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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산사람들~

이민재 박사..

by 마루금 2005. 7. 23.

   李 敏 載

"산은 명예를 위한 대상일 수 없어"

 

 


 

이민재 박사, 학자이며, 산악인이었다. 지루하지 않은 시기에 산뜻한 세대교체를 실천으로 가르쳤다. 푸른 기상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은 '은발의 퇴역' 이박사는 자연과 인간의 본질적인 관계에 관심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민재씨는 식물학을 전공한 이학박사였다. 자유당 시절의 장기집권을 했던 '이박사'가 아니다. 제6대로서 한국산악회 회장직을 단 한 번 역임했을 뿐이다. 71~ 73년까지,연임을 귄하는 주위의 요청과 뭔가를 더 해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을 떨쳐버렸다. 장기집권 한 이승만 박사처럼 되기 싫어서 . . .

 

이박사는 82년에 강원대학 총장직을 정년퇴직했다. 45년 서울대 약대교수로 첫 발을 내디딘 후  줄곧 몸담아 온 교육계를 35년만에 떠난 셈, 그 후 몇 대학에서 출강을 의뢰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물론 오래 몸담은 만큼 교육계에 미련도 많다. 하지만 그 미련이 다시 어떻게 . . .  하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깨끗이 물러난 교육계다. 이런 세대교체는 이박사의 지론이다. 산악계와 교육계에도 자유당의 '이박사'와 같은 아집을 이박사는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교육계에서도 '이박사'가 되기를 거부한 이박사다.

 

이박사는 창암(滄巖)이라는 아호를 가졌다. 찬바위, 혹은 푸른바위라는 이미지다. 그런 성품이 '푸른기상'을 느끼게 했다. 학창시절 호를 스스로 '청구'라고 만들었다. 푸른언덕이란 뜻이다. 그게 마땅치 않았는지 잘 불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류홍렬, 최상원씨와 어울린 술자리에서 창암이 어떻겠느냐고 하여 붙여지게 되었다. 당시 이박사의 집이 청량리에 있었는데 그 청량리집이라는 이름에서 마땅찮음을 읽은 중문학자의 최상원씨가 "장암이 어떻소"하여 결정된 아호다. 이박사는 '푸른바다에 우뚝한 바위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이박사의 기상과 기백이 제대로 표현되었다는, 창암이라는 호에 걸맞게 그는 살았었다.

 

1917년 함북 회령에서 태어났다. 나남중학 시절, 5월말이 되도록 운동장 너머로 첩첩 푸른산 위에 허연 눈을 쓰고 있는 관모봉을 봤다. 저 너머에 어떤 세계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어린 마음을 끌었다. 그 호기심 따라 나선 4학년 때 이박사는 산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치만 그것만이 "왜 산에?"라는 질문의 뾰쪽한 답은 아니라는 듯 "좋아할 별 이유없이 좋아하게 되었어요"라고 했다.

 

그는 웃는 얼굴이 언제나 푸르다. 5월말의 산처럼 . .  그 푸른 얼굴 위에 하얀 서리가 않아 있었다. 이박사가 신록 너머로 보았다는 관모봉 처럼, 그 흰빛을 찿아 나선 이박사의 파란 호기심이 흰 머리로 돌아왔던 것일까. 어디서  본듯한 게 저 호기심이 세어버린 시간이었을까.

 

일본서 공부할 때 겨울철 북해도의 대서산에 올랐다. 소나무 가지를 깔고, 염소가죽 침낭에서 잔 그 산행 후, 이박사는 알피니스트가 되었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 신념으로 일관한 젊은 시절이었고, 또 한국산악회의 부회장 10년을 맡았었다. 알피니스트란 하이커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이박사는 알피니스트론을 펼쳤다.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인 관계에 관심을 둘 때 알피니스트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 삼자간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봐요"  따라서 알피니스트들의 모임으로의  산악회와 하이커들의 등산회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 . .

 

그 당시 정신없이 늘어난 해외등반으로 프로와 아마추어정신에 혼동이 올까 이박사는 저어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형적 조건이 프로의 길을 애초에 막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프로에의 수요가 없는데, 프로의 길을 걷겠다는 것은 아무래도 환상이겠지요" 산은 명예를 좇기 위한 대상일 수 없다는 이박사는 "산은 에누리 없는 장사꾼같은 깍쟁이일 지도 모르지요"라고 했다.

 

1984.8.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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