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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뫼이름들~

周王과 周王山

by 마루금 2006. 12. 13.

 

임금과 관련된 땅이름 많아... 

누구나 자기 고장의 지명이 다른 곳 보다 더 좋기를 원한다. 또 그 지명의 내력이 값진 것일 수록 자랑스럽게 여기며 주위에 그것을 널리 알리려 애쓴다. 전국에는 왕(王), 어(御), 황(皇), 제(帝), 성(聖), 도(都), 궁(宮), 궐(闕) 등과 같이 임금이나 정치에 연유한 듯한 느낌을 주는 글자의 지명들이 많다. 이러한 지명들은 대개가 옛날에 왕이 머물렀다거나, 궁궐이 있었거나 해서 붙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더러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대개 왕/도읍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지명 중 경북 청송의 주왕산(周王山:720m)은 다른 나라 왕에 관한 내력이 담겼다는 점에서 좀 색다른 면이 있다. 주왕산은 한반도의 등줄기 태백산맥 남단에 위치한 명산이다. 예부터 조선 8경 중 제6경으로 꼽혀왔고, 1976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청송군 청송읍, 부동면, 진보면, 영덕군 달산면, 지품면 등 2군1읍 4면에 걸쳐 있는데, 청송읍으로부터 남동쪽 15Km 지점이 된다.

 

 

주왕산의 전설

산자락이 돌 병풍을 두른 것 같아 석병산(石屛山)이라고도 했고, 난리 때의 피난민이나 평시의 선유(先儒)와 선사(禪師)들이 자주 찿아들어 대둔산(大遁山)이라 하기도 했단다. 또 뛰어난 절경 때문에 소금강(小金剛)이란 이름도 갖고 있다. 신라 선덕왕 때 왕의 조카 김주원(金周元: 태종 무열왕 6대손, 강릉 김씨 시조)이 머물렀다 해서 주방산(周房山)이라고도 했었는데, 뒤에 주(周)나라의 왕이 피난하였다고 해서 주왕산이라 했다고 한다.

 

전해지는 전설은 이러하다. 당나라 덕종 15년(신라 소성왕 1년), 주도(周鍍)가 중국 남양부에서 반기를 들었다. 진나라 때 복야상서(僕야常書)의 벼슬을 지낸 주의(周의)의 9대손인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날카로웠고, 5살 때 이미 글을 배웠으며,11살 때에는 육도삼략(六韜三略)을 통달하고, 천문지리에도 능했다고 한다. '황하의 물을 들이마시고, 태산을 갈아 없애겠다'면서 어릴 때부터 왕후장상(王候將相)을 꿈꾸었던 주도는 늘 진나라 후손 중에 큰 인물이 없음을 한탄해 왔다. 어른이 되자 장사 1백명을 거느리고, 웅이산(熊耳山)에 들어가 1만명이 넘는 군중을 모아 남양 땅에 웅거하더니, 스스로 후주천왕(後天王)이라 칭하고, 옛 진나라를 회복한다는 구실 아래 당의 서울인 장안(長安)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당의 곽자의(郭子儀)가 이끄는 군사에게 크게 패하고, 요동으로 쫓겨 갔다가 사정이 어렵게 되신라 땅으로 도망을 왔다. 1천명 정도의 군사를 거느린 주왕은 강원도를 거쳐 진성(眞城: 지금의 청송군 진보면) 땅에 이르러 석병산이 군사 숨기기에 좋다는 말을 듣고, 이 곳에 숨어들었다. 식량은 인근 주민의 곡식을 약탈하여 구하였다. 그러자 신라 땅에서는 석병산에 산적이 있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당나라 조정에선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이들을 토벌해 줄 것을 청해왔다. 신라의 소성왕은 마일성(馬一聲) 장군의 5형제로 하여금토벌토록 명하였다. 마 장군의 부대가 산 밑에 진을 치자,주왕의 군사들은 기암봉에 이엉을 씌워 노가리처럼 위장, 군사들이 많은 것처럼 꾸몄다. 마장군의 군사들은 이에 속아 먼저 공격을 하지 못했다. 수일이 지난 후, 마장군은 장군봉에 올라 위장해 놓은 노적가리를 향해 활을 쏘았다. 활 맞는 소리가 바위에 부딧히는 소리임을 알게 된 마장군은 주왕의 꾀에 속았음을 알고, 즉시 산을 포위, 일제히 공격해서 주왕의 군사들을 사살하거나 체포하였다. 군사들이 완전히 무너지자, 주왕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굴 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이 굴이 지금의 주왕굴(周王窟)인데,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폭포수가 굴 입구를 막고 있어서 은신하기에 매우 좋은 곳이었다. 천혜의 은신처라고 방심한 주왕은 어느날 몸을 씻기 위해 굴 입구로 나왔다가 마장군의 군사들에게 발각, 화살과 철퇴에 맞고, 운명을 다했다.

 

 

주왕의 넋이 수달래로 피어

주왕산은 그 일대에 주왕과 관련한 다른 지명들을 깔아 놓아 전설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 주고 있다. 산 입구로부터 3Km 지점에는 7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가운데의 최고봉이 깃대바위(旗岩/旗岩峰)이다. 주왕의 군사들의 노적가리처럼 위장했었다는 바위 봉우리인데, 마장군이 대장기(大將旗)를 꼿았다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한다. 봉우리 가운데에 두 쪽으로 갈라 놓은 듯한 금이 나 있는데 마장군이 쏜화살에 맞아서 생긴 것이라고 전해 온다.  

 

그 밖에도 주왕의 군사들이 갑옷과 무기를 숨겨 두었었다는 무장굴(武裝窟), 또 그들이 바위 위에 무자위를 설치해 놓고 계곡의 물을 길어올렸다는 암벽인 급수대(汲水臺), 신라의 병사들이 주왕의 군사들을치기 위해 포진 했을 때 말을 매어 두었다는 마들, 또 그들이 적을 무찌르고 승전보를 울렸다는 북두들, 신라의 군사와 주왕의 군사들이 세 번이나 일진일퇴를 거듭했다는 삼위동(三危洞)등 당시의 전투 상을 낱낱이 대변해 주기라도 하듯이 산의 많은 지명들이 온통 주왕의 항쟁 관련 전설에 얽혀있다.

 

이 산에 있는 대전사(大典寺)와 주왕암(周王岩)은 919년 보조국사(普照國師)와 늘왕대사가 각각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과 주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온다.또 백련암(白蓮庵)은 주왕의 딸 백련낭자(白蓮娘子)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 전해온다. 이 산에 주왕이 마장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쌓았다는 주방산성(周房山城)이 있지만, 지금은 성벽의 돌들이 많이 무너져내려 돌 무더기를 이루고 있다.

 

양력 5~6월 쯤에 주왕산을 오르면 주방천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수달래(水丹花)를 볼 수 있다. 이 꽃은 진달래와 비슷하지만 색갈이 약간 짙은 편이고, 한 꽃잎에 20개가 넘는 검붉은 반점이 있는것이 특징이다. 주왕산이 온통 주왕의 전설을 안은만큼 이 꽃도 그 전설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주왕이 후주천왕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마장군의 철퇴에 맞아 숨을 거둘 때 그 피가 주방천을 붉게 물들이더니 그 이듬해에 물가 곳곳에 피빛의 꽃들이 피어났다지 않은가. 주왕이 흘린 피가 넋이 되어 꽃으로 환생했다는 이야기이다. 


글/지명연구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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