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14구간(우두령~황악산~괘방령) ............ 20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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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정맥/백두대간~

백두대간 14구간(우두령~황악산~괘방령) ............ 2010.9/12

by 마루금 2010. 9. 14.

산행날씨 : 평지 기온으로 21℃ ~ 26.℃, 오전 비, 오후 갬

산행코스 : 우두령(720m) ~ 삼성산(985.6m) ~ 여정봉(1030m) ~ 백두대간 복원지 ~ 바람재(810m) ~ 형제봉(1040m) ~ 황악산 비로봉(1111m) ~ 백운봉(770m) ~ 운수봉(680m) ~ 여시골산(620m) ~ 괘방령(310m)

산행거리 : 도상거리 12.8Km (대간거리 12.8Km / 접속거리 0Km)

산행시간 : 4시간 35분 (휴식 및 중식 30분)

산악회따라 ~


백두대간 열네 번째 출정이다. 오전엔 가벼운 비가 내렸고, 오후 들어서는 해가 났던 날씨다. 시야가 막혀서 조망은 불편했지만 가끔 선선한 바람이 불어 비교적 시원한 산행이 되었다.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의 도계를 따르는 구간으로 우두령에서 출발, 명산 '황악산'을 거쳐 괘방령까지 대간길을 이었다.

 

 

우두령(牛頭嶺) 들머리 ~

생태통로에서 충북 영동군 쪽에 들머리가 있다. 들머리 입구엔 이정표(황악산 7Km, 삼도봉 10.8Km)가 설치돼 있다. 숲 속으로 들어서면 이내 펜스를 만나고, 잠시 후 폐헬기장과 스템프 보관함이 나타난다. 

 

우두령 ~ 

 

우두령 들머리 이정표 ~

 

 

870봉(독도주의) ~

우두령에서 10분쯤 오르면 등산로 우측에 자리잡은 묘1기를 비켜간다. 묘지에서 5분쯤 더 오르면 870봉 정상이 나오고, 여기서 대간길은 좌측으로 크게 휘어져 내림길로 이어진다.


이후 이정표(우두령1200m, 바람재3600m, 황악산5800m)가 설치된 곳에 도착하면 긴 의자 2개가 놓여있다.

여기서 짧은 휴식 후 출발 ~

 

 

 

삼성산(三聖山: 985.6m) ~  

기복이 약한 능선을 오르락 내리락 하여 봉우리 서너 개를 넘어가면 삼성산 정상에 도착한다. 긴 의자 4개와 이정표가 설치돼 있고, 정상석은 없다. 다만 이정표 상단에 매직으로 삼성산이라 적어 정상을 표시하고 있을 뿐이다. 우두령에서 삼성산까지 40분 걸렸다.

 

삼성산 정상 ~ 

 

삼성산 유래 ~

성스러움을 뜻하는 산 이름이다. 산경표에 '삼성산(三聖山)이라 기록되었고, 주변에 이를 뒷받침 할만한 지명들이 있다. 김천시 대항면 주례리(周禮里)에 '주공'이란 마을이 있다. 1790년 곡부공씨가 이 마을을 개척했는데 공자가 살던 주나라 주(周)와 자신의 성 공(孔)자를 따서 주공(孔周)이라 불렀다. 공자는 중국의 삼성(三聖) 중 한 명으로 꼽는 인물이다.

 

삼성산 남쪽의 대성리(大聖里)도 같은 지명이다. 1750년 이씨, 박씨, 김씨, 세 선비가 조용하고 살기 좋은 마을을 찿아 개척했다. 이 마을에 평소 자신들이 존경하고 있던 중국의 성인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자동(孔子洞)'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에 '대성리'란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삼성산 북쪽 기슭에 삼성암(三聖庵)이 자리잡고 있다. 직지사 말사로서 이 암자 현판에 천덕산 삼성암(千德山三聖庵)이라 적혀있다. 삼성암 약광전의 석불좌상은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며, 금오산 '약사암 중수기'에는 이 석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설에 지리산에 세 분의 석불이 있었는데 삼형제 부처라 불렀다. 하나는 금오산 약사암에, 또 하나는 직지사 삼성암에, 다른 하나는 이곳(지리산)에 모셨다"

 

 

 

여정봉(旅程峰: 1030m)(독도주의) ~ 

삼성산을 떠나서 그 다음 능선으로 넘어가는데 아랫쪽 골짜기의 삼성암(三聖庵)에서 불경 읊는 소리가 구름을 타고 들려온다.  봉우리 몇 개를 오르내리다 갑자기 앞이 훤히 트인 전망대를 만나지만 운무가 짙게 깔려 아무런 조망도 없다. 여정봉은 특징 없는 봉우리다. 정상을 알리는 작은 팻말과 선답자의 리본만 매달렸을뿐이다. 여정봉 정상에서 우측으로 90도 꺾이는 내리막으로 대간길이 이어진다. 우두령에서 1시간15분 거리 ~

 

  

 

백두대간 복원지 ~ 

여정봉을 떠나서 내려서면 긴 의자와 이정표, 알림 표지가 설치된 지점이 나온다. 여기서 좌측 사면으로 내려서면 목장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백두대간의 복원지를 지나가게 된다. 과거 폐초소 등의 군사시설로 망가져 있던 백두대간을 최근 다시 원상으로 복원해서 본래의 모습으로 고친 것이다.

