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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뫼이름들~

속리산(俗離山)의 지명 - 2편

by 마루금 2006. 6. 10.

 

 

속리산 동쪽 일대의 땅 이름들 

1) 선돌(入石里)에서 윗신섬이(上五里)까지

이 길은 상주의 화북면을 종단으로 하는 산길 이다. 즉 서쪽의 속리산 기슭과 동쪽의 청화산, 도장산 바탈 사이의 냇줄기를 따라 뻗은 길인데, 장암리에서 서쪽 기슭을 파고들면 속리산 정상을 오를 수 있다. 먼저 입석리의  동네 이름부터 알아보자. '입석리'라는 이름은 '선돌'이라는 바위 이름에서 나왔다. 입석리 남쪽에는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는데, 이 곳의 전설로는 옛날 어느 장사가 이돌을 걸망으로 메고 오다가 세워 놓았다는 것이어서, 이 곳의 마을 이름까지 '선돌' 또는 '선돌배기'가 된 것이다. 근처의 옥량폭포 서쪽 위에는 '보굴암'(寶窟庵)이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단종의 충신인 김종서의 손자가 이 곳에서 피신하여 살다가, 뜻 밖에 세조의 딸과 만나서 원수간에 내외가 되어 살았다는 것이다. '선돌' 마을에서 그 남쪽의 '늘고개'까지는 여린 비탈길인데, 이 길에 청화산을 삥 돌아바라 본다는 '회룡골'이 있고 '솔학골'(松鶴洞)이란 좋은 이름을 가진 마을도 있다. 이 근처에 정자가 있던 들은 '배나무정이' '참나무정이'라는 이름을 낳아 주었다.

 

'늘치'라는 고개를 넘으면 '장암리'(壯岩里)가 된다. 큰 바위가 있어 '장바위'라 하던 곳인데, 이 곳의 북서쪽에는 '견훤성'이라는 성터가 있다. 견원은 가은(加恩)에서 나서 그 누이와 함께 청화산의 돌을 한 치마씩 주워 하루 밤낮 동안에 둘레 800m의 이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켜 후백제를 세웠다는 것이다. 장바위의 서쪽에는 세조 임금이 왕림했다는 '시어동'(侍御洞)이란 마을이 문장대 밑에 자리하고 있고. 그 남서쪽에 독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독바위골'이란 골짜기를 따라 오르면 경업대에 닿을 수 있다. 장바위 남동쪽은 '양수바지'란 이름의 들인데, 이이름은 두 내가 합쳐진데서 붙은 이름이다.
   
조금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늘안목'(어항)이란 마을이 있고, 장터를 지나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면 '상오리'라는 이름이 붙은 마을이 나온다. 상오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은 '쉰섬이'이다. 이 이름은 좁쌀 쉰섬을 거두었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한자로는 '오십석'(五十石)이라고 한다. 쉰섬이 위의 마을을 '윗쉰섬이'라 하고 한자로는 '상오십석'(上五十石)이라 하였는데 뒤에 '상오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상오리에는 또 '높은다리'(高橋)와 비좁은 고갯길에 있어 붙은 이름인 '비조개'라는 마을도 있다.

 

2) 화북 장터에서 원적암까지

행정구역상으로는 대체로 상주 화북면 용유리 일대이다. 옛날에는 용주 안쪽의, 지금의 상오리, 장암리, 용유리를 통틀어 '용유동'이라 하였는데, 산수가 좋기로 유명하였다. 화북 장터에서 북동쪽으로 1.2Km 쯤 가면 먼저 '담안'(潭內)이라는 마을에 닿는다. 이 북쪽에 '병천'(甁泉)이라는 마을이 있고, 그 서쪽에 '쌀난바우'(米岩)라는 바위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 구멍에서 날마다 쌀이 나와 그 밑의 암자의 중들이 겨우 먹을만 하였는데, 하루는 주지가 욕심을 부려 쌀이 더 나오라고 더 크게 구멍을 파헤쳤더니, 쌀이 한 톨도나오지 않아 그 절이 망하였다고 한다. 그 북쪽 '마지고개'를 넘어 한참 가면 '원적암'(圓寂岩)암자에 닿는다.

