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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뫼이름들~

북한산(北漢山)의 지명 - 1편

by 마루금 2006. 6. 3.

 

 

북한산의 원이름은 "부루칸모로" 옛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불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반도의 심장, 이 땅 온누리에 쉬임없이 힘을 뿌리는 이 곳, 서울의 진산 북한산은 명실공히 이 나라의 首山이요, 中岳이라 할만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인조 때 청나라로 볼모로 끌려가며 읋은 척화신(斥和臣) 김상헌의 한맺힌 시조다. 피를 받고 뼈를 굵혀온 고국을 떠나면서 삼각산과 한강수를 불러 눈물로 작별인사를 하였다. 여기서의 삼각산은 바로 이 땅 모든 산의 일컬음이요, 한강수는 이 땅 모든 강의 부름이다 해도 좋을 것이다.

 

삼각산은 이조 오백여 년 동안 수도 한성과 함께 기복심한 근세 역사의 서울을 지켜보며 말없이  웃고 울어온 산이다. 백두산의 산 줄기가 남으로 뻗어 낭림, 태백의 등줄기를 이루다가 한반도  의 가슴, 한가한 젓줄기가 굽어도는 넓은 들을 아늑히 울타리하고자 남서로 한뫼줄기를 뻗혀 힘  차게 하늘을 향해 솟아낸 봉우리들, 그 산무리, 산줄기의 중심이 바로 북한산이다.

 

삼각산은 도봉산과 연달아 얽힌 산세이다. 돌 봉우리가 한껏 맑고 수려하여 만 줄기 불이 하늘에 오르는 것 같고, 특별하게 이상한 기운이 있어서 그림으로 나타내기 어렵다. 다만 기세를 도와주는 옆산이 없고, 또 골이 적다. 예전에는 중흥사 계곡이 있었으나, 북한산성을 쌓을 때에 모두 깎아서 평평하여졌다. 

 

성 안에 있는 백악산(白岳山:북악산)과 인왕산은 돌 형세가 사람을 두렵게하여, 살기가 없는 송악산보다 못하다. 미더운 바는 다만 남산 한 가닥이 강을 거슬러서 판국을 만든 것이다. 수구(水口)가 낮고 허하며, 앞쪽에는 관악산이 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나 너무 가깝다. 비록 화성(火星)이 앞을 받치고 있어서, 감여가(풍수학을 공부한 사람)는 매양 정남향으로 위치  를 잡는 것을 좋치 못하다 한다.

 

그러나 판국 안이 명랑하고 흙이 깨끗하여 길에 밥을 떨어뜨렸더라도 다시 주워서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까닭에 한양의 인사(人士)가 막히지 않고 명랑한 점은 많으나 웅걸한 기상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산 모양은 반드시 수려한 돌로 된 봉우리라야 산이 수려하고 물도 또한 맑다. 또 반드시 강이나 바다가 서로 모이는 곳에 터가 되어야 큰 힘이 있다. 이와 같은 곳이 나라 안에 네 곳이 있다.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 진잠의 계룡산, 문화의 구월산이다.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 산수편


 

 

1. 북한산과 그 문헌들
광주의 남한산과 함께 근대 이후의 한양성을 위요하는 한산(漢山)이요, 산악 도읍의 진산(鎭山)  인 북한산은 우리나라의 어느 산보다도 많은 문헌을 남겨 놓고 있다.

 

옛날 백제의 온조가 일어나자 그의 열 신하와 함께 한산 부아악에 올라 가히 살 수 있는 땅을 보았으니 그곳이 바로 지금의 "백운봉"이라 . . . (이성호의 遊北漢記)

 

이렇게 시작되는 북한산의 역사는 이 일대의 기름진 평야와 함께 그 후 삼국이 많은 희생들을 감수하며 빼앗고 빼앗기는 요새로서 중요시되어왔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진흥왕은 이 일대를 차지한 기쁨에 이 산의 한 봉우리에 올라 순수비까지 세워 공적을 내세우기까지 했으니 가히 이 산에 대한 옛사람들의 관심을 알 만하다. 고려시대에는 왕의 순행, 왕릉의 이봉(移奉)등이 거듭 거행되었고, 한양이 정치 중심지로 정해진 조선시대에는 이 산이 군사적으로나 풍수지리학적인 면에서 더욱 중요시됨에 따라 왕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 산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이에 따라 이조 왕실의 일기체 문헌인 조선왕조 실록에도 이 산에 관한 풍부한 자료가 있고, 중기의 숙종 때에 이르러 북한산성을 축성케되자 더 많은 자료들을 남겼다. 숙종 37년경 북한산성을 쌓을 때 석성능이 산성기사(山城紀事)를 편성/저술한 북한지(北漢誌)는 그 대표적인 문헌이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산들은 그 내력을 단편적인 전설에 의존하지만 북한산은 단순한 전설이 아닌 기록으로서 전해져 오고있다. 이것은 바로 이 산이 우리 역사와 함께 깊은 호흡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2. 북한산의 땅 이름

북한산 이라는 산 이름은 한자가 전해진 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이 산의 여러 이름들도 거의가 한자명으로 전해져 오고 있어서 그 이전의 본 이름을 찿기가 어렵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많은 이름을 간직한 이 산은 시대애 따라 다음과 같은 뫼 이름을 가졌다.