  

 

백두대간 복원지 ~

 

  

임도 ~ 

백두대간 복원지를 떠나서 아래로 내려서면 곧바로 임도가 나타난다. 이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 좌측편으로 봉우리 하나를 만나는데 올라섰다가 다시 임도로 내려서게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좌측 봉우리의 능선을 거치지 않고 그냥 임도만을 따라 내려갔다.

 

임도 ~ 

 

바람재로 내려서는 길 ~

임도의 좌측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서 임도가 우측으로 크게 휘어지는데, 이 지점에서 좌측 숲으로 내려선다. 통나무 계단의 급경사를 내려서면 억새밭이 낭만적으로 펼쳐지고, 이어서 산불방지 안내방송 멘트가 나오는 확성기를 지나면 바람재에 도착한다.

 

바람재 가는 길의 억새밭 ~ 

 

  

산불방지 안내방송 확성기 ~ 

 

바람재(810m) ~

바람재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헬기장이 있으며, 헬기장 건너 숲 속에는 이정표와 긴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바람재라그런지 시원한 바람이 계속 불어 산행으로 한껏 달아오른 열기를 식혀주었다. 바람재 우측으로 목장이 보일 것인데 짙게 깔린 운무가 시야를 가렸다. 우두령에서 바람재까지 1시간35분 걸렸다. 

 

 

 

바람재 헬기장 ~ 

 

바람재 쉼터 ~ 

 

신선봉 갈림길(독도주의) ~

바람재에서 간단하게 중식을 마치고 출발, 긴 의자가 설치된 곳을 지나서 급경사의 통나무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나면 신선봉 갈림길인 능선 삼거리에 도착한다. 이정표와 긴 의자 2개가 있고, 119구조요청 황악산 10번 지점을 표시한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바람재에서 3분 거리다. 대간길은 좌측으로 90도 꺾이는 황악산 정상 방향이다. 

  

신성봉 갈림길 ~

 

형제봉(兄弟峰: 1040m) ~

신성봉 갈림길을 떠나서 능선을 따라 몇 번 오르내리면 이정표뿐인 형제봉(1040m) 정상에 도착한다. 황악산 직전의 봉우리로서 비로봉과 함께 형제처럼 나란히 솟아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전히 짙은 안개로 조망이 전혀 없다. 신성봉 갈림길에서 형제봉까지 10분 거리다.

 

형제봉 ~

 

 

황악산(黃岳山: 1111m) ~

'패쇄통로(상수원보호구역)' 표시판을 스쳐지나고, 119구조요청 황악산 8번지점(내원계곡 갈림길)을 지나 능선을 오르면 황악산 정상인 비로봉이다. 2개의 정상석과 돌무더기, 삼각점(영동23 1981재설), 백두대간 해설판, 스템프 보관함 등이 있다. 우두령에서 황악산까지 2시간 30분 걸렸다.

 

 

  

 

황악산(1111m) 유래

예전 학이 많이 찿아와 황학산(黃鶴山)이라 불렀다 한다. 직지사 현판과 택리지(擇里志)에는 황악산(黃岳山)으로 표기되었고, 산경표에도 '황악산(黃岳山)이라 기록되어 있다. 주봉인 비로봉(毘盧峰.1111m)을 중심으로 형제봉, 신선봉, 백운봉, 운수봉 등 다섯 봉우리가 말발굽 모양으로 직지사(直指寺)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피라밋 모양의 육산으로 직지사 부근을 제외하고는 소나무가 드물다는 임상적 특징이 있으며 단풍과 설화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황악산이라면 명찰인 '직지사'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관련 홈페이지에서 이 사찰에 대한 정보를 취할 수 있다.
직지사: http://www.jikjisa.or.kr/

 

 

백운봉(白雲峰: 770m) ~

비로봉 정상을 떠나면 헬기장이 나타나고, 이곳 이정표에서 직지사 방향으로 내려선다. 작은 돌무더기 봉우리를 지나고, 전망대를 지나고, 통나무 계단을 내려서다가 119구조요청 황악산 6번 지점, 5번 지점, 4번 지점을 차례로 지나면 백운봉이다. 백운봉 정상엔 아무 것도 없다. 계속되는 내림길 때문에 백운봉이 어딘지를 감지하지 못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황악산 정상에서 백운봉까지 36분 거리다. 

 

백운봉 유래

백운마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진다. 140여년 전 황악산 중턱에 마을이 생겼는데 항시 구름이 덮혀 있어 '백운'이라 불렀다. 또한 박달나무로 가구를 만들어 팔아 생활을 해왔다고 하여 이 마을을 '박수점'이라 부르기도 했다. 산 중턱에는 직지사 말사인 백련암(白蓮庵)과 운수암이 자리잡고 있다.

