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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뫼이름들~

지리산(智異山)의 지명

by 마루금 2006. 6. 28.

 

 

두루와 지리산

 

지리산에 얽힌 전설

지리산의 여신 마야고(麻耶姑)는 남신 반야(般若)를 사모하여 그리운 반야의 옷 한 벌을 고이 지어 만나서 전해줄 기회를 찿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가 잘 닿지 않아 마음을 태웠다. 달 밝은어느 날 밤, 마야고는 지리산 중턱에 않아 반야의 옷을 품에 안고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꿈에도 그리던 반야가 자기쪽으로 손짓하며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마야고는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의 물결 속으로 반야의 옷을 든 채 달려갔다. 그리고 정신없이 무엇을 잡을 듯이 허위적거렸는데, 이상하게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리운 반야는 보이지않고, 쇠별꽃들만 달빛 아래서 바람에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쇠별꽃의 흐느적거림을 반야가 걸어오는 것으로 착각한 것을 알게 된 마야고는 너무나 실망하여 두 손바닥에 얼굴울 파묻고 울었다.

 

마야고는 그 뒤로 자신을 속인 쇠별꽃을 다시는 피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정성껏 지어 두었던 반야의 옷도 갈기갈기 찟어서 숲속 여기저기에 흩날려 버렸다. 또 매일같이 얼굴을 비춰 보던 산상의 연못은 신통력을 부려서 메워 없앴다. 마야고가 갈기갈기 찟어 날려버린 반야의 옷은 소나무 가지에 흰 실오라기처럼 걸려 기생하는 풍란(風蘭)으로 되살았는데, 특히 지리산의 풍란은 마야고의 전설로 환란(幻蘭)이라고 부른다.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반야봉(般若峰)은 마야고가 늘 바라보고 반야를 생각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마야고가 메워버렸다는 못은 누군가가 천왕봉 밑 장터목에서 찿아내 '산희샘'(山姬샘)이라고 이름붙였다. 마야고의 한과 노여움을 풀어주기 위해 고려 때 천황봉에 사당을 세우고, 여신상을 모셨는데, 일제 때 한 왜병이 군도로 그 코와 귀 하나를 잘라버리려하다가 신벌을 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리산에 얽힌 전설이다.

 

또 고려사(高麗史)의 악지(樂志)에 '지리산가'(智異山歌)라는 백제가요의 내용이 나오는데, 작자와 연대도 알 수 없고, 그 가사도 전하지 않고있다. 백제 때 지리산녀(智異山女)가 남편과 단 둘이 구례현(求禮縣)의 지리산 골짜기에 살고 있었다. 이 여인은  얼굴이 곱고 마음이 착했으며, 집안에서 부도(婦道)도 다했다. 하루는 지리산으로 사냥을 나온 백제왕이 우연히 이 지리산녀를 보게 되었는데, 한 눈에 반하고 말았다. 왕은 욕심을 내어 지리산녀를 궁으로 데려가 후궁으로 삼으려했으나, 지리산녀는 죽음을 각오하고, 절개를 지켜 왕의 명령을 좇지 않았다. 결국 지리산녀는 왕에게 잡혀갔는데,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자신의 심정을 노래로 지어부르면서 모진 형을 받고 죽어갔다. 이 때 그녀가 부른 노래가 '지리산가'이다.

 

두류산과 지리산 

우리나라의 모든 명산에는 그 나름대로의 전설이 있다. 또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것도 적지 않다. 지리산도 명산이기에 예외는 아니어서 위와 같은 이야기가 후세에 전해오는 것이다. 지리산. . .  한반도의 남부에 자리잡아 '내가 왕이요'라며  소백산맥 한 허리에서 머리를 불쑥 내밀고, 어마어마한 산덩어리를 이룩한 지리산, 전북, 전남,경남의 3개 도와 남원, 구례, 산청, 함양, 하동의 5개 군에 걸쳐있고, 해발 1915m의 천왕봉(天王峰)을 중심으로 반야봉(般若峰), 노고단(老姑壇) 등 많은 봉우리를 안은 지리산을 누구는 아예 '산'이 아니라 '봉무리'(高峰群)라 했다. 이렇듯 잘 알려지고, 한반도 안에서 크게 손꼽는 산이 건만 '지리산'이란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질 않다.

 

지리산을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했다. 방장산은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과 함께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지리산은 또 두류산(頭流山), 남악산(南岳山), 방호산(方壺山) 등의 이름을 갖기도 했다.

