처음 하는 것), '아주머니'(+어머니), '아자비'(+아비) 등. '아침'도 '앗'과 관계있는 말로, 이 말은 '앗'(+)의 변한 말이다.

 

'앗'은 '일찍', ''은 '때'를 나타내는 말이니 '이른 때'라는 뜻이다. '새참', '밤참', '한참', 등의 '참'도 모두 때(時)를 나타내는 말이다. 전북 임실/ 남원 지방에서는 '아적'(아즉)이라고 하는데,  '적'에서 나온 말로, 여기서의 '적'도 '옛적', '올적'(때)처럼 '때'를 나타내는 말이다.

 

유아(幼兒)의 뜻인 '아지'(아기)는 '앗'(앚)의 주격형 '앚이'가 명사 본형으로 굳어진 것이다. 또 옛문헌을 보면 '작은 아이'(小兒)는 '아지'(아기), '유아'(幼兒)는 '아'로 불리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 <삼국유사> 권1. 김알지
그의 말을 따라 '알지'라 하니, 알지는 방언으로 '아기'라는 뜻이다.
   

 

'金庾信....姉妹曰寶姬, 小名阿海, 妹曰文姬, 小名阿之.' <삼국유사> 권1. 김유신
김유신....누이를 보희라 했지만 어릴적 이름은 '아해'였고, 누이 동생을 문희라 했지만 어릴적 이름
은 '아지'였다.    

 

'阿 起語辭, 如阿父/阿母/兒只之類, 自泰漢以來, 巳有此稱, 如阿房/阿嬌/阿蒙之類是也.'<이두편람>
'아'는 뿌리말로 쓰여 아부, 아모, 아지같은 말을 이루게 했다. 진한시대 이후부터  아방, 아조,(嬌는 '교'로 읽지만 옛날에는 '조'로도 읽었음), 아몽같은 말들이 이미 널리 쓰이고 있었다.
   

 

'尙光宗女阿志君, 早卒.' <고려사> 권90. 열전3. 종실

맡딸 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父呼其子曰了加' <계림유사>

아버지가 그 자식을 부를 때 아가라 했다.   

 

'我軍稱 阿其拔都아기바톨,...阿其, 方言小兒之稱也.' <용비어천가> 귄7/10
우리 군사들이 칭하기를 '아기바톨'이라 했다...아기는 방언으로 어린이를 일켣는 말이다. 바톨은 용감한 사람이라는 뜻  
   
'半産 아기디다' <훈몽자회> 상33

 

삼국유사의 왕력(王曆)에 보면, 어지지(於只支: 고구려 국양왕의 한 이름), 아지(阿志: 가락 이품왕의어머니) 등의 이름이 보이는데, 이를 보면 '아지'가 남녀의 아이 이름으로 통칭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할머니 이름 중에 '아지'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어릴 때 부터 이름도 없이 '아지'로 불리다가 이름답지않은 이름이 돼버린 것이다. '아기'를 한자로 아지(兒只)라고 적지만 '지'(只)는 원래 '기'로  읽던 글자였다. 이것은 백제의 다지현(多只峴: 지금의 전남 함평)이 신라 때에 다기(多기)로 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나무의 새로 돋은 가지를 '애채'라고 한다. 또 아치(아지)라고 하는 '나뭇가지'의 방언도 있다. '세밑'의 옛말은 '아설'이며, '작은 설날 밤'의 옛말은 '아설밤'이었다. '아'과 '아찬ㅅ달'은 '조카'와 조카딸'의 옛말이다.

 

'弟侄難存' <두시언해> 권11.13
'와 '왜 비록 이시나 
'甥 /侄  <훈몽자회> 상32
'

 

이로 미루어 보면 '아'은 '앗'(앛)의 연체형이며 이 말은 근본이 아닌 '버금'의 뜻이고, '새로운', 작은'의 뜻도 아울러 갗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지명연구가   배우리(월간 山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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