 

 

운수암 갈림길(독도주의) ~

119구조요청 황악산 2번 지점이며, 긴 의자와 이정표가 설치돼 있다. 황악산 정상에서 운수암 갈림길까지 고도차가 530m나 된다. 직지사 방향으로 지루하게 내려서지만 운수암 갈림길부터는 직지사 방향과 이별이다. 대간길은 이정표(황악산/ 직지사/ 여시골산)에서 여시골산 방향인 직진으로 이어진다. 황악산 정상에서 운수암 갈림길까지 46분 걸렸다.

 

운수암 갈림길 ~

 

운수암 갈림길 이정표 ~

 

운수봉((雲水峰; 680m) ~ 

급경사 오르막 능선을 올라서 확성기가 설치된 곳을 지나면 운수봉(670m) 정상이다. 아담한 정상석과 이정표가 있고, 119구조요청 황악산 3번 지점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는데 아무래도 2번과 3번 지점의 표지가 뒤바뀐 것 같다. 

 

 

운수봉 유래

운수동(雲水洞) 명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천덕산(千德山)이란 다른 이름도 있다. 200여년 전부터 직지사를 찾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근처 골짜기에 정착해서 마을을 형성해 터목이라 불렀다. 한자로는 대항(垈項)이라고 표기했다. 면사무소가 이곳에 생겨 면(面) 중심지로 본리(本里)라 불렀으나 1914년 일제 때 본리와 돌모리, 백운동(박수점)을 통합해서 '운수동'으로 개명했다. 운수(雲水)는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 언제나 구름이 머물고 골짜기에 물이 흐르는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본디 이름인 터목이야 말로 삶의 터전이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운수봉 이정표 ~

 

 

 여시(여우)굴 ~ 

 

 

여시골산(620m) ~ 

얕게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여러 번 오르내리면서 여시굴을 만나고, 곧 여시골산 정상에 도착한다. 아담한 정상석과 이정표가 설치돼 있고, 내용 없는 삼각점이 있다. 여기서부터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왔다.

 

 

여시골산 유래 ~

운수봉과 괘방령 사이의 대간 능선에 얹힌 봉우리다. 어떤 지도는 대간 오른편으로 가지쳐 나간 385.4봉을 여시골산으로 표기한 것도 있다. 지명 상으로 혼돈이 생기겠지만 어쨌든 대간 상에 걸친 봉우리에서 정상석을 만났으니 이곳을 여시골산으로 취급한다. '여우'를 경상도 사투리로 '여시' 또는 '야시'라 부른다. 이 산에 여우가 살았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대간길 능선에서 여우굴 같은 동굴을 만난다.

 

여시골산 이정표 ~  

 

여시골산 하산로 ~

여시골산 정상을 떠나서 600봉을 거치면 급경사 길로 이어진다. 엄청나게 가파른 사면이지만 김천시에서 최근에 통나무 계단을 설치하여 내려서기 편하도록 등산로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급경사를 완전히 내려서면 '수원함양보안림'이라 적힌 기둥이 보이고, 숲을 빠져나와 임도에 도착한다. 임도에서 전방으로는 다음 구간 때 올라야 할 가성산(716m)이 높게 올려다 보인다.

  

여시골산 하산로 ~ 

 

수원함양보안림 ~ 

 

임도(독도주의) ~

임도를 따라 100m쯤 내려가면 목장이 보이는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여기서 우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대간길 능선은 비닐하우스 우측 내리막으로 이어지다가 묵밭 우측을 따라 내려가 다시 완만하게 올라서 얕은 봉우리의 숲으로 이어진다. 숲 속을 지나면서 블록으로 만든 원형 참호를 몇 개 만나고, 능선을 내려서면 괘방령이다.

 

임도와 정면의 가성산 ~ 

 

괘방령(310m) ~ 

고개턱에 괘방령비, 백두대간 안내판, 돌탑, 괘방령 안내문, 괘방산장 등이 있다.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과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을 잇는 906번 지방도로가 백두대간 주능선을 가로지른다.

 

괘방령 유래

산경표에 '계방산(桂榜山)으로 표기됐고, 금산(지금의 김천) 서쪽 10리에 있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卦方嶺'(괘방령), 현 고개턱의 안내문에는 '掛榜嶺'(괘방령)이라 표기하였다. 지금은 이 고개가 한가로운 길로 변했지만 과거엔 꽤나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관로(官路)인 추풍령과 달리 상로(商路)로 쓰였는데 과거길의 선비들이 대분분 추풍령을 기피했다고 한다. 추풍낙엽(秋風落葉)으로 낙제를 연상시키는 추풍령보다는 급제자 합격의 방을 걸어두는 ‘괘방(掛榜)이라는 것에 더 집착했으리라 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후대로 내려와서 고개 이름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사실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황악산 전경 ~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 구름과 흘러 갔으며...

 

구월의 이틀 중에서

류시화

 

 

  

여시골산 전경 ~ 

 

END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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