 

두류산 양단수(兩湍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어라 / 아희야,  무릉이 어디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여기에서의 두류산은 바로 지리산이다. 그러면 두류산과 지리산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 의문은 먼저 호남지방의 방언 특징을 알아보면 쉽게 풀린다. 이 지방에선 발음에 있어서 구개음화(입천장 소리)가 아주 심하다. 형님을 성님, 힘을 심, 기름을 지름, 길을 질, 드새다(뜬눈으로 밤을 지새다)를 지새다 식으로발음하는 특징이 있다. 이로 보아 지리산이란 이름이  '두류산'  또는  그와 비슷한  어떤 이름에 근거했음을 짐작하긴 그리 어렵지 않다.

 

두류산 또는 이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산은 전국에 무수히 많다. 두류산이나 두류봉, 두류령은 함남 단천과 길주 사이, 함남 문천과 평남 양덕 사이, 강원 화천, 전남 신안, 전남 나주, 전남 순창, 전북 임실과 순창 사이, 경기 이천, 강원 평창, 경남 거창,평북 영원과 맹산 사이 등 여러곳에 있다.

 

두류봉은 전남 강진과 해남 사이, 강원 태백산맥의 향로봉 남쪽, 강원 명주와 양양 사이에 있고, 두리봉은 강원 삼척, 충북 보은과 옥천 사이, 강원 정선과 명주 사이, 강원 춘성, 강원 평창, 전남해남, 경기 광주, 충남 논산, 전북 전주, 전북 임실, 전남 영암, 대구, 경북 군위 등에 있다.

 

두로봉은 강원도 오대산에 있고, 두륜산은 전남 해남, 두랑산은 강원 삼척, 두룡봉은 평북 강계, 경기 이천 등에 있다. 그런데 이들 산의 특징을 보면, 산봉(山峰)이 둥글거나 산세가 그리험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어느 터를 둥글게 울타리치듯 다른 산과 함께 휘어돌고 있다는 점이다. 두류는 두루와 두리에서 '두루'와  '두리' 또는 그에 가까운 말을 옛말이나 사투리에서 그 뜻을 찿아보면 앞의 두류, 두리 등의 산이름과의 관련을 알아볼 수 있어 재미가 있다.

 

용비어천가 69장에 보면 '도르혜 용이 싸호아'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드르'는  '들'의 옛말인데, 이 말은 지방에 사투리로 남아 강원도에서는 '두루'  또는 '뜨루'라 하고, 함경도 지방에서는 '두루' 또는 '두뤼'라 한다. '뜰'은 '집안 마당'이란 뜻이지만, 전남이나 평북 지방에선 '들'의 사투리로 쓰이고 있으니, 이 말이나 '뜨락', '뜨란', '뜨렁' 등도 모두 '들'에 그 뿌리를 두고있음을 알 수 있다.

 

(참조: 아래 문장에서 옛글 모음자의 "아래아"자를 표식하지 못하므로 적색으로 표시 하였슴)

'두루','두리'를 '들'에 관계지어 설명했지만, ''에서 나온 말로 '땅' 또는 '산'의 뜻이다. 대구의 옛이름 '달구벌'은 '산으로 둘러쌓인 들'(분지)의 뜻이고, 남한강의 지류인 '달내'(達川)는 물맛이 달아서 붙여졌거나 전설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산(山)의 물'이란 뜻이다.

 

강원도 고성의 삼국시대 이름은 '달골'인데, '달'이 '산'이므로 '높다'의 뜻을 취해 나중에 '고성'으로 바꾼 것이다. '두루'와 '두리'는 꼭 '들'이나 '산'의 뜻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종이를 가로 길게 이어 둥글게 돌돌 만 물건을 '두루마리'라 하는데, 여기서의 '두루'는 '둥글게'의 뜻이다. 

 

'나치 두렵고 조호미 보름ㅅ달가트시며 <月印釋譜> '두렵고'는 '둥글고'의 옛말로, 그 원형에는 '두렷다'와 '두렫다'도 있다. 이 말에서 '두리'(둘레)라는 말이 나와 '두리목'(둥근재목). '두리반'(두레상), '두리새암'(우물의 사투리), '두리 함지박'(둥근 함지박) 등의 말을 파생시켰고,  '돌려가며 돕는다'는 뜻의 '두레'라는 말도 생겼다.

