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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산사람들~

토왕폭의 조난사건(1985년 2월21일)

by 마루금 2010. 2. 17.

아래 글은 '월간 山' 1985년 4월호에 게재된 내용이다. 1985년 명절인 구정 뒷날 발생한 조난사건으로 당시 온 매스콤을 떠들석하게 했다. 마루금과 한 때 등반을 같이 했던 후배 한 명이 그 사고현장에 있어서, 그래서 내겐 더 기억에 남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사고 현장에서 야영했던 후배는 부산 솔뫼산악회 소속의 '표상길'이다. 1982년 가산디지탈단지의 금성사(현 LG)에 근무할 당시 직장동료로 처음 그와 만났다. 이후 83년까지 2년간 그 후배와 함께 서울 근교 암벽을 두루 찿아 다니며, 등반으로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그와의 등반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있다. 1983년 4월3일 인수봉 대조난사건이 있었던 날, 그를 포함해서 4명이 인수봉을 올랐다. 그날 급작스런 폭설로 우리 일행도 사고를 당할뻔 했지만 두 피치만 올랐다가 곧바로 하강해서 화를 면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83년 말쯤 그 후배는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부산으로 하향했다. 그 뒤 부산 솔뫼산악회에 가입해서 등반대장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85년  구정연휴 때 토왕폭 사고에서 운좋게 화를 면해 살아 남은 그 후배가 . . .  늘 이맘 때면 떠올려진다. 

 

 

 

 

토왕폭의 사나이들 토왕폭에 묻히다.

이태식. 김상덕. 장영배씨 조난 현장 . . .


2월21일 새벽 설악산 토왕폭 입구 계곡에서 야영하던 마산 무악산악회 소속 이태식(32), 김상덕(25), 장영배(20) 등 3명이  계곡 위에서 쏟아져 내린 눈 속에 묻혀 사망했다. 함께 야영했던 박래경씨는 부근서 야영 중이던 부산 솔뫼팀에 의해 구조되었다. 조난상황 및 구조경위를 추적했다. 
 
부산 솔뫼산악회의 토왕폭등반대 3명은 2월18일 밤 부산을 출발했다. 강대석 대장(36), 김용명 대원(29), 표상길 대원(27)은 다음날 오전 8시 15분 강릉에 닿았다. 강릉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이 겨울비는 속초까지 따라왔다. 대동강물도 녹는다는 '우수'였기에 세 사람은 버스 속에서 토왕폭이 녹아버렸지나 않았을까 조바심했다.

 

2월19일 설악동으로 접어들자 비는 눈으로 변했다. 지난번 설악산 훈련 때 맡겨두었던 짐을 비선대 휴게소에서 찾아 11시 무렵 토왕골로 향했다. 질펀하던 눈길이 토왕골로 접어들자 신발 밑에서 뽀드득 소리를 냈다. 폭포를 넘어서면서 눈은 발목을 덮었다. 토왕폭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베이스 캠프 자리에는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솔뫼등반대는 토왕폭 하단 아래까지 올라가지 않고, 토왕폭 얼음 사면이 시작되기 전 두 계곡이 마주치는 펀펀한 삼각지점을 이루는 곳을 베이스로 잡았다. 토왕골이 왼쪽으로 급히 꺾여지면서 협곡을 이루는 입구 바로 전 위치다.

 

2월 20일 강대장은 새벽 3시에 잠을 깼다. 설악산의 설날은 요란했다. 바람 탓이었다. 5시까지도 바람의 광기는 여전했다. 밖에 나가 기온을 확인했다. 영하7도, 강풍과 추위로 강대장은 출발을 연기했다. 10시 반에야 장비를 챙겨 하단으로 갔다. 어제와는 상황이 또 달랐다. 밤새 불어댄 바람이 계곡으로 눈을 모두 쓸어 모은 것 같았다. 하단까지 한 시간이나 걸렸다. 빙사면 위의 눈은 모두 날아가고 맨 얼음이 드러나 있었다.

 

11시 30분 김대원과 표대원이 하단 등반을 시작했다. 두 공격 대원은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눈이 얼어붙어 엉망인 얼음 상태로 전진속도가 느렸다. 강대장이 두 대원의 느린 전진을 고개 아프게 쳐다보고 있을즈음 낯선 두 산사람이 올라왔다. 서울 청보루산악회원이라고 밝힌 두 사람은 마산 무학산악회의 토왕폭 등반을 격려코자 왔다고 했다. 무학의 박래경씨가 서울에 있을 때 회원으로 활약하 바 있는 '청보루'였다. 두 청보루 회원은 1시간 가량 머물다가 내려갔다. '무학팀을 만나면 다녀갔다고 전해 달라' 하고는.

