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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정맥/백두대간~

백두대간 17구간(개터재~백학산~신의터재 ) ......... 2010.10/24

by 마루금 2010. 10. 23.

산행날씨 : 평지 기온으로 11℃ ~ 17℃, 오전에 비, 오후 흐림, 저녁은 맑음

산행코스 : 공서초교 효곡분교 ~ 개터재(360m) ~ 윗왕실고개(400m) ~ 백학산(615m) ~ 대포리 임도(370m) ~ 개머리재(290m) ~ 지기재(270m) ~ 쑥밭골 능선(320m) ~ 신의터재(280m)

산행거리 : 도상거리 17.8Km (대간거리 15.8Km / 접속거리 1.6Km)

산행시간 : 5시간19분 (휴식및 중식 40분)


백두대간 열일곱 번째 출정이다. 개터재에서 출발, 신의터재까지 연결, 평균고도가 낮아서 산행이 대체로 순조로웠다. 중화지구(옛 중모현과 화령현 지역)라 부르는 경북 상주 땅을 거치는 구간으로 사과, 포도, 감나무 등의 농산물이 재배되고 있는 산지였다.

 

 

당진상주간고속도로에서 화서IC로 빠져 25번국도와 49지방도를 이용, 공서초교 효곡분교에서 하차. 황금빛으로 노랗게 물든 논 가운데의 세멘트 농로를 따라 개터재까지 1.6Km가량을 이동했다.

 

폐교된 효곡분교 ~ 

 

효곡분교 ~
1962년 2월10일 공서초등학교 효곡분교장으로 개교하여 1969년 3월1일 성문국민학교로 승격, 1981년 3월1일 학생 수 감소로 공서초등학교 성문분교가 되었다가 1996년 3월1일 공서초등학교 성문분교로 학교 이름이 바뀌고, 1999년 9월1일 학생 수 감소로 옥산초등학교에 통폐합되어 없어졌다.

 

개터재로 가는 농로 ~

 

개터재에 도착 ~

여기서부터 대간길의 시작이다. 가을비가 내렸고, 단풍빛이 제법 수를 놓고 있었다. 
 

개터재 ~  

 

개터재에서 10분여 오르면 백두대간등산로 첫 표지판을 만나고, 표지판 있는 곳에서 9분쯤 오르면 505봉 직전의 능선갈림길을 지난다. 거기서 15분쯤에 463봉을 넘고, 10분 더 지나면 두 번째 백두대간등산로 표지판을 지나간다.

 

 

개터재 출발 후 53분여에 윗왕실고개에 도착, 비포장도로 위의 동물이동통로를 지나간다. 마침 고갯마루에 MTB 대회가 열리고 있어 주최측에서 선수를 위해 물이나 바나나 등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수고하신다고 인사를 건네고 그냥 지나칠려니 MTB 대회 도우미들께서 한사코 바나나를 제공해주어 기분좋게 얻어먹고 간다. 

 

윗왕실고개 ~

 

 

 

윗왕실고개 ~
산불예방과 화재 때 신속한 조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길이다. 상왕치(上旺峙)라고도 불렸으며, 윗왕실과 소상리 좀실로 이어지는 1995년 개설된 임도이다. 왕실은 너은마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지세에 따라 왕실(王室)이라 하였으나, 함부로 왕실(王室)이라 할 수 없다고 하여 왕실(旺室)로 고쳤다고 한다.

 

윗왕실고개 이정표 ~   

 

윗왕실고개를 떠나면 백학산까지 다소 가파른 오르막이다. 부러진 백두대간등산로 표지와 멀쩡한 표지들을 번갈아 만나면서 지난다.

 

 

 

묘1기 우측을 스치고, 잘 생긴 소나무 두 그루를 만나고,  1분쯤 다시 나타나는 묘1기 좌측을 지나간다.

 

 

447봉을 만나면 우틀하여 급경사를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백학산 정상에 도착했다. 해발 615m로서 오늘 구간 중 최고봉이다. 윗왕실고개에서 백학산까지 47분 소요, 여기서 15분 휴식을 취하고 출발, 상주시청산악회에서 세운 정상석이 있고, 쉼터의자 3개가 있다. 촉촉한 가을비가 내렸지만 백학산 정상을 지나면서 비는 서서히 그쳐갔다.