 

우리의 전통 옷 중에는 '두루마기'가 있다. 주로 예복 또는 외출할 때 겉옷 위에 입는 한국 특유의 웃옷인데, 한자로는 '주의'(周衣), '주막의'(周幕依)라고 해서 '둥글 주'(周) 자를 넣는다.   

 

그렇다고 보면, 산마루가 두리뭉실하거나 어느 고장을 울타리 치듯 둥굴게 휘어 돈 산을 '두루산' 또는 이에 가까운 음의 산이름으로 굳어졌을 것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두레산', '두른산'. '도른산'(들은산)과 같은 방언 지명이 남아있게 된 것이고, 더러는 '두류'(頭流), '두로'(頭老,斗露), '두륜'(頭輪) 등의 한자식 산이름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었다. 

 

'두레산'은 '도레산'과 발음이 비슷해서, '돌의산'으로 잘못 해석, 돌의 음에 연유하는 '돌산'(乭山), '도라산'(都羅山), '도락산'(道樂山) 등이 나왔고, 돌은 한자로 석(石)이라고 해서 '석산'(石山), '석의봉'(石依峰) ,'석우현'(石隅峴) 등의 이름으로 되기도 했다.


''은 달(月)이 되기도 

'달'은 '달'과 음이 비슷해서 월(月)로 되어 색다른 지명을 낳았다. 서울 강서구의 '신월동'(新月洞)은 옛이름이 '곰달래'인데, 여기서의 '곰달'은 '곰달'로  '큰 들'(넓은 들)의  뜻이었다. 그런데 곰달을 '고운 달'로 해석해서 한자로 신월(新月)이 되었다.

 

산이름의 '월출산'(月出山)과 '월악산'(月岳山)은  '달아'  또는  '달앗'에서  나온 말로 '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즉 월출산은 '달아뫼'-달라뫼-달나뫼-달내뫼-월출(月出: 달을 낸다는 뜻)의 과정으로 된 이름이고, 월악산은  '달앗뫼-달앗뫼-달악-월악(月岳)의 과정을 거쳐 정착된 이름이다. 월출산이 있는 영암군만 해도 월평(月坪), 월곡(月谷), 매월(梅月) 들의 '월'자 지명이 많고, 그 이웃의 함펑군에도 월산(月山), 월봉(月峰), 월천(月川) 등 '들'에 연유하는 많은 지명들이 있다. 영암군의 옛 땅이름은  '산이 낮은 고을'이란  뜻의  '낫골'인데,  ''은  '달'(月)이 되고 '낮'은 내가되어 '월내군'(月柰郡)으로 되었다가 '월'은 '얼'과 발음이 비슷해 '영'(靈)을 취해 '영암'으로된다.

 

고구려 때의 땅이름 중에는 ''(達)의 음이 들어간 것이 많았는데, 삼국통일 후인 신라 경덕왕 때 모든 지명을 한자로 붙이면서 대개 '산'(山)자가 들어간 지명으로 바꾸었다. 즉 '낮은 산'이란 뜻의 '얃달'(녯달)이 '난산'(蘭山)으로, 소나무란 뜻의 '부사달(夫斯達)이 '송산'(松山)으로, 수풀이 우거진 산이란 뜻의 '것달'(加支達)이 '황산'(荒山)으로 바뀐 것이다.  

 

대구의 옛이름은 '달구'(達丘)는 '달'과 '구'가 모두 산이라해서  '큰 언덕'이란 뜻의 '대구'(大邱)라 했다가, '구'(丘)가 중국의 성인 공자(孔子)의 이름자라 해서 '구'(邱)로 바꾸어 '대구'(大邱)로 한 것이다. 박달(朴達), 승달(僧達), 유달(儒達), 동달(東達), 달이(達伊) 등의 '달'은 모두 산의 뜻을 취한 것이다. 햇빛이 드는 곳과 안드는 곳을 가리켜 '양달', '응달'이라고 하는데, 여기서의  '달'은 땅을 가르키는 것이다.

 

 

 

백두산 지륜 흘러 지리 되고

대흥사(大興寺)가 있는 호남의 두륜산은 문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백두산의 지륜(地輪: 지리)이 흘러 지리(智異)가 되고, 천관(天冠: 장흥군에 있는 산)이 되며, 다시 두륜(地輪: 지리)이 되므로 백두(白頭)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 도호부> 이로 보아 두륜산이 지리산과 동의어가 됨을 알 수 있다. 어떻든 지리산은 두류산과 같은 이름이며, 이 산이름은 '' 또는 '두리', '두레'와 같은 옛말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확실하다.   


글/지명연구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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