 

등반을 시작한 지 8시간 지난 오후 7시40분에 하단을 끝낸 대원이 돌아왔다. 베이스 캠프의 온도계 눈금은 영하 13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텐트 안은 강풍이 몰고온 눈이 들어가 엉망이었다.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나왔다. 설악산 일대의 21일은 더 심한 바람과 영하 15도의 강추위를 예고하고 있었다.

 

떡국을 끓여 두 대원에게 먹이고, 자리를 편 것은 밤 11시경, 바람소리에 인기척이 섞여 왔다. 강대장이 텐트 밖으로 겨우 목만 내밀고, 인사를 했다. 심한 바람에 눈들이 나방처럼 흩날려 텐트 문을 더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밤 늦게 올라온 그 사람들은 마산 무학산악회의 토왕폭등반대였다. 강대장은 낮에 만났던 청보루산악회원의 안부를 전하고는 곧 천막 문을 닫았다.

 

11시30분 강대장은 소변이 마려워 바깥으로 나갔다. 무학팀은 그때까지 천막을 치지 않고 있었다. 다시 텐트로 들어와 잠자리에 든 자정까지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솔뫼팀은 무학팀이 강릉으로 막영을 포기하고, 하산한 것으로 판단했다.

 

2월21일 상오 1시 30분. 강대장은 텐트를 찢을 듯한 바람소리에 잠을 깼다. 김대원 옆에 한 사람쯤 누울 수 있는 자리가 바람이 몰고온 눈으로 짓눌려 있었다. 세 사람은 일어나서 눈을 밀쳤다. 혹 텐트가 묻히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불안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뜬 눈으로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7시 날이 밝았다. 표대원은 목만 내밀고 온도계를 보았다. 영하17도. 강대장은 아침을 먹기 전에 철수키로 결심했다. 바깥으로 나가보니 텐트 덮개가 찢어져 반은 눈속에 묻혀 있었다. 묻힌 장비를 파내어 텐트 안으로 들여 놓았다. 텐트 속에서 신발과 복장을 갖추고, 배낭을 꾸렸다. 바람이 너무 심한데다 워낙 추웠던 탓이다.

 

전날 고정자일 끝에 매단 아이스햄머를 찾아 오겠다며, 표대원이 하단 아래로 7시 반에 떠났다. 텐트 속에서 꾸부리고, 배낭을 꾸리다가 김대원과 강대장은 두 번이나 몰아친 바람으로 넘어졌다. 빨리 하산하고 싶은 마음에 표대원이 돌아 오기를 기다리며, 귀를 곤두 세웠다. 어디서 사람 소리가 났다. 신경을 귀에 집중 시켰다. 소리는 계속 났다.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였다. 두 사람은 표대원이 조난 당했다는 직감으로 튀어 나갔다. 또 한번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똑똑하게 들렸다. "사람 살려!"

 

그 외마디에 눈 앞이 캄캄해진 두 사람은 소리나는 토왕폭 계곡쪽으로 뛰었다. 하지만 흘러 내리는 눈으로 빨리 갈 수가 없었다.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뒤에서 소리가 났다. 뒤돌아 반대 계곡으로 뛰어 갔으나 아무도 볼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소리가 또 뒤에서 났다. 두 사람은 뭣에 홀린듯 우왕좌왕 했다. "상길아!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자일 든 아저씨! 여기 여기 땅 밑 . . .  "

 

어이 없게도 그들이 서 있는 바로 뒤편 눈 속에서 그런 절규가 나왔다. 김대원은 곧 직경 15cm 가량의 구멍을 찾아냈다. 그 속에 사람이 있었다. 무학팀 이었다. "몇 명이냐?" 강대장이 물었다. "네 명이다." 조난자가 답했다. 피켈과 코펠로 정신없이 50cm 가까이 눈을 파낸 후 김대원은 구멍 속으로 손을 넣었으나 조난자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안되겠어요. 형은 신고부터 하세요. 혼자 팔테니."

 

김대원의 말에 강대장은 눈길을 뛰어 내려갔다. 비룡폭 입구 통제소는 잠겨 있었다. 육담폭포 매점을 두드렸다. 황급히 나오는 주인에게 조난을 알렸다. 삽을 들고 나온 주인 아저씨를 바로 사고지점까지 올려 보냈다. 계속 달려온 강대장은 비룡교 부근의 매점까지 가서야 전화로 경찰에 조난신고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사고지점으로 향했다.