 

3) 아랫눌치에서 활목고개까지 

이 길은  장암리의 아랫눌치에서 북서쪽으로 꾸불꾸불 뻗은 길인데, 문장대를 서쪽 또는 남쪽으로 두고 걷는 길이다. 먼저 아랫눌치에서 '밤치'(栗峙)를 넘으면 화북면의 '중벌리'(中伐里)가 된다.  벌판 가운데 이룩된 마을이라 하여 '중벌'이란 이름이 붙게된 이 곳에는 '벌들'이라는 으뜸 마을과 '밤치' '대흥동' 등의 마을이 있다. 대흥동에서 남쪽 골짜기길을 파고들면 보은군 법주사로 가는 '속사재'라는 높은 고개가 있다. 대흥동에서 신흥동을 거쳐 '중흥동(中興洞에이르면 고려시대에 큰 절이 있었다는 '구사막골'이 북서쪽 골짜기에 있고, 큰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모양이 활처럼 생긴 '활목고개'에 닿는다.          


 

속리산 서쪽 일대의 땅이름 

1) 활목고개에서 벌말(長甲里)까지

이 곳은 보은군 산외면인데, 묘봉과 주봉(周峰: 청원군 미원면과의 경계에 있는 산)사이의 깊고 긴 골이다. 상주의 화북면에서 활목고개를 넘어오면 먼저 보은 산외면의 대원리(大元里)가 되는데 이 곳에는 동자(童子)처럼 생긴 산을 뒤로한 으뜸마을 '여동골'과 그 북서쪽에 체 모양의 산줄기가 있는 '체메기'(체목이, 체항리), 근처에서 가장 높은 신선봉 산맥에 있다해서 이름 붙은 '높은제미'(높은점이: 高店里)등의 산골 마을이 있다.

 

대원리의 남쪽은 신정리(新正里)인데, 이 곳은 바위가 많아 '바위골'(岩洞)이라 했던 곳이었다. 여동리에서 남쪽으로 냇길을 따라 2.5Km 쯤 내려오면 장갑리(長甲里)의 '새말'에 닿는다. 이 마을은 '안나메기'라는 이름이었는데, 장갑리에서 맨 나중에 이룩된 마을이라해서 '새말'로 불리게 된 것이다. '나매기'라는 마을 이름은 '남악'(南岳)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의 장갑초등학교의 북쪽에 깔린 집무리를 말한다. 장갑초교의 남쪽 들 가운데는 '벌말'이란 마을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파평 윤씨가 수목을 치고 들어와 맨처음 개간한 곳이라 한다. 나매기의 북동 골짜기 안의 마을은 '안마을'이고, 장갑초교 서쪽 구석에 있는 마을은 '귁말'이란 이름을 가졌다. 귁말은 '구석말'이 '구억말'로 변하고, 그것이 다시 변해 돤 이름이다.
 
2) 진터에서 법주사까지

이 곳은 보은 내속리면의 상판리 일대로 도로사정이 좋아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길이다. 외속리면에서 내속리면의 갈목리(葛木里)로 넘는 고개를 '말재'(말치)라 하는데, 이 이름은 세종대왕의 행차와 관계가 있다. 세종대왕은 신병을 치료하러 속리산을 온 일이 있는데, 대왕은 이 고개를 말을타고 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외속리의 장재리에는 대왕이 임시대궐을 짓고머물렀었다는 '대궐터'라는 마을이 있다.

 

말재에서 북쪽으로 뻗은 포장길을 따라 한참 내려오면 내속리면 상판리의 '진터'에 닿는다. 옛날, 진을 친 일이있어 이 이름이 붙었다는 이 마을 근처에는 '늘근이', '새목이'(뒷산 모양이 새처럼 생겨), 새양골(생골) 등의 마을이 있고, 세조가 벼슬을 주었다는 유명한 소나무인 '연걸이'(正二品松)가 있다. (* 연걸이는 세조가 속리산에 올 때 이 소나무 가지에 연이 걸렸다해서 붙은이름) 이 곳의 이명(理名)으로 붙은  '상판'(上板), 중판(中板), 하판(下板)은 '널다리'(板橋)에서 연유된  '늘근이'(널근이)를  마을 위치에 따라 '윗늘근이' '중간늘근이' '아랫늘근이'로 붙였던 것을 한자로 옯긴 것이다.