 

 

구병산과 봉황산 ~  

 

백학산(白鶴山)

효곡리와 내서면 노류리. 모서면 대포리 사이에 있는 산이다. 배골 마을에서는 백골봉이라고 하는데, 골이 깊어서 한 번 들어가면 백골이 되어 나온다는 뜻이라 한다. 소정마을에서는 장자봉이라 불렀다. 白은 '밝다’는 뜻을 가진 말이며, 백화산, 태백산, 소백산에서 보듯 땅이름을 한자로 바꿀 때 대개 백(白)을 취했다. 옛 사람들이 산을 신성시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여지며, '학(鶴)'은 봉황이나 거북, 기린처럼 상서롭게 여기던 동물이어서 풍수적(風水的). 기복적(祈福的)으로 지명에 많이 사용되었다

 

백학산 정상의 이정표 ~

 

백학산에서 11분쯤 내려서면 대포리 임도를 만난다. 임도따라 우측으로 50m쯤 내림길로 진행하다가 임도가 좌로 꺾이면 정면에 보이는 직진 능선으로 올라붙는다. 이정표가 있는 능선 시작지점에서는 두 갈레 길인데 우측 오르막으로 올라야 한다.

 

대포리 임도 ~

 

대간길은 직진 능선으로 ~

 

능선을 7분쯤 올르면 묘1기 우측을 지나고, 18분쯤 후에 지나가는 능선 분기점에서 90도 우틀이다. 7분여에 묘1기 우측을 지나고, 이후 고만고만한 봉우리의 소나무 숲길로 이어져서 산책로같은 등산으로 기분좋게 걸어간다.

 

 

임도 삼거리를 만나서 가로질러 다시 건너편 능선 숲으로 올라선다.
 

 

 

대간길 같지 않은 능선을 지나 임도를 만나고, 가로질러 다시 숲으로 올라선다. 좌측은 인삼밭이다. 잠시 후 좌측으로 묘 1기가 보이고, 백두대간등산로 표지판을 만난다.
 

 

숲을 빠져나가서 임도를 따라간다. 좌우측으로 포도밭과, 사과밭 감나무밭이 펼쳐지고, 곧 개머리재에 도착한다. 백학산에서 개머리재 2차선 포장도로까지 1시간 16분 거리다.

 

 

 

개머리재 ~

일명 소정재라 부르기도 했다. 대포저수지 상류가 되는 남쪽 끝에서 서쪽으로 난 골짜기의 소정리 원소정에서 대포리 함박골로 넘어 가는 고개다.


개 + 머리 + 재 = 개머리재. '개'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지금도 쓰이고 있는 '개'는 '물 가'를 뜻하고, '가' 또는 '가새'는 '가장자리'를 뜻한다. 여기서는 '포(浦)'의 뜻으로 본다. 머리(頭)는 평야지대에 산기슭이나 봉우리가 툭 튀어 나온 지형의 지명으로 사용된 것이다. 즉 '모롱이'의 의미를 지닌 것이이다. 《개(浦)+모롱이+골(谷)=개 모롱이 골→개머리 골》   

 

개머리재 ~ 

 

개터재 포장도로에서 10m 우측으로 이동, 건너편 포도밭 옆으로 난 임도로 진입해서 올라간다. 묘2기를 지나고, 또다시 임도를 만나 1분쯤 이동하다가 묘1기 좌측을 지나고, 계속해서 임도를 따르면 묘1기 우측을 지난다. 임도삼거리에서 직진하여 갈림길을 지나자마자 우측능선의 통나무계단으로 올라붙어 숲으로 들어간다. 이후 또 임도를 만나 100m쯤 직진, 좌측 능선으로 진입, 숲에서 15분간 중식 후 출발한다. 

 

 

 

 

 

백두대간등산로 표지가 있는 능선분기점에서 90도 좌틀, 독도에 주의해야 할 지점이다. 이후 또 백두대간등산로 표지가 나타나는 곳에서 우틀하게 되는데 밧줄이 설치된 나무계단으로 내려선다. 숲을 빠져나와  임도를 만나면 좌측은 사과밭 우측은 감나무밭, 그 다음은 배밭이 나타나며, 901번 2차선 포장도의 지기재다. 개머리재에서 지기재까지 53분 떨어진 거리다.
 

