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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뫼이름들~

서울의 용산(龍山)

by 마루금 2006. 10. 10.

 

용산은 고려 때 도읍 후보지이기도 했고, 풍류객들이 정자에서 시를 읇기도 한 명승지였다. 여의도나 노들쪽에서 보면 용산의 산머리가 꼭 용머리의 모습이다. 

 

 

 


서울 용산은 고려 때부터의 명승지

용(龍)자가 땅이름에 사용된 것 중에는 풍수설과 관계 있다는 것이 많다. 서울의 용산(龍山)도 그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길마재(鞍山:안산)의 산줄기가 남으로 뻗어나가 약현(藥峴), 만리현(萬里峴)을 이루고, 여기서 다시 남서로 뻗은 산세는  당고개(堂峴: 당현)를 서쪽으로 비켜서 한강가에 이른다. 그 앞 동작나루(銅雀津: 동작진), 노들나루(鷺梁津: 노량진)로 둘러 쌓인 곳이 용산이고, 그 앞 강을 용호(龍湖)라고 한다.

 

백제 가루왕 21년(98)에 용 두 마리가 한강에 나타 났다는 기록을 들어 이 곳을 용산이라 했다고 한다. 용산은 고려 숙종 6년(1011)에 도읍할 만한 땅으로 임금께 보고된 일도 있다. 또 25대 충숙왕은 공주와 함께 넓은 강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막을 치고, 행궁을 삼아 나랏일을 살피기도 하였는데, 1325년 가을에는 원자(元子)를 낳는 경사를 맞아 그 아기를 용산원자(龍山元子)라 하였다. 그러나 왕비가 아기를 낳고, 며칠 후에 1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임금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 때에 충숙왕과 공주는 10리나 되는 긴 호수를 이루고 있던 이 곳 용산강에서 만발한 연꽃도 구경했다고 한다.

 

<팔역지: 八域誌>를 보면, 그 당시의 이 곳 강물은 지금의 여의도 샛강이 한강의 본류를 이루고, 용산 바로 앞이 지류였는데 하류쪽 염창(鹽倉) 앞 머리에 계속 모래가 쌓이면서 물길이 막힌 연못처럼 물이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물이 절벽 아래로  유유히 흐르고, 서쪽으로 잉화도(仍火島: 여의도)와 밤섬(栗島: 율도)이 보이며, 멀리 남쪽으로 관악산과 청계산이 병풍처럼 둘러있는 좋은 명승지여서 용산은 고려 이래로 풍류객들의 정자를 짓고 시를 읊던 곳이었다.

 

서울에서 보통 용산이라 하면 용산역 앞 한강로 일대를 생각하게 되는데 원래 용산은 위의 이야기와 같이 마포 가까운 한강가의 작은 산, 즉 지금의 원효로 4가, 산천동 북쪽의 산머리를 가리킨다. 이 산머리를 서부이촌동, 원효대교, 노량진 쪽에서 바라보면 용이 머리를 한강물에 넣고, 물을 먹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 용의 눈(眼)자리가 되는 곳에 자유당 시절 한 권력자의 별장이 있었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한강로쪽 모랫벌을 개발하면서 주택지를 이루게 되자 그 곳을 '신용산'(新龍山)이라 한 까닭에 이제 원래의 용산은 용산이 아닌 구용산(舊龍山)이 되어 버렸다.


END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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