 

1) 부아악(負兒岳)

신라 때에 불린 이름은  원래 "부아" 또는 그 음운에 가까운 신라에서 나온  뫼 이름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부아"를 한자로 풀이함은 별 의미가 없다.

 

2) 북한산(北漢山)

지금에 와서 가장 대표적으로 불리는 이름이다. 백제의 온조가 고구려로부터 남하하여 한강 유역의 사람들을 모아 나라를 세우고 서울의 땅에 위례성(慰禮城)을 쌓아 도읍을 살았다가 그 후 한강을 건너 하남 위례성으로 옮겨  이 곳을 "한성"이라 불렀다는 사실이라던가, 고구려가 5세기말에  한강유역에서 백제세력을 몰아내고, 이 곳을 "북한성" "북한산주"라 한 것을 보면, 이 일대의 원래 지명이 한(漢)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이 근처를 지나는 강도 한강(漢江) 순수한 우리말로는 "한가람" "칸가라물"이란 이름  이니.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곳이 "한" 또는 "칸"이나 그 음에 가까운 어떤 옛말과 관련이 있는 땅이름을 갖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낳게 한다. 북한산이니 남한산이니 하는 뫼 이름도 "한"이란 지명을 토대로 하여 지어진 것이다.

 

3) 삼각산(三角山)

인수봉, 백운대(백운봉), 만경대(국망봉)의 세 봉우리가 높이 솟아 삼각을 이루었다 해서, 또는 세 뿔(角) 즉 세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았다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언제부터 이 이름이 붙었는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옛 서울인 송도 (松都:개성)에서 한양으로 오는 도중의 양주 땅에서 바라보면 서울을 두르고 있는 세 봉우리가 삼각으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에도 이미 이 이름으로 불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에 작성 된 경도도(京都圖: 숙종37년 이전),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問分界 之圖: 1751년, 영조27년), 경조도(京兆圖: 고종12년 고산자)등에는 모두 이 산의 세 봉우리를 특별히 크게 표시하여 "삼각산"이라는 지명을 달아 놓았다 "도성삼군문분계지도"에는 세 봉우리의 삼각산과 그 서쪽의 북한(北漢)이란 지명이 따로 붙어있는데, 이것을 보면 삼각산을 북한산의 일부로 본 듯도 싶다.

 

4) 중악(中岳)

엄밀히 말해서 고유명사라 말하기 어렵고, 또 널리 불려진 이름도 아니다. 세조 때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梁誠之)는 북한산을 중악으로, 금강산을 동악으로, 구월산을 서악으로, 지리산을 남악으로, 장백산을 북악으로 하자는 진언을 했었다.

 

5) 화산(華山)

역시 옛부터 불려 내려온 북한산의 다른 이름이다. 지금은 거의 불리지 않고 있다.

 

6) 부루칸 모로

북한산의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다. 이 뫼 이름은 오랜 옛부터 산을 신(神)처럼 숭배해 온 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온 이름이라는데, 지금은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이러한 지명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는 이도 별로 없다. 이 지명을 말 조각으로 나누어 뜻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부루(山神) 칸(으뜸) 모로(뫼:山) . . . 산신령의 산(또는 天神)
부루는 옛말로 "신명"{神明:天神)의 뜻을 가진 말이고, "칸"은 한의 유사음으로 '으뜸'이나 '으뜸 되는 이' 또는 큰(大)의 뜻을 가진 옛 우리말 이었다.
신라의 왕호 '마립간'(痲笠干)이나 '거서한'(또는 거서간:居西干)의 '간'(한)도 바로 이 뜻에 해당하며, 이것은 또 몽고의 '칸'(예; 징기스칸)과도 통하고 있다. (마립간: 마루(宗)+ 으뜸되는 사람)  '모로'(또는 모루)는 산(山)이란 뜻을 가진 옛말로서 이 말에서 파생된 현재말에 뫼(메: 山), 마루(꼭대기:宗), 머리(頭)등이 있다.

 

모로 = 모리→모아→뫼(山) / 모루→머루→마루(宗) / 모리→머리(頭)     
  
'뫼'(메)는 산(山)이란 말에 묻혀 이제는 거의 안 쓰이고 있으며,  '마루'는 산마루, 등성마루, 용마루(원래는 이엉마루)등 복합어로서만 흔히 쓰이고 있을 뿐이다. 이 땅에는 아직도 '모루'나 '마루'가 들어간 지명도 상당수 있는데(예; 검은모루, 등마루) 이것은 모두 볼록하게 솟은 지형의 정상을 뜻하는 것이다.

 

7) 귀봉

이 이름은 우이동 사람들에게서만 불려 왔다. 백운대와 인수봉이 우이동에서 보면 마치 소의 귀처럼 보인다고 해서 "귀봉"이라고 했던 것이다.  


글/ 지명연구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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