 

새목이에서 사내천(舍乃川)을 따라 1.5Km 쯤 오르면 사내리(舍乃里)의 '사냇골'에 닿게 된다. '사내'(舍乃)는 법주사가 있다해서 붙은 이름인데, 이 일대에는 수정암, 남산약수, 탈골암,복천암, 상고암, 석문, 여적암, 온폭동, 상환암, 학소대 등의 고적이 깔려있다. '탈골암'(脫骨岩)은 법주사 동쪽 2.6Km 지점에 있는 암자인데, 신라 탈해왕 때 경주 김씨의시조인 김알지가 자신의 얼굴이 닭의 머리와 흡사함을 비판하여 이 곳에 와서 이 약수를 마신뒤 사람의 모습으로 되었다해서 붙은 이름이다. (삼국유사에 기록) 사냇골 남쪽 마을을 '청주나들'이라 하는데, 이것은 이조 때 이 곳에서 청주 관가로 가는 갈림길이 있었다해서 붙은 이름이다.

 

3) 중판리 점말에서 장갑리 벌말까지

이 곳은 중판에서 멀리 주봉(周峰)을 향해 긴 골짜기를 타고 내려간 냇줄기 일대이다. 전에 사기와 옹기 그릇을 구웠다는 '점말'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가면 '새터말'에 닿고, 그 근처의 '안텃골','벌말'을 뒤로하고 한참 더 가면 '아랫늘근이'(下板), 여기서 1.5Km 북으로 더 내려가면 북암리(北岩里)의 '세강터'(앞에 세 갈래로 흐르는 내가 있음) 마을에 닿는다.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북바위'라 했던 이 북암리 일대에는 '부내실', '농바위', '소리목'(松峴: 전에  소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해서) '부수골' '무수목' 등의  마을과  '북바위' '농바위','탕건바위','누룩바위','매바위','안장바위','자동차바위','칼바위' 등 모양에 따라 붙여진 이름을 가진 많은 바위들이 있다.

 

세강터에서 북서쪽 산길로 등선을 넘으면 '잦고개'(栢峴) 마을이 되고, 거기서 옛날 고구려와신라의 국경으로 정한 성이 있었다는 '성고개'(성재)를 넘으면 산외면 백석리(白石里)의 '은점'(전에 銀店이 있었음)마을에 이른다. 1956년 피란민들이 모여 집단으로 개간한 난민 정착사업장이 있어 '백석사업장'이라고도 불린 이 곳을 지나면 장갑리의 벌말에 닿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몇몇 산을 중심으로 한, 재, 내, 마을, 골짜기, 바위 이름들을 살펴보며 우리 누리의 땅 이름들이 어떻게 붙여졌는지를 대강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누리의 땅 이름들이 거의 '어떤 곳', '무엇이 있는 곳', '어떤 모양'이냐에 따라 붙여진 것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음의 변화를 가져와 뜻을 짐작할 수 없는 묘한 이름으로 된 것도 많음을 보았다. 거기다가  한자로 붙여졌던 이름은 우리말 이름처럼(예: 南岳(남악)-남악이-나마기-나매기),우리말 이름으로 붙여졌던 것은 한자 이름으로(예: 북바위-북암(北岩) 마구 넘나들어 한 이름이 어떤 이름에서 시작되어 어떻게 변해 온 것인가를 알기 어려운 것도 매우 많다.

 

특히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오목다리'를 '오목교'(梧木橋)로한 것처럼 취음하여 바꾼 것이 있는가 하면, '검은돌'을'흑석동'(黑石洞)으로 한 것처럼 뜻으로 바꾼 것도 있고, '논고개'를 '논현'(論峴)으로 한 것처럼 그 두 가지를 절충한 것도 있어 원래의 지명이 어떤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는 것은 지명풀이에 능통한 학자라도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보은군 내속리면의 '대목리'(大木里)라는 한자 표기의 지명을 생각해 보자. 누구나 이 지명을 보면 '큰'과'나무'를 먼저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큰나무'나 그와 비슷한 뜻을 가진 이름이 한자로 그처럼 표기된 것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이름은 '나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 곳이 그 지역의 '큰'(통로의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 좁은 곳)의 밑이 된다 해서 대목(大木)이라 했던 것이다.

 

하나만 예를 더 들어보자. 서울 강동구의 '오금동(梧琴洞)은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던 중에 넘긴 고개에서 "아이구 오금이야"라고 외친 말에서 연유된 이름인데, 무릎의 구부린 안쪽인 '오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오금'(梧琴 :오동나무로 가야금을 만드는 곳)이 되어 엉뚱한  해석을 낳게도 한다. 바로 이 점이 우리 지명 한자 표기의 맹점이다. 결국 어떤 일정한 규칙이 없고, 기준이 없는'지명의 한자화'는 이렇게 우리에게 뜻의 혼돈을 안겨주고, 그 알맹이인 원래의 우리 이름이 어떤것이 었는가를 알게 하는데 큰 방해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글/지명연구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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