 

지기재 ~

적기재(賊起峙)라 부르기도 했다. 지기재동에서 대포리의 노산으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에 도적이 많아서 적기재 라고 불리던 것이 지기재가 되었다고 한다. 지기재의 '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하겠다. 다만 백두대간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꼭대기'란 뜻으로 지(旨)를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한편 <삼국사기>에 나오는 옛 지명과 오늘날의 지명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

 

지(支)→성(城): 궐지(闕支)→궐성(闕城)<경남 산청군 단성면>

기(己)→성(城): 열기(悅己)→열성(悅城)<충남 청양군 정산면>

즉, 끝소리로 오는 '기','지'는 모두 ‘성(城)’과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와 '지'가 '재'였다는 증거다. 신라 경덕왕 16년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바꿀 때 '재'의 뜻이 들어간 지명은 거의 모두 '성(城) 자가 들어간 이름으로 바꾸었다.

 

지기재 ~

 

 

 

지기재에서 세멘트도로를 따라 300m쯤 이동하여 콘테이너박스가 있는 곳 삼거리에서 우측 임도로 들어선다. 이후 포도밭 좌측을 지나는 임도를 따라가 삼거리에서 90도 꺾어 좌틀하면 임도 좌측은 대나무 숲이고, 정면으로 가건물 공장이 보이는데, 여기서 우측 숲길 능선으로 올라붙는다. 이내 좌측에 보이는 허름한 묘지를 지나서 다시 숲길로 들어선다.

 

 

숲을 빠져나와서 세멘트도로(금은골)를 만나면 도로따라 우측으로 이동, 좌측은 논이고, 논 건너편엔 축사가 보인다. 20m쯤 높이의 미루나무 세 그루를 지난다. 마루금은 우측 감나무밭 능선이지만 사유지라서 대간길을 도로쪽으로 돌려놓은 것 같다. 금은골의 세멘트도로에서 우측 임도 갈림길을 만나면 세멘트길과는 헤어진다. 임도에 진입하여 내리막길에서 좌측능선의 나무게단으로 올라붙는다.

 

금은골 도로 ~

 

금은골 ~

석산 북쪽, 지기재 마을 북쪽에 있다. 이 곳 지형이 거문고처럼 생겼다고 한다. 마을 뒤의 바위들은 수성암 지역에 있는데 역암이 많다. 돌의 색깔이 불에 태인 것처럼 뻘겋다. 동북쪽에 부흥사(復興寺)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뒤 산 너머에 순 암벽으로 된 나지막한 산이 있고, 이 산에 입을 반쯤 벌린 듯한 큰 굴이 있는데 이 곳에서 임진왜란 때 수 십 명이 피난을 했다고 한다. 또 이 굴 속에서 한 부부가 살았는데, 식량이 떨어져 고심을 하다가 우연히 굴속에 오목하게 파인 곳이

있어서 그 곳을 손으로 만지니 두 부부가 먹을 만큼의 식량이 나왔다. 하루는 손님이 열 명이 왔기에 또 그 곳을 만지니 10명이 먹을 만큼의 식량이 나왔는데 이 곳에는 사람 수만큼의 양식이 나오는데 부부는 욕심이 생기어 이 곳을 파 헤쳤더니 그 후로는 한 톨의 양식도 나오지 않았다 한다. 성스럽다, 거룩하다, 크다’의 뜻에서 나온 땅이름이다. ‘감, 검’으로 소리가 바뀌면서 ‘검은, 거문, 가마, 거무, 가막’ 등의 땅이름도 낳았다. 3골→검 골→거문골→검은 골→금 곡. ‘골’은 ‘골짜기’의 뜻도 있지만 ‘마을’의 뜻도 있으므로 ‘큰 마을’ 또는 ‘큰 골짜기’의 뜻이다.

 

 

 

숲길 능선에서 무덤 2기를 만난다. 무덤 1기를 또 한번 만나서 좌측을 지나간다. 김해김공묘를 지나면 밧줄이 설치된 바위슬랩길을 오른다.

 

바위 슬랩지대 ~

 

 

바깥쑥밭골 임도를 만나서 안부를 지나면 좌측은 포도밭이고, 이 임도를 따라 300m쯤 가다가 다시 숲으로 직진한다. 숲에서 10분 휴식 후 출발하는데 이후부터 관리되지 않은 허름한 묘지들이 연속으로 나타난다.
 

 

신의터재 1.5km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임도 삼거리를 만나면 임도따라 직진하고 묘 1기를 지나간다. 신의터재 1.2Km 이정표에서 90도 좌틀하여 내려가면 곧장 묘가 나타나고, 이후에도 연속으로 묘지들이 나타난다. 신의터재 0.6Km 이정표를 지나고나면 철탑이 나타나고, 잣자무 숲도 지나고, 묘 여러 기를 만나면서 신의터재에 도착한다.

 

잦나무 숲 ~

 

 

  

 

 

 

 

 

END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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