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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뫼이름들~

북한산(北漢山)의 지명 - 2편

by 마루금 2006. 6. 4.

북한산의 봉우리 이름      

 

1.백운대(白雲臺) 

일명 '백운봉'이라고도 하며, 북한산의 최고봉이다. 높이 836미터로 날씨가 맑은 날은 인천 앞바다의 섬이 보이는 정도이다. 아래 굴 속에 솟아 흐르는 약수물은 '백운수' 또는'만수'라 하였다.

 

 

 

 

2.인수봉(仁壽峰)

북한산의 제 2봉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이 봉우리를 일컬어 '인수제일봉'이라 했다. 백운봉 동쪽에 자리하여  대포알을 똑바로 세워놓은 것 같은 큰 바위 하나로 우뚝 솟은 이 봉우리는 산신과 산악 숭배가 풍수 도참 사상으로까지 발전한 조선시대에 와서는 북한산의 어느 봉우리보다 관심을 끌어 이름 자체도 '인수'(仁壽)인 것이다.

 

이 봉우리가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형국이라 하여, 풍수지리면에서 좋치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은인왕산 서쪽의 길마재(鞍山)를 '무악'(母岳: 어머니의 산)으로, 또 길마재의 남쪽 고개를 '떡고개'로  남산 동쪽고개(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벌아령'(伐兒嶺: 아이에게 벌을 준다는 뜻)으로 이름짓기까지 했다. 즉 인수봉의 형국은 아이가 나가는 모습이지만,  어머니(母岳)가 떡을 주어 못 나가게 달래고, 그래도 나가려 하면 벌을 주어(伐兒) 절대로 못 나간다는 생각을했던 것이다.

 

 

 

 

3.만경대(萬景臺)

일명 '만경봉'이라고도 하며, 다른 이름으로는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한다. 만경대라는 이름은 주위의 모든 경치를 볼 수 있다는데서 붙여진 것이고,  국망봉은 조선 초 이태조의 명을 받은 무학대사가 이 봉에 올라 나라 다스릴 터전을 살펴보았다는데서 붙여진것이다.  또 서울을 바라볼 수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망경대(望京臺)라는 이름도 있으나, 이 이름은 만경대의 발음이 망경대로 되어 덤으로 붙여진 이름이라는추측들이 나온다.

 

고려 우왕 원년(1375)6월에 큰 비가 내려 이 봉우리가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으며,선조 30년(1597)에는 이 봉우리가 우리와 같이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도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이곳에서 자주 기우제와 기설제를 지냈다는 것이다.

 

 

 

 

4.보현봉(普賢峰)

북한산 대성문 밖의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로 문수봉의 동남쪽이 되는데, '보현봉'이란 이름은'보현보살'의 이름을 딴 것이다.

 

5.문수봉(文殊峰)

만경대에서  남남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2키로미터 지점에 솟은 봉우리로  이 봉우리 아래에 '문수사'(文殊寺)가 있다.

 

6.비봉(碑峰)

문수봉 서쪽에 있는 봉우리로,  신라 24대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어  '비봉'이란  이름이 붙여진것이다. 국보 제 3호로 쑥돌(화강석)로 된 진흥왕 순수비는  비봉 절벽위에 동남향하여 세워져있었는데, 1400여년의 기나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모진 비바람에 심하게 얼굴이 깎여 그 보호의 필요성에 따라, 1972년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보관하고 있다.

 

7.그 밖의 봉우리들    

북한산에는 위에 든 봉우리 외에도 노적봉(露積峰), 원효봉(元曉峰),나한봉(羅漢峰),증봉(甑峰),용혈봉(龍穴峰), 의상봉(義相峰), 매봉(罵峰)등이 있으나, 이 봉우리 이름들에 관해 특별히 붙여둘 이야기는 많지가 않다.

