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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추억따라~

월출산의 추억

by 마루금 2008. 2. 26.

1988년 2월7일

날씨 : -12℃ / 눈과 가스와 강풍동반  

교통편 : 서울~광주(야간 관광버스), 광주~영암(시외버스 첫차 4시:30분), 영암~ 도갑사(택시)

산행코스 : 도갑사 ~ 미왕재 ~ 향로봉 ~ 구정봉 ~ 천황봉 ~ 장군봉 ~ 천황사

인원 : 3명 (마루금과 동생, 이경규) 


새벽 눈발이 날리던 날, 택시로 도갑사에 도착했으나 깜깜, 사찰 구경은 포기, 렌턴을 켜고, 곧바로 산행을 진행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물이 겨우 흐르는 냇가가 나타나서 라면을 끓여먹고 오르자고 했더니 둘은 조금 더 올라가서 식사를 하쟎다. 그러고서는 월출산을 넘을 때까지 냇가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니 결국은 이것이 쫄쫄 굶는 산행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온통 이름 모를 가시나무와 산죽(대나무)을 가르며, 깔딱고개를 넘었다. 어둠이 가셨을 즈음 억새로 유명한 미왕재에 도착, 세상이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뒤돌아 본 도갑산은 수석전시장이었고, 가지 끝에 걸린 설화가 장관을 이뤄 세상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잠시 쉬며 황홀경에 넋을 빼앗긴 동안 기상이 급변했다. 추위 엄습, 기온 급강하, 강풍 동반, 눈보라, 그리고 숨을 들이 쉴 때마다 콧구멍에는 얼음반지가 생겨 따끔거리고, 맞바람은 숨 쉬기조차 힘들게 했다. 옷을 있는대로 다 껴입고, 장갑도 두 겹씩, 얼굴을 두건이나 수건으로 감싸니 눈만 뻐꿈 영락없는 밤손님이다.

 

아이젠을 차도 바닥은 미끄러웠다. 바위를 넘을 땐 이따금 손도 사용하게 되는데 장갑이 바위에 쩍 쩍~ 달라 붙었다. 아마 맨손이라면 손바닥 살점도 떨어져 나갈 것이었다. 가끔 어려운 곳은 아이스해머로 찍어서 오르기도 했다.

 

온통 눈천지에 안개인지 구름인지 사방을 분간하기 힘들게 시야를 가렸고, 계속 뿌려대는 눈은 등산로를 미로로 만들고 있었다.실로 난감했다. 꼭 조난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선두(동생)가 침착하게 감각적으로 방향을 인식하며, 계속 전진을 해 나갔다. 봉우리 하나 넘고, 두 개 넘고, 세 개 넘고, 또 넘고 또 넘고 . . . .

 

 

 

 

그러는 사이 허기도 졌다. 물이 없어 음식을 해먹을 방법도 없었다. 냇가에서 요기를 했어야 했는데 후회가 막급,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먹을 거라곤 생라면 3개와 귤 6개뿐 . . .  귤을 각자 두 개씩 나누었다. 경규는 단숨에 귤 두 개를 해치웠다. 무척 허기가 졌던 모양이다. 동생은 쉬면서 하나, 걸어 가면서 나머지 하나를 먹었다. 나는 쟈켓 호주머니에 귤을 그대로 넣어 두었다. 혹시 모를 위기를 고려해서 . . . .

 

걷는 동안 계속해서 눈도 긁어 줏어 먹었다. 조금이라도 허기를 면해 보려고. . . . 그런 상황에서 먹어보는 눈이 그렇게 맛이 좋은 줄은 몰랐다. 꿀맛이 따로 없다는 표현이 매우 적절할 것같다.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왔는지 세어보지도 못했다. 좌우지간 한참을 지나 온 것 같은데, 배가 고프고, 지치니 지겨워지기까지 했다. '저 봉우리를 넘으면 하산길이 나올 것인가'하고 넘으면 더 큰 봉우리가 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힘이 쫘~악 빠졌다.

경규가 이제 도저히 못가겠다고 퍼졌다. 배고프고 힘빠지니 손끝하나 움직이기 조차 싫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내 호주머니에 있던 귤을 꺼내서 경규에게 넘겨주었다. 귤 두 개를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혼자서 꿀꺽, 쫌 야비하게도 보였지만 그래도 끝까지 끌고 갈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후 경규는 쉬다 말고 먼저 일어나서 출발하자고 설쳐댄다. 힘이 솟았는지 귤 때문에 미안했던지 못가겠다고 퍼졌다가 . . .ㅎㅎ

 


 

 

한 치 앞 분간이 어려운 길을 계속 이어가던 도중 방향이 이상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구정봉까지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길은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둘러봐도 위로는 절벽뿐 . . . . 넘어서 오르는 길을 찿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옆으로 횡단, 반시간을 오르락 내리락 그렇게 헤멨다. 

 

그러는 사이 눈이 서서히 그치기 시작했고, 다행스럽게 시야도 점점 확보되고 있었다. 가스가 걷히자 역시 예상했던대로 구정봉은 한참 위에 올라가 있었고,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잠시후 천황봉에서 넘어 오는 열여명 가량의 무리들이 보여서 그 방향으로 향해 올랐다. 엉뚱한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한 시간 가량 길을 잃고 헤메다 나왔다.

이윽고 구정봉에 도착, 천황봉도 보였다. 하늘도 서서히 열려서 구름 속에서 해가 날름거렸고, 악마같던 바람도 줄었고, 기온도 점점 올라가며 따뜻해지고 있었다. 산행도 훨씬 수월해졌다. 여유로움을 찿아서 가끔 뒤를 돌아보니 넘어 온 길이 까마득했다.

드디어 천황봉이라는 표석이 있는 정상에 도착, 월출산 전체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과연 금강산 다운 면모를 지녔다. 전후좌우로 병풍처럼 늘어선 수많은 봉우리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 늠름한 자태에 한 껏 매료되어 한동안 멍하게 서 있기도 했다. 

어렵사리 지나온 길이 빤히 내려다보였다. 조금전만 하더라도 방향을 분간 할 수 없었던 저곳, 혹시 조난이라도 당할까봐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아찔한 순간이 지나갔다. 이젠 내려 가는 일만 남았다. 하산은 통천문~ 광암터~ 바람폭포를 지나서 장군봉과 형제봉 중턱의 릿지코스를 택했다.

 

바람골 건너편의 사자능선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봉우리 마다 머리에 눈을 가득 얹고, 하늘 향해 저마다 우뚝 솟아 한 껏 위용을 자랑했다. 하산하는 도중 내내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월출산이 뿜어내는 氣와 美와 멋에 흠뻑 도취해 있었다.

천황사에 도착, 3시였다. 오랜만에 만난 냇가, 힘들게 짊어지고 온 라면 3개를 끓여 배를 채운 후 공원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이렇게 해서 평생 잊지못할 기억에 남을만한 월출산 산행을 마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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