 

표대원은 강풍에 날려 두어 번이나 넘어지며, 아이스햄머를 찾아 베이스 캠프로 내려왔다. 김대원 혼자 정신없이 눈을 파고 있는 것을 보고 표대원도 다짜고짜 눈부터 팠다. 한참 파다가 강대장이 안보이는 것을 깨달은 표대원이 물었다. "누가 파묻혔어요?" 위로부터 바람이 몰고 온 분설이 그때까지도 모래주머니 터진 것 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그 눈에 덮일 위험을 경계하며, 계속 파냈다. 텐트가 드러났다. 피켈로 텐트를 찢었다.

 

두 사람이 잡아 당기자 침낭은 쉽게 빠져나왔다. 눈을 털고 침낭을 열어보았다. 제일 위쪽에 누웠던 그 사람의 의식은 분명했다. 급히 솔뫼팀의 텐트로 생존자를 옮겨놓고, 계속 파냈다. 바람은 얼굴을 때려 눈을 잘 뜰 수가 없을 지경으로 분설을 날렸다. 다시 반듯하게 놓여있는 침낭 하나가 나왔다. 그러나 그 속의 조난자는 질식하여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다음 침낭도, 그 다음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래쪽에 반듯하게 누웠던 세 사람에게는 이미 때가 늦었던 것이다. 육담폭포 산장 주인이 삽을 들고 왔을 때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세 사람은 생존자를 침낭에 싸서 묶고 끌어내렸다.

 

마침 토왕폭 하단을 단독등반 하러 왔다는 서울 에델바이스 산악회원 한 명이 올라왔다. 그 사람까지 합세하여 네 사람은 생존자를 비룡폭포 통제소로 내렸다. 통제소까지 왔을 때 강대장을 비롯, 경찰구조대원, 공원관리사무소 직원, 민간구조대원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생존자는 곧 원기를 회복했다. 회복된 생존자는 경찰관에게 조난경위와 신원을 진술했다. '박래경, 무학산악회 소속, 25 세. . . '  박씨가 신원진술 하는 것을 지켜보던 에델바이스 회원은 깜짝 놀랐다. 박씨는 79년10월3일 인수봉에서 단독등반을 하다가 90m를 추락하여 사경을 헤맨적이 있었는데, 소위 오아시스라고 불리는 곳의 마지막 나무에 걸려 있던 박씨를 그 에델바이스 회원이 구해준적이 있기 때문이다.

 

박래경씨는 속초의료원으로 옮겨져 치료받고, 그날 오후 마산으로 떠났다. 숨진 이태식, 김상덕, 장영배씨 세 사람의 유해는 속초도립병원 영안실에 안치 됐다. 솔뫼팀의 강대장 일행은 22일 아침 속초도립병원을 찾아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태식씨를 대장으로 한 박래경, 김상덕씨의 트리오는 토왕폭 빙벽과 그 좌우벽을 83년에 이어 다시 연장 등반 하기로 잠정적 계획을 세웠다. 이 트리오는 86쯤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목표로 한 정찰등반을 떠날 계획으로 훈련중이었다.

84년 겨울을 맞을무렵 이태식씨와 박래경씨는 2~3 시간만에 토왕폭 상하단 단독등반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토의하고 연구했었다. 때문에 이 등반에서 이씨가 단독등반을 시도할 가능성을 박씨는 내다보았다. 그 경우 박씨는 혼자서 좌우벽을 등반하겠다는 마음으로 등반대에 임했다.

 

4박5일 일정으로 4사람은 20일 낮 정오 무렵 마산을 떠났다. 트리오에 장영배씨가 지원하겠다며 합류한 것이다. 이들이 설악동 소공원에 닿은것은 오후 8시15분. 바람이 몹시 심했다. 단골인 매표소 옆 매점에 들러 카스테라와 우유로 허기를 때웠다.

 

매점 아주머니로부터 이대장은 그림엽서 한 묶음을 사서 나눠주었다. 다른 대원이 미쳐 한 장을 쓰기 전에 이대장은 4장의 엽서를 우표도 붙이지 않고 우체통에 넣었다. 이대장은 산행 때마다 산악회 선배나 친지에게 엽서를 띄우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 이대장이 이번에는 무엇에 정신이 팔렸는지 우표도 붙이지 않고, 엽서를 띄웠다는 것을 알고, 박대원은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다.

 

9시쯤 출발했다. 아무도 시계를 갖고 있지 않았기때문에 박대원이 기억해내는 시간은 모두 추측이다. 감기몸살에 걸린 김상덕 대원이 계속 뒤쳐졌다. 이대장이 김대원과 뒤에서 따라오고, 박대원은 장대원과 앞서갔다. 계곡에는 눈이 많았다.  심한 곳은 허리까지 빠졌고, 바람에 몸이 날릴 정도였다. 박대원이 먼저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또다른 토왕폭 등반대가 막영하고 있었다. 그 텐트 주위를 지나치자 누군가 목을 내놓고 무학팀이냐고 물어왔다. 그 사람은 청보루산악회원이 왔다갔다고 전갈해주었다.