 

 

 


북한산 근처의 땅 이름

 

1.우이동 근처

서쪽으로 삼각산의 백운대와 인수봉의 아름다운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우이동 일대에는산수(山水)와 관련된 많은 옛이름들이 깔려있다.  수석이 아름다와 옛부터 놀이터로 유명했던 이 곳의 자연 지명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옛 향취 속에 묻히게 한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 한성부 숭신방(崇信坊)의 지역으로서 1914년 4월1일 부제(府制) 실시에 따라 성밖 시오리(城底十五里)의 지역이 되어,고양군 숭인면(崇仁面)에 편입 되었다가 1949년8월15일 서울특별시 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됨에 따라 우이동(牛耳洞)이 되었다.


삼각산의 백운대와 인수봉이 마치 소의 귀처럼 보여 마을 이름은 원래 '소귀'(쇠귀: 쇠귀골)인데 한자명으로 '우이리'(牛耳里)였다. 이 일대엔 '소귀' 또는 '쇠귀'라는 지명이 여럿 있다. 우이동에서 북쪽 송추 방향으로 큰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 고개 이름은 '쇠귓고개'(牛耳嶺)이다. 또 이 쇠귓고개의 동쪽으로 큰 바위 봉우리가 하나가 솟아 있는데, 이 이름은 '쇠귓바위'(牛耳岩)이다.

 

우이동에서 시작되어 한내로 흐르는 내는 옛부터 '소귀내'(牛耳川)라 불려왔다. 북서쪽으로 높은 산으로 아늑히 둘러쌓인 이 지역에는 '흐드릿굴'(휘돌잇골:골짜기가 좁고 험해 휘돌아서 돌아가게 되었다 해서  붙은 이름)을 비롯해서 고양이의 굴이 많다는 '괭이골', 매바위가 있다는 '맷굴', 어귀가 문설주 같다는 '문굴', 옛 절이 있었다는 '절굴', 윷판 바위가있다는 '윷판바윗굴', 독바위가 있다는 '독굴', 늘어진 바위와 돌이 많았다는 '너럭굴', 골이 깊다는 '긴골', 물푸레나무가 많았다는  '무푸렛굴'(물푸렛골)등의 골짜기 이름이 있다.
     
또 고개도 많아 '쇠귓고개'외에도 '새우고개', 사냥꾼들이 짐승을 지키는 목이 있었다는 '새마지기', 깊은 골짜기 않으로  쑥 들어간 곳에있다는 '쑥고개'(쑥이 많대서 붙은 이름이 아님), 백운대로 가는 길에 있는 '하루재고개' 등이 있다. 그리고 고개는 아니지만 연산군 묘가 있는 '시루봉'도 함께 기억해 둘 만 하다.

 

주위가 온통 바위산인 이 지역에는, 매처럼 생긴 '매바위', 소두방(솥뚜껑)처럼 생긴 '소당바위',역적봉(백운대 북쪽 봉우리: 봉우리가 한양을 저버리고 북쪽을 향해 숙여 역적 같다고해서 붙은 이름), 독처럼 얻혀있는 '독바위'(인수봉 동쪽)등 묘한 바위들이 많다. 옛부터 많은 이들의 애환이 깃든 이 우이동 북한산 기슭에는 지금은 4.19의 젊은 넋들이 조용히겨례의 장래를 지켜보며 잠들어 있다.

 

2.수유동 근처

수유동은 원래 한성부 동부 숭신방의 일부로서 무너미 고개가 있어 '무너미' 또는 '수유리'(水踰里)라 했었는데, 1914년 부제 실시에 따라 성 밖의 지역이 되어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 되었다가1949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됨에 따라 '수유동'이 되었다. '무너미'라는 마을 이름을 낳은 '무너미고개'는  원래 '물넘이고개'란 지명이  변한 것인데, 마을 앞의 고개가 너무 낮아 물이 고개를 넘는데서 이 이름이 붙은 것이다. 한자 이름 '수유'(水踰)도같은 뜻이다.

