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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산사람들~

예지 쿠쿠츠카

by 마루금 2010. 2. 9.

예지 쿠쿠츠카 그는 누구인가 ~


라이홀트 메스너에 이어 세계 2번째로 8,000m 거봉 14좌를 모두 오른 사람이다. 폴란드 출신의 세계적 클라이머였던 그는 1989년 10월24일 로체 남벽 등반중 추락,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10년 전 처음 그가 올랐던 8,000m봉이어서 당시 세계 산악계에 큰 충격을 던져준 사건이다.

 

 

 

 

 

쿠쿠츠카(Kukuczka)는 1989년 10월23일 파트너인 폴로보스키(Pawlowsky)와 함께 로체 남벽 8,300m 지점에서 비박을 했다. 다음날 그들은 새벽 3시 30분에 정상공격을 시작해서 정상으로 이어지기 직전의 8,350m 지점에 도착했으나, 쿠쿠츠가가 슬립하는 순간 자일이 튕겨 끊어지면서 140m를 추락, 사망했다.

 

10월25일자 카트만두 신문(The Rising Nepal)에 실린 쿠쿠츠카(당시 41세)의 사망 기사는 전 산악인을 경악케 했다. 더군다나 그가 정확히 10년 전인 1979년 10월에 처음으로 오른 8,000m봉인 그 로체봉에서, 그리고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던 도전과 등정의 연속에서 실패=죽음이란 결과를 안게 되었으니 그 슬픔은 참으로 컸다.

 

예지 유랙(예지의 애칭) 쿠쿠츠카 ...

그는 87년 시샤팡마를 끝으로 메스너에 이어 사상 두 번째로 14개 거봉의 왕관을 모두 썼지만, 그 왕관을 쓰기까지의 기간이 메스너의 17년에 비하면 거의 반밖에 걸리지 않은 셈이다. 그 9년이란 기간은 메스너와의 비교를 떠나서 그가 그동안 얼마나 열정적으로 히말라야 등반을 거듭했는가를 말해준다.

 

게다가 그 14개 거봉중 1980년 에베레스트, 1981년 마칼루, 1983년 가셔브룸2봉, 가셔브룸1봉, 1984년 브로드 피크, 1985년 초 오유, 낭가파르밧, 1986년 K2, 1986년 마나슬루, 1987년 시샤팡마 등 10개 봉은 새로운 루트로 등정했고, 1985년 다울라기리1봉, 초 오유, 1986년 칸첸중가, 1987년 안나푸르나1봉 등 4개 봉은 동계 등정했다.

 

8000m급봉 14개 완등이라는 테마는 클라이머들의 야심을 복돋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따라서 폴란드 산악계에서는 쿠쿠츠카를 8,000m급 '에이스'로 주목했고, 브로드 피크와 가셔브룸을 함께 등반했던 구르티카(V. Kurtyka)가 산의 높낮이와 관계없이 '좋은 등반'을 목표로 그와 결별한 일이 쿠쿠츠카 자신에게 '빅 헌터(Big Hunter)'의 꿈을 일으키게 한 것으로 해석된다.

 

1948년 폴란드 남부의 공업도시인 가드비체에서 태어난 쿠쿠츠카는 스키를 즐기던 부친의 영향으로 산과 눈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탄광기사양성소 시험에서 떨어진 후 야간철도학교에서 오후에 공부하며, 오전에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이 14세, 신체단련을 위해 형의 권유로 역도도 해보았지만 역도가 주는 신체적 만족이 커져갈 수록 정신적 갈구가 심해지는 어린 예지에게 소년 타트라 산악클럽이 다가왔다.

 

그의 모든 삶의 전환점이 된 이 때가 1965년으로, 예지의 나이 17세 되던 해였다. 그는 이 당시에 록 클라이밍을 시작하여 산에 입문하게 되었고, 누구나 그러하듯이 클라이밍의 즐거움에 흠뻑 취했다. 그후로 그의 마음은 더 높은 산으로 향해, 알프스와 알래스카, 힌두쿠시, 그리고 히말라야로의 꿈을 실현시켜 갔다.

