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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산길따라~

쇠이봉~목우산(영월)...................... 2017.07.23

by 마루금 2017. 7. 23.

산행날씨 : 26.1 ~ 28.1℃  비 

산행코스 : 원골재 ~ 쇠이봉(1119.2m) ~ 1018봉(대야치 갈림길) ~ 970.4봉(삼각점) ~ 목우산(1066m) ~ 목우송 ~ 솔고개 갈림길 ~ 주윗골 ~ 응고개(녹전4리)

행거리 : 8.9km  

산행시간 : 5시간 16분

산행인원 : 산악회따라 ~

쇠이봉-목우산(영월).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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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내내 비가 내렸다. 경치는 꽝이었고, 희뿌연 운무 속에 갇혀서 오지만 실컷 거닐다가 빠져나왔다. 쇠이봉에서 목우산까지 등로가 선명치 않았고, 분기봉에서 애매한 갈림길이 네 곳 정도가 있었지만 산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원골재(院谷峙) ~
대야치와 조제 사이에 원골 마을이 있었다. 대야치(큰모라치)에서 원골(院谷)로 넘어가는 고개를 원골재라 한다. 태백, 영주, 풍기, 봉화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가벼운 느릎나무로 만든 지게에다 소금이나 절인 생선을 지고 다니면서 곡식과 바꾸어 가던 선질꾼이나 행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목로주점과 같은 작은 행려원(行旅院)이 원골 마을에 있었다는 것이다.

 

들머리 ~

고갯마루에서 시설물 뒤쪽의 주능선 대신 협곡을 택했다. 시설물에서 협곡 입구까지 200여 미터의 도로를 따라 내려가서 낙석방지용 철망 사이 계류를 따라 진입했다.   

 

협곡을 500여 미터쯤 진입 ~

덤불이 자꾸 앞을 가로막아서 왼쪽 사면을 치고 올라 주능선에 붙었다. 들머리에서 쇠이봉 정상까지는 도상거리 1.2km, 도중에 암릉과 바위가 몇 군데 나타난다. 능선이 대체로 가파르고 거칠다. 

 

전망바위 직전의 코바위 ~

코바위 우측을 오르는 중 ~

구름 속의 전망바위 ~ 

전망바위의 꼬리진달래 ~

전망바위의 일행 ~

전망바위를 내려서서 능선으로 200여 미터쯤 더 진행하면 쇠이봉 정상이다. 헬기장에 삼각점이 있고, 정상목 표지가 두 개 있다. 여기서 간식타임을 가졌다.

 

쇠이봉 ~

마치 소(宇)가 누워있는 산세라 쇠이봉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영월 상동읍 내덕리와 하동면 내리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형도에는 표기가 없는 산이름이다.

 

쇠이봉을 출발하고나면 ~

목우산 도착 때까지 고만고만한 봉우리 여러 개를 오르락내리락거린다. 이 구간에서 분기봉 4군데 정도에 갈림길이 헷갈리는 곳을 만난다. 1050봉쯤 되는 대야치 분기봉에서 알바를 할 뻔 했다.    

 

계란버섯 ~

펼쳐진 계란버섯 ~

970.4봉 삼각점 ~

알바 가능 지점 ~

1050봉 분기점  -> 좌틀

1018봉 직전 갈림길  -> 우틀

970.4봉(삼각점) 아래 -> 우틀

목우산 직전 삼거리  -> 우틀

 

목우산 도착 직전에 길게 급상승해서 밧줄을 잡고 바위를 오르면 목우산 정상이다 ~

목우산(牧牛山)에 얽힌 스토리 ~
과거에 빨치산 본부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1962년에 건립된 '목우사(牧牛寺)'라는 절이 있다. 목우산은 험준한 산악 지대로서 남로당의 빨치산(Partisan)과 남침한 야산 유격대들이 1949년 강동정치학원 출신인 대대장 박갑수(영월, 가명 虎林)와 군사사상 책임자 연규백을 중심으로 목우산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들은 남로당 재건 공작과 우익 인사에 대한 살상과 식량, 금품, 의류 등의 약탈을 일삼았다. 그후 이들의 활동을 탐지한 엄정주 영월경찰서장(6代 국회의원)이 이들의 검거에 나서 남로당 상동광산책 양귀용과 250여명, 상동면당책 김장수 이하 각리책 및 세포조직 120명, 그 외에도 강원도당 군사부위원 정충조를 비롯하여 강원도 군사 세포 책임자, 주천 고급중학교 책임자, 주천면당책, 보급책, 남면당책 등 수백명을 체포하여 빨치산의 하부 조직을 뿌리뽑았다.

 

그러나 연규백은 8월 22일 서울로 압송 중 영월 소나기재에서 호송 책임자인 박인근 경사와 강병학 순경의 권총을 탈취하여 두 사람을 쏘아서 중상을 입혔다. 목우산으로 도주한 연규백은 빨치산 대원들의 사기 양양을 위해  1949년 12월 21일 저녁 8시에 직동리를 습격하여 반동분자 숙청이라는 명목으로  우익 청년단 10여명을 사살하고 마을을 불태운 채 화절치를 넘어 정선군 사북 백운산으로 갔다가 다음 해에 다시 목우산으로 숨어들었다.


1950년 2월 8일 밤 11시 30분 상동지서에서는 박운선 형사 등 경찰관 5명이 자수자인 하동면당책 임무상과 임기상, 김타룡, 고성술과 함께 목우산의 아지트를 공격하여 군사책 연규백과 유격 대대장 박갑수 외 3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4명은 생포함으로써 영월 군당 군사 위원회인 빨치산의 조직은 무너졌으나  그 후 태백산 줄기인 목우산 밑에 있는 응고개 마을의 우태봉씨 일가족은 울진, 삼척지방에 출몰한 무장 공비에 의해 학살된 일도 있었다. 그 당시 강원도 경찰학교가 영월 보덕사에 있었다.

 

목우산 정상에서 간식타임을 즐기는 일행들 ~

하산 도중에 만나는 정상 아래의 암굴 ~

밧줄울 잡고 내려설 만큼 가파른 목우산 하산길 ~ 

목우송 ~

솔고개 갈림길까지 능선이고, 골짜기로 내려서면 주윗골이다 ~

케언 ~

주윗골의 첫 민가 ~ 

녹전4리 정자에서 산행 마감 ~

응고개(鷹峴) ~ 
응현동(鷹峴洞)에서 솔고개로 질러가는 옛길로 31번 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 사람의 정수리(머리 끝 부분)같이 뾰족하고 높은 산봉우리가 이곳에 있으므로 우리말로 '수리뫼'라고 불렀다. '수리'란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킨다.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수뢰뫼'의 '수리'는 '독수리'라는 뜻으로 차음화되어 '응고개(鷹峴)'로 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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