 

곧 이대장과 김대원도 올라왔다. 김대원이 몹시 지쳐 있었다. 솔뫼 텐트에서 오른쪽으로 10m쯤 떨어진 곳에 육각 돔형 텐트를 쳤다. 토왕폭 입구와는 반대쪽으로 약간 들어간 지점이다. 토왕폭에서 눈사태가 날 경우, 솔뫼팀의 막영지점까지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눈에 묻힐 위험성이 있다고 이대장은 평소 말했었다. 그 계곡의 내림 세력권에서 10m쯤 벗어난 곳에서 이대장은 토왕폭등반 때마다 막영했었다.

 

텐트를 치는데 한참 애를 먹었다. 제대로 텐트가 잡히질 않았고, 서 있기도 힘들만큼 바람이 셌던 까닭이었다. 장비를 넣어둘 돔형텐트를 하나 더 치고 등반장비를 모두 넣었다. 이대장은 몸을 녹이며, 준비해온 부식 이것 저것을  하나씩 꺼내 모두 맛을 보았다. 이대장의 그런 모습이 박대원에게는 다른 때와 달라보였다. 찌개를 끓여 늦은 저녁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생강차를 마셨는데 이대장은 따로 설록차를 달여 마셨다.

 

새벽 1시경, 잠자리에 들기전 박대원과 김대원은 요증을 느껴 바깥으로 나갔다.  바람은 여전했지만 눈발은 그쳤고, 별이 총총했다. 장비, 텐트가 바람에 날아가 계곡 끝에 처박혀 있었으나 그냥 내버려 두었다. 바닥은 비스듬했다.아래쪽에서부터 위쪽으로 이태식, 장영배, 김상덕, 그리고 박래경씨 순으로 누웠다.  침낭커버를 가지고 있던 이대장과 박대원이 바깥쪽에 누운 것이었다. 네 사람은 눕자마자 목까지 침낭단추를 잠그고 곧 깊은 잠에 빠졌다.

 

박대원은 새벽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 어느 순간 텐트가 주저앉는 통에 눈을 떴다. 비명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태식이 형, 칼 꺼내! 텐트 찢어야 겠어." 장대원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박대원은 얼떨결에 침낭커버와 침낭을 10~15cm쯤 풀었다. 엄청난 무게로 눈이 눌러왔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상덕아 같이 일어나보자' 하고, 고함치며, 힘을 줘 보았으나 꼼짝할 수가 없었고, 옆에서도 아무 반응도 없었다.

 

79년 인수봉에서의 추락사고로 허리 상태가 좋지 않은 박대원은 모로 눕는 버릇이 있었다. 잘 때 산쪽으로 향하고, 누웠었는데 충격을 받아 깨어났을 때는 계곡쪽으로 돌아 누워있었다. 그는 모로 누운 자세 덕으로 왼쪽 팔을 쓸 수가 있었다. 이빨로 텐트를 물어 뜯었다. 그리고 왼 손을 넣어 눈을 파냈다. 완전히 손이 올려질 때까지 손을 휘저었다. 한참 그러자니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들리는듯 했고, 차츰 시원해졌다. 구멍이 뚫린 것이었다. 고개를 힘껏 돌리자 바깥도 보였다. 박대원은 그 구멍으로 고함치기 시작했다. 10여m 떨어진 솔뫼팀에게 . . . 

 

그 사이 가쁘게 호흡하던 옆 대원들의 숨소리가 잦아 들었다. 그 제일 아래에 누웠던 이대장은 처음부터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 얼마가 지나자 김대원에 이어 장대원의 숨소리도 멎었다. 아무리 불러도 솔뫼팀에게서 반응이 오지 않았다. 박대원은 솔뫼팀도 같이 눈에 파묻힌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고함 지르기를 포기하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설날 다음날이기 때문에 다른 등반대가 올 것이라 믿었다. 얼마나 긴지 모를 시간이 지나자 동이 텄다. 박대원은 그 때부터 다시 '사람 살려'를 외치기 시작했다.

 

신재철 회장을 비롯해서 마산의 여러 산악인들은 당시의 토왕폭 조난이 상식적인 눈사태로 묻힌 것은 아닌 것으로 추측했다. 눈사태로는 몇 가지 설명이 불가능한 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텐트가 밀려나가지 않았다든가, 장비, 텐트는 말짱했던점을 눈사태 설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눈사태라면 큰소리와 진동이 따를 터인데 10m 떨어져 있던 솔뫼팀에서 몰랐을 리가 없었을 것이었다. 더구나 솔뫼팀은 그 시간에 잠들지 않고 있었다.