 

그러나 조용하고 수줍음을 잘 타는 쿠쿠츠카의 내면의 세계에는 불타는 야망과 강인한 의지가 숨쉬고 있어, 답습하는 등산으로만은  만족할 수가 없었다. 솔로등반만으로도 충분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새로운 감격과 극한의 체험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미 그 때부터 세계 최고의 산을 완전히 새 루트로 오르거나, 혹한의 동계등반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쿠쿠츠카에게는 같은 고향 출신의 아내 첼리나와 두 아들인 마체이(당시 10세), 비이테크(5세)가 있었다. 강연과 등반으로 바쁘던 그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같은 중요한 휴일 전후에는 가족과 지낼 수 있도록 여행계획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던 자상한 가장이었다. 그의 아파트가 있는 가드비체에서 수십키로미터 떨어진 이스테브나의 통나무집은 저명인사가 된 쿠쿠츠카와 그 가족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사실 쿠쿠츠카는 폴란드 스포츠맨 인기 투표에서 1위를 달렸고, 1988년의 캘거리 동계 올림픽 대회에서는 메스너와 함께 올림픽 명예 은메달을 수상할 정도의 유명인이 되었다. 그가 집에 있는 동안은 잡지기사, 카메라맨, 사인을 받으러 오는 소년, 소녀들로 늘 북적거렸다. 그러한 쿠쿠츠카에게나 폴란드 산악인들에게 있어 가정생활과 산생활의 양립은 특수한 난관에 직면하고 있었다.


폴란드인의 원정이 1930년대에 알프스로, 1939년에는 난다데비 동봉에 첫 진출을 했지만 2차대전이 끝난 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노예가 된 그들의 경제, 정치는 모든 자유를 속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쿠쿠츠카와 같은 폴란드 산악인들은 1950년대 영국이 했던 것처럼 히말라야를 리드해 가고 있었다. 하루 환전량이 16달러를 초과할 수 없던 그들이 단일팀을 구성하는 것은 대단한 시간과 비용이 드는 일로서, 그들의 강인함과 철저함에 거듭 놀라게 되는 일이다. 쿠쿠츠카와 몇몇 폴란드 산악인들은 국제팀의 구성으로 그 탈출구를 찿았고, 이후 많은 동구권 산악인들의 하나의 패턴이 되었다.

 

쿠쿠츠카의 등산관을 나타내기도 하는 그의 다음과 같은 이 말이 이를 증명한다. "나는 K2 국제팀에 참가하게 된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외국 대원들은 K2 노말루트에서 조차 스포츠 정신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는 것 같다. 결국 나는 피오트로브스키와 함께 남벽을 오르기로 했다" 쿠쿠츠카는 자신도 많은 국제팀을 구성하여 등반활동을 펼쳐 왔고, 그것을 원했지만 대부분 마지막 등반은 폴란드 산악인들과 연결 되었다.


확실히 그들은 남다른 시도를 하려고 늘 노력 하는 듯했다. 쿠쿠츠카의 가장 성공적인 국제대는 폴란드, 맥시코, 프랑스, 영국, 에쿠아도르, 미국 등으로 이루어진 총 13명의 시샤팡마이다. 그들은 총 9명이 등정에 성공했고, 그후로 함께 등반에 참여하여 교류를 갖기도 했다. 국제대의 잇점을 최대로 활용한 것이다.

 

폴란드 산악인들은 대부분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알피넥스(Alpinex)'라는 회사에서 공장이나 굴뚝의 페인트공으로, 유리닦이 등으로 일하여 비교적 고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더구나 제 직업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 전기기사, 화학기사, 엔지니어 등~도 함께 알피넥스에 가입하여 그 이익금을 대부분 클럽으로 환원했다. 그 자금은 저축되어 원정을 위해 재분되기도 하고, 하나의 이슈가 되는 원정을 위해 많은 자금이 쓰이기도 했다. 아마 이런 이유에서 폴란드 산악인들의 뛰어난 등반이 자극 되는듯 했다.

