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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산사람들~

8000m를 우리나라 최초로 오른 사람은

by 마루금 2005. 7. 4.

한국의 진정한 등산가    崔秀男 

 그는 1971년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8000m를 넘어섰다.

 


71년 3월, 박철암 대장을 비롯한 강호기, 장문삼, 권영배, 김인길, 김운영, 박상열, 하세득, 양승혁, 김초영씨 등 한국 로체 샤르 등반대가 출국했다. 3월5일 루크라 비행장(2700m)에 내린 대원들은 로체 샤르를 향해 캐라반하였다. 4800m 츄쿵 부근에서 그동안 고산증세를 참아오던 권영배 대원이 말 한 마디 못하고 의식을잃어 버렸다. 그 바람에 등반대는 풍지박산이 되기 시작했다.

 

경험부족으로 인해 당시까지만해도 우리 산악계는 고산병에 대한 상식마저 없었다. 연장자가 오히려 적응이 쉽다는 것과 건강한 사람일수록 빨리 그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고산증세는 체질의 약세를 애기하는 것은 아니며, 고도를 조금 낯추어 쉬면 그 증세가가시고 그러한 승강행위를 되풀이 하면서 적응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한국 최고라고 불리는 산악인을 전국에서 물색하여 선발한 팀으로서 각자의 자존심의 대립으로대원들간의 경쟁의식이 발동했고, 단일팀이 아닌점 때문에 서로의 대화가 매우 드물었다. 머리가 쪼개져 나갈 것 같은 고산증세를 제일 나이어린 권영배대원이 말도 못하고 악착같이 참고 있다가 기절해 버린 것이다. 무리였다. 하지만 뼈져린 교훈이기도 했다. 그를 카트만두로 후송시키려 장문삼, 강호기대원이 내려가야 했다. 그러다가 5100m 지점에서 하세득 대원이 또 나가떨어졌다.

 

최수남, 강호기, 상계(셀파) 3명이 7400m지점에 C4를 설치한 것만도 기적이었다. 다음날 강호기 대원을 C4에 남기고, 최수남은 상계(셀파)와 같이 정상 공격에 나섰다. 당시 상계는 뛰어난 셀파가 아니었다. 최수남대원이 거의 끌다시피해서 올랐다.

 

산소가 있을리 없다. 단지 생명이 있을 따름이다. 그는 눈사람이 되어  숨죽이며 8000m를 넘어섰다. 8천미터 . . 신기루였던가 !  끊어지는 숨을 끌며 8100m까지 나아갔다. 그 곳에서 무엇을 보았겠는가 . . . 정상도 보았다. 몽메에도 그리던 8333m   로체 샤르의 하얀 정상을 . . . . 바로 지척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 전에 놓여 있는 엄청난 걸리(Guiiy)를 보았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 진리와 사랑사이에 놓인 괴리였다. 그 갭은 100m를 내려갔다가 다시 200m의 벽을 이룬 후 정상능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에게는 그 갭을 내려갔다 다시 올라설 자일이 없었다. 이미 픽스로프마저 동이 났다. 망연자실 그 곳에 퍼질러 않아 건너지 못할 갭을 바라보다 목놓아 울고 돌아왔다.

 

내려오며 상계가 말했다. " 오스트리아가 로체 샤르를 초등했을 때 사실은 바로 8100m까지밖에 진출 못했다. 하산하여 네팔정부에 정상까지 갔다고 증언할테니 올라간 것으로 하자 " 고,  최수남은 한마디로..." 노(NO) !  "... 였다. 로체 샤르는 그렇게 끝났다.  


1975년 5월15일 서울 삼각동 금봉다방에 김영도 대한산악연맹회장은 회의를 소집했다. 강호기, 김인섭, 이원영, 김병준, 한정수, 그리고 최수남씨 등이 모였다.

 

"최수남씨가 요번 정찰대를 맡아 주시오." 김회장은 용단을 내렸다. 에베레스트 등반대장의 자리를 그에게 맡겼다. 그 중책에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그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여 김회장이 그를 지목하기까지는 어려움도 많았다. 그를 헐뜯는 애기가 김회장의 귀에 들렸다. 김회장은 그에게 " 이런저런 애기가 도는데 당신 할 말은? "  하고 물었다.  "없습니다" . . .  김회장은 그에 대한 강한 믿음이 생겼다.

 

77년 에베레스트원정을 위한 1차 정찰대는 그렇게 구성되었다. 부대장에 김인섭, 대원은 한정수, 고상돈, 김병준, 이원영, 김운영씨가 선발되었다. "히말라야는 힘이다. 짐지고 바위를 하라"며 최대장은 대원에게 힘을 기를 것을 훈련 시켰고, 히말라야로 떠날 때는 음악을 준비시켰다. 우리나라 민요, 가요, 클래식 테입을 60여개나 준비했다. 판소리로 대원들에게 노래도 가르쳤다. 테너, 바리톤 등의 포지션까지 정해주며 . . .

 

떠나기 전에 그는 책임의 중요성을 생각해서인지 불안해 한 것같다. 그 동안은 최완택 목사를 찿게했다. " 히말라야에서 산행 시작하기 전에 제를 지내고 싶네. 그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게. 만약 자네가 산친구라면 같이 가서 주께 해주면 좋을텐데.." 최목사는 그에게 조그만 성경 하나를 주었다.

 

아일랜드 피크에 붙었다. 원래 계획은 에베레스트 쿰부빙하지대 아이스 폴을 먼저 통과, 철수한 후 아일랜드 피크를 등반하기로 했으나 "크리스 보닝턴"의 영국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가 등반중이어서 현지에서 변경했다, 아일랜드 피크를 먼저 해치우기로 . . .


