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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산행상식

알피니즘의 효시

by 마루금 2010. 6. 19.

동경에서 비롯된 알피니즘

 

동서를 막론하고 산을 즐기는, 즉 요산(樂山)과 요수(樂水)의 취미는 일찍부터 있어왔다. 민화(民畵)에 갓쓰고 도포를 입은 선비들이 로프를 매어 금강산에 오르는 상황을 그린 것이 있는 걸 보면 요산의 정도를 넘은 등산의 정열이 예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등산의 개념이 현대적으로 창립된 것은 근세에 들어서다. 서양에 있어서의 등산은 알프스(alps)에서 시작 되었다. 등산을 '알피니즘(alpinism)'이라 하고 등산가를 '알피니스트(alpinist)'라고 명명한 것으로도 그렇게 짐작할 수가 있다.

 

문헌에서 밝혀진 최초의 알피니스트는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Petrarca Francesco, 1304 ~ 1374)이다. 페트라르카에 관한 기록은 이탈리아의 폴 귀통(1937년 이탈리아산악회 회보), 카르루치의 수필, 툼비니의 페트라르카 연구 등의 기록 가운데서 그의 산행 기록을 찾아낼 수 있다. 페트라르카는 1352년에 몽 벤투의 등정기록을 적었다고 빌리아조 빌리 교수가 언급한 바 있다.1335년 그는 몽 벤투에 올랐다. 몽 벤투는 우리나라 지리산의 천왕봉보다 3미터가 낮은 표고 1,912m의 산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몽 보소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다 빈치의 산에 대한 관심은 깊었던 모양이다. 그의 걸작인 '모나리자'의 배경에 산이 있다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등산이 유행하게 되었다. 취리히대학의 교수 콘라트 게스너(Konrad Gesner, 1516~1565)는 많은 산을 즐겨 올랐다. 그 가운데서도 콘라트 게스너가 1555년 표고 2,132m의 필라투스산(Pilatus Mt)에 오른 것이 유명하다. 그는 등산을 통해 그의 전공인 식물학과 언어학을 풍부하게 했지만, 그보다도 그는 등산의 기쁨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의 라틴어로 된 등산기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등산의 정열을 심었다.

 

  

 

알프스에서 등산의 의미가 확립된 것은

1786년 8월8일 4810m의 표고를 가진 몽 블랑의 첫 등정일 것이다. 몽 블랑은 유럽의 최고봉이다. 그 산이 등산사의 최초의 기록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이 위적을 행한 사람은 호레이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이다.

 

 

소쉬르는 식물학자이며 물리학자이기도 하고, 지질학자였다.  제네바에서 탄생하여 제네바에서 자란 소쉬르는 소시적부터 산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꾸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아득히 바라뵈는 몽 블랑을 늘 동경했다.  '언젠가는 몽 블랑에 오르리라' 동경은 이윽고 신념으로 되었다. 그러나 몽 블랑은 광대한 빙하와 험준한 빙벽으로 되어있는 산이라서 그 산에 오를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망상이었다. 17세기의 지도에 몽 블랑은 '저주 받은 산'이라고 기록되어 있기조차 하다.
 

소쉬르는 몽 블랑 초등에 상금을 내걸었다. 소쉬르의 정열은 공명을 얻었다. 이윽고 야심적인 대담한 사나이 둘이 소쉬르의 희망을 달성하기에 이른다. 샤모니의 수정 채취업자 '쟈크 발마'와 마을 의사 '미셀 가브리엘'이 그 주인공들이다, 소쉬르는 두 청년의 성공적인 등반이 있은 이듬 해, 즉 1787년 18명으로 된 등반대를 이끌고 몽 블랑의 정상에 도달했다. 그가 꿈을 가진지 25년만의 일이다.

 

 

과학자인 그는 기온과 기압, 그 밖에 많은 과학적인 관찰을 했을뿐만 아니라, 감동적인 문장으로 몽 블랑의 장엄과 몽 블랑에 의해 앙양된 영적인 기쁨을 적었다. 이때 그가 남겨 놓은 관찰기록들은 이후 산악등반의 선구적인 기술적 자료들로 남게 되었다. 이로서 '알피니즘'이란 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알피니즘이란 알프스의 봉우리를 순수하게 등반을 목적으로 오르는 사상을 말한다.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등반가를 '알피니스트'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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