 

쿠쿠츠카 자신도 한동안 알피넥스에서 탄광전기기사로 일하며, 자신의 원정자금을 모으고 있었지만, 메스너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고, 당시 이탈리아의 '바일로(Bailo)', '캠프(Camp)', '스카르파(Scarpa)' 등의 업체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쿠쿠츠카는 메스너보다 늦게 히말라야에 진출하게 되었다. 폴란드의 암울한 시대가 쿠쿠츠카의 꿈을 9년만에 이루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 14개 거봉 레이스란 폴란드 산악계의 영향과 메스콤의 자극이 컸겠지만, 메스너에게는 1983년에 14개 거봉 완등의 야심을 표명하고, 그리고 무서운 속도와 등반력으로 다가오는 쿠쿠츠카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 더 가속화된 것이다.

 

그러나 쿠쿠츠카에게 그것은 이미 레이스가 아니었다. 8,000m의 스타트가 늦은 그때부터 이미 메스너보다는 빠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메스컴에서 그와 메스너와의 비교를 부채질해도 그는 언제나  "메스너는 메스너, 나는 나"로 일관해버렸다. 그러나 시샤팡마를 끝낸 뒤 그 대원들의 대부분이 로체 남벽으로 향했을 때 쿠쿠츠카는 집으로 돌아왔고,  K2계 등반대에도 끼지 않았다. 그러했던 그가 1988년 안나푸르나1봉 남벽의 동쪽 끝 버트레스를 통해 동봉을 오른 뒤, 1989년 10월에 메스너가 거듭 실패한 로체 남벽만을 고집한 이유는 무었인가? 

                        
여기서 프로로서 활약하는 두 사람만의 어떤 새로운 레이스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문도 가져보게 된다.

가정에서는 범용한 한 가장으로서, 폴란드에서는 국가적 영웅으로서,  히말라야에서는 최고중의 최고였던 쿠쿠츠카는 스스로 자신을 다른 평범한 클라이머들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천재는 스스로를 조절하며 계속해온 트레이닝과,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을 사랑했던 것에 기인한다. 굵고 짧은 화려한 등반들~  그는 진정 히말라야의 큰 산악인이었다.

 

등반일 이름 높이(m) 루트 산소 비고
1979.10.04 로체 8,516 서면 무산소 노멀루트
1980.05.09 에베레스트 8,848 사우스필라 유산소 루트초등 최종구간 무산소
1980.05.09 마칼루 8,463 북서릉 무산소 솔로, 알파인스타일 루트초등
1982.07.30 브로드 피크 8,047 서면 무산소 노멀루트 K2에서 순화
1983.07.01 가셔브롬 2 8,035 동릉종주 무산소 루트초등 알파인스타일
1984.07.14 브로드 피크 8,047 북릉종주 무산소 루트초등 알파인스타일
1985.01.21 다울라기리 1 8,167 노멀 무산소 동계 제2등
1985.02.15 초 오유 8,201 남동릉 무산소 루트초등, 동계초등
1985.07.13 낭가파르밧 8,125 남동릉 무산소 루트초등, 6개월간 3개봉 등정
1986.01.11 칸첸중가 8,586 노멀 무산소 동계초등
1986.07.08 K2 8,611 남벽 무산소 루트초등 세미알파인스타일
1987.02.03 안나푸르나 1 8,091 노멀 무산소 동계초등
1987.09.18 시샤팡마 8,013 서릉종주 무산소 루트초등 알파인스타일
1988.10.13 안나푸르나 1 8,091 남벽동릉 무산소 남벽동단 버트레스에서 동릉으로 동봉 등정
1989.10.24 로체 8,516 남벽 무산소 남벽루트 초등 시도중 8,350m에서 추락사

 

END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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