 

눈사태가 아니라 바람이 눈을 몰고 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그들은 짐작했었다. 그렇게 추측은 하지만, 그 풍적설에 무학산악회 회원들이 전적으로 동의 하는 바도 아니었다. 바람이 텐트 위를 1m나 덮을만큼 많은 눈을 끌고 올 수 있다고 보기 힘들었던 탓이었다. 그래서 확실한 사고 원인을 알수가 없었다. 그들 중에는 아무도 사고현장을 가본 사람이 없기에 더욱 그러했다. 눈이 쓸려온 방향 등 현장의 상태를 목격한 사람이 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전문가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현장을 객관성있게 봐 두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구조하기에 정신이 없었던 솔뫼팀이나 박래경씨에게 그런 가능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유일한 가능성은 현장으로 올라갔던 그 에델바이스 회원에게 있다. 토왕폭을 단독으로 등반하겠다는 정도의 산사람이면 사고 후라도 현장에 가보았을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산의 그 누구도 그 사람의 인적 사항을 몰랐다. 두 번씩이나 생명을 건진 박래경씨 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제 정신이 아닐 때마다 그 사람을 만난 탓이었다.

 

그 궁금증의 열쇠를 갖고 있을 에델바이스 산악회의 그 사람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지난 3월7일 서울 성궁다방에서 그 궁금증의 주인공 전복기씨(당시 26세)를 만났다. 아니나 다를까  박래경씨를 회복시킨 후 곧 바로 현장으로 가본 사람은 바로 그 사람 전씨였다. "눈사태가 아닙니다. 바람이 함지덕쪽에 쌓여있던 굳은 눈을 흘러 내리게 한겁니다. " 그는 다시 갔을 때도 굳은 눈이 흘러 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곳에는 눈이 떨어져내린 고랑이 패여 있었다고 했다.

 

전씨도 작년에 바로 솔뫼팀이 야영하던 곳에서 눈사태를 맞아 새벽 2시에 탈출한 적이 있다.  좌우에서 흘러 내려온 게 아니라 토왕폭 하단서 밀려온 눈사태였다. 때문에 그도 토왕폭 주변에서는 이태식씨가 골랐던 지점을 가장 바람직한 막영지로 여기고 있는 터였다. "뒷 능선 위에서 폭포처럼 눈이 쏟아지리라고 누군들 생각했겠어요? 30년만의 강한 바람 이라더니......."

 

그는 무학의 장비 텐트는 반쯤까지만 눈에 묻혀 있었다고 말하면서 '늦게 도착하여 워낙 곤하게 잠이 들어 눈 쌓이는 것을 몰랐고, 4명이 한 텐트 속에 누웠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어 더욱 큰 참변을 일으킨 것 같다' 고 안타까워했다. 박씨는 모로 누운 덕에 살아난 것같다고. 토왕폭 하단 바로 아래 막영한 것이 아니라 가장 바람직한 곳에 텐트를 쳤는데도 그것이 오히려 눈받이가 된 이상 누가 이제 고인들의  등산에 관한 지식과 역량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설악동 매표소옆 매점 아주머니는 이런 얘기를 했다고 신재철 회장은 전했다. '설날 전 3일간 집 뒤에 까마귀가 몰려와서 연일 울더라'고. 까마귀가 3일째 울던날 밤, 이태식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주머니는 왠지 이태식씨를 잡고 싶었다. 그 전에도 까마귀 울던날 설악산에서 사고가 났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말리지 못했다. 까마귀 울 때마다 사고가 난 것은 아니었기에 설마하고, 그냥 보내고 말았다. 내일의 비극을 오늘에 우는 그 새까만 날 것의 답답한 가슴 속을 알지 못하고.

 

설악의 토왕골 눈보라 속에 사라져간 우리들의 산친구 이태식씨가 즐겨 부르던 산노래가 있다.

 

산을 제일로 알고 사랑했던 그 친구, 눈덮인 설악산아 대답해 주려마,

나에게 한마디만 가르쳐 다오, 어이해 눈보라속에 사라졌나 그 친구여..... 

 

토왕폭의 사나이가 스스로의 운명을 노래 하다가 그 노래 따라 갔어도 그의 산노래는 겨울이면 그의 뒤를 잇는 토왕폭의 사나이들에 의해서 폭포같은 소리로 언제나 살아 있을 것이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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