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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으로 끝맺은 알프스의 황금시대

by 마루금 2010. 6. 19.

 

 

알프스의 황금시대

소쉬르가 몽블랑을 오르고나서 이후 70년간이 이른바 '알프스의 개척시대'였다. 산을 두려워하는 시대는 지났다. 용감한 선구자들이 알프스의 봉우리마다 알프스의 구석구석을 헤매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에 자극되어 차츰 등산자들을 맞이해들이는 준비태세도 갖추어져 갔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장쟈크 루소의 외침이 등산열을 복돋우었다. 산업혁명이 철도를 발전시키고, 숙사(宿舍)를 마련하게도 되었다.

 

1800년 이후 알프스는 등산가의 메카가 되었다. 1854년부터 1865년까지는 '알프스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가 있다. 이 10년 동안에 알프스는 남김없이 답사되고, 4000미터 이상의 고봉은 거의 등반객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봉을 등반한 빛나는 기록을 남긴 알피니스트들과 이를 도운 안내자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방대한 책이 될 것이다.

 

헌데, 주목할 것은 등산가의 대부분이 영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빅토리아조의 전성기를 맞은 영국은 등산의 영역애서도 단연 선두를 달렸다. '세계는 우리들의 것이다' 영국인의 이러한 긍지 넘치는 자각이 '그러니까 알프스도 우리들의 것이다'로 발전한 것이다. 아뭏든 영국인의 등산사에 남긴 공적은 다른 영역에 있어서의 그들의 공적에 손색이 없다.

 

 

 

비극으로 끝맺은 알프스의 황금시대

알프스 산맥에서 미등반으로 남은 것은 마터호른(Matterhorn, 4478m)이었다. 마터호른은 어둠을 깎아 세운 피라밋이다. 수려하여 엄숙한 기풍을 가진 산용(山容)을 쳐다보고 탄성을 올리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누구도 그 산에 오르려는 생각을 가지지 못했다. 너무나 험준하고 너무나 위험하여 근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 올라야 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윔퍼(A. E Whymper)가 마음 속에서 다진 말이다. 에드워드 윔퍼는 런던 태생의 화가이다. 1860년 21세 때 그는 스케치북을 들고 알프스에 갔다. 그의 알프스 정열은 이 때 싹텄다,

1865년까지 매년 알프스를 찿아선 이 산 저 산에 올랐다. 그의 목적은 마터호른의 등반에 있었다. 그는 매년 시도를 거듭했지만 언제나 실패로 끝났다. 일곱 번이나 실패를 되풀이했다. 그래도 그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 사이 그는 세밀하게 등산로를 관찰하고 연구했다.

 

드디어 1865년 7월, 윔퍼는 마터허른 정상에 인류 최초의 발자국을 새기게 되었다. 이 등반엔 하나의 드라마가 있었다. 마터호른을 노리고 있는 사람이 윔퍼 말고 또 하나 있었다. 이탈이아인 장 안토안 카렐이었다. 그들은 처음엔 협력하여 마터호른 등반을 계획한 사이였는데, 최후의 등반에선 선두를 다투는 라이벌이 되었다. 같은 날이었지만 선착의 영광은 윔퍼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산할 즈음 일행 7명 가운데 4명이 추락사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윔퍼의 마터호른 등반으로 '알프스의 황금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그 조난사건은 유럽에 커다란 충격을 주어 일시 알프스 등반을 금하자는 움직임마저 있었다.  그곳을 찿으려고도 아니했다. 비참한 회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윔퍼는 1911년 가을 72세의 노령으로 알프스를 찿아가서 그해 9월 16일에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유해는  몽 블랑 산록의 무덤에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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