 

무너미에서 우이동으로 가는 길에 '가오리'(加五里)라는 마을이 있다.지금의 쌍문동 근처의 마을인데, 이 이름이 붙게 된데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조선시대에는 성 밖 십리까지를서울지역으로 삼았는데, 이 곳은 땅 모양이 다른 곳과 달라 특별히 5리를 더해 이 곳 까지를 서울지역으로 넣었다는 것이다. 즉 5리를 더했다는 뜻으로 '가오리'(加五里)가 된 것이다. '무너미' '가오리'외에도 이 일대에는 긴 밭이 있었다는 '긴밭머리', 버덩이 있는 '버덩굴'(화계사못미처에 있음), 좋은 빨래터가 있었다는 '빨래굴'(수유 삼양동의 경계마을)등의  마을 이름들이있다.

 

골짜기로는 옛날 '부억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부억굴', 그 북쪽에 어구가 좁아서 병 아가리와 같다는 '수리병굴', 골이 넓적하다는 '넓적굴'(수리병굴 아래), 어렴바위가 있는 '어렴바윗굴'(수리병굴 밑), 각시당이 있었다는 '수돗굴'(수도폭포가 있다)과 '갓시당굴', 고비가 많이 난다는 '고빗굴',  골이 깊고 좁아 여름에도 얼음 성애가 있다는 '여름성엣굴'(고빗굴 옆), 호랑이 굴이 있다는'호랑이굴'(동장대 밑), 옛날에 큰 부자가 살았다는 '장자굴'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매골굴'(부억굴뒤 남쪽),'제겻굴'(수리병굴 북동쪽),'푸뭇굴'(고빗굴 동쪽), 뒷굴,능안굴,중소나뭇굴,몽초나뭇굴 등이 있다.

 

들 이름으로는 무너미 앞에 '쌀뜨깃들'이 유명했었는데,  벼가 잘 여물어서 벼 한말에 쌀 한말이 거의 난다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조상거리'(가오리 앞), '은모루', '안파뒤'등의 들 이름이 있었다. 바위로는 수리병굴 밑의 '어렴바위'(바위가 크고 험해 지나가기가 어렵다 해서 붙여진 이름)외에 옛날에 장사가 앉았던 엉덩이 자리와 발자국과 오줌 눈 자리가 있다는 '장사바위'가 유명하다.

 

3.정릉 부근

이 곳은 삼한시대에 '살한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한자로 취음하여 '사을한이'(沙乙閑里)로, 다시 줄여  '사아리'(沙阿里)라 하다가   태조 이성계인 신덕(神德)왕후의 능을  정동(貞洞)에서 옮겨 온 후 부터 '능말' 또는 '정릉(貞陵)이라 하였다. '능말' 외에도 이 일대에는 '문바윗골', '청수동'(淸水洞), '손가정'(孫家亭: 고려때 손씨와 왕씨를이 곳에 귀양 보냈는데, 손씨가 많이 살아 이 이름이 붙음), 배박굴(배바위골: 정릉동에서 평창동으로 넘어가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배처럼 생긴 배바위가 있다해서 이 이름이 붙음),  송계동(松溪洞: 지금의 정릉3동의 일부)등의 마을이 있었다 한다.

 

바위 이름으로는  배박굴의 배바위를 비롯해서  공기 모양의 작은 바위가 놓인  공기바위(보현봉남쪽), 바위가 선처럼 솟은 돌산인 선바위(배바위 밑),  치마처럼 생긴 치마바위,  그리고 문바위,말바위 등이 있다.

 

고개로는 무너미고개 외에 돈암동 쪽으로 넘는 '아리랑고개'를 빼 놓을 수 없는데 정릉 쪽에서는이 고개를 '정릉고개'라고 한다.  1935년경 요리업자들이 정릉의 좋은 경치를 이용해서 고급요정을 꾸미고 손님을 끌기위해 이 고개의 길을 닦고 아리랑 민요의 이름을 따 '아리랑고개'란 표목을이 고개마루에 세우고 '아리랑고개 너머에 좋은 놀이터가 있다'고  장안과 근처에 널리 선전한 후부터 이름이 굳어졌다.


글/지명연구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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