김인섭부대장이 고산증세로 고생하기도 했으나 9월17일. . .한정수, 이원영, 김운영대원이 정상에 올랐다. 그동안 비운의 마나슬루 등반대로 인해 히말라야 하면 조난이었는데 그 징크스를 깨고 정상에 섰다. 껴안고 애국가를 합창하고. . . 공인된 첫 히말라야 봉우리 등정이었다.

 

공격조가 아릴랜드 피크의 루트를 공략중일 때 최대장은 아마랍챠를 정찰하고 돌아왔다. 그는 상계와 둘이서 9월18일 아일랜드 피크를 올랐다. 아일랜드 1차공격에 실패한 김인섭, 김병준대원에 대한 배려로 다시 아일랜드 피크2봉 공격을 명령했다. 20일 김인섭, 김운영, 고상돈, 김병준 4명의 대원이 올랐다. 9월24일 영국대는 아직 철수하지 않았다. 마이크 버크대원이 실종되는 바람에 보닝턴대는 꾸물거렸다. 그동안 에베레스트 초입의 푸모리를 시등하기로 페리체에서 결정했다. 남서능을 택해서 올랐다. 하지만 푸모리 남서능은 훈련대상지가 아니었다. 5800m부터 나타난 암벽은 이 곳에서 사생결단을 걸어야 할 만큼 험준했다. 6200m에서 철수했다. 푸모리 남서능에서 그들은 멀리 아래에 " 크리스 보닝턴"대의 긴 철수 행렬을 보았다.

 

지구의 지붕 에베레스트로 그는 향했다. 쿰부빙하 5400m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아이스 폴을 공략했다. 최대장이 직접 선두에 서서 10월7일 아이스 폴지대를 통과하여 6200m지점에 C1을 설치했다. 이로서 정찰대의 임무는 모두 마쳤다.

 

카트만두로 돌아오며 최대장은 셀파의 집마다 들러 술을 마셨다. 늘 취해서 트래킹하였다. 정찰대장의 임무를 끝내고, 그의 품에는 작은 성경 하나를 품고, 에델바이스 몇 포기만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 설악산에 훈련등반 들어간다는 사람이 밤 12시에 술에 취해 친구를 데리고 왔다. 그 친구들도 너무하다. 미안해 하기는 커녕 양말까지 벋어 던지며 빨아 달라고 . .  이 날따라 그가 왠지 산에 가기 싫다고 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몇 마디 투정을 부렸지만 다툼은 없었다. 그는 다룰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친구와 술로 밤새며 같이 지낸 그는 아침에 아무 말 없이 산으로 가버렸다. 그냥 그렇게 보낼 수야 없지 않은가. 3살 난 진혁이를 안고, 출발장소로 뒤따라 갔다. 연맹사무실에서 그는 진혁이를 한 번 안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산으로 가버렸다.

 

1976년 2월13일 에베레스트 제3차 동계훈련대는 설악골로 들어갔다. 김영도 회장이 총지휘를 했고, 최수남은 트레이너 였다. 설악골 입구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고, 다음날 최수남은 노루목 10동지 묘에 다녀왔다. 그날 저녁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2월 15일 그가 이끄는 제1조 김호진, 전재운, 송준송, 박훈규, 이기용 대원 6명은 설악골 까치골을 통과하여 1275안부의 C1으로 전진했다. 눈은 폭설로 변했다. 설악 좌골과 우골이 갈라지는 곳에서 1조는 2조와 헤어졌다. 2조는 조원길, 박상렬, 한정수 대원이었다. 최수남은 평소에 털모자를 쓰지 않았다.늘 이어밴드만 하고 다녔다. 2조와 헤어질 때 그는 얼티메이트(Ultimate)헬멧을 쓰며 웃어 보였다." 어이 정수 , 어때? "  그리고 까치골로 들어갔다. 눈은 계속 왔다, 적설량 100Cm 가량, 까치골은 키슬링을 지고 통과를 못할 정도로 협곡이었다. 저녁 5시에 C1에 닿았다. 밤에 눈이 계속 내려 윔퍼텐트의 가운데가 내려 앉았다. 베이스 캠트에서 이날 작전회의가 열렸다. 김영도대장은 폭설로 인한 눈사태를 직감하고 16일 아침 전 조 철수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1조만은 통신두절이었다. 철수하는 조로부터 무전기를 인수 받기로 했으나 엇갈려 1조는 무전기가 없었다.

 

2월16일 오전6시 최수남조는 일찍 기상했다. 이날 1조는 설악좌골로 조금 내려갔다가 범봉 안부에 설치된 C2로 올라 붙게 되어 있었다.텐트의 입구가 눈으로 막혔다. 강설량 150Cm, 하얀 옥으로 반짝이는 온 산이 쩍쩍 갈라져 내렸다. 그가 앞장을, 맨뒤가 김호진 대원이 섰다. 1275 안부 중간을 내려오는 중 눈사면이 떨어져 내렸다.  눈사태!  대열의 후미를 쳤다. 찰나였다. " 튀어 "  맨먼저 본 최대장이 소리쳤다. 다들 빠져 나왔는데 제일 후미에 있던 김호진 대원만 하반신이 묻혀 허우적거렸다. 전재운 대원이 눈삽으로 파내었다. 1275의 설사면이 계속 갈라졌다. 이 곳에 오래 머물면 위험하다고 판단, 전원이 안부 사면을 글리세이딩으로 빠르게 흘러내렸다. 안부 아래서 휴식 오전10시, 그가 윈드재킷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었다. 담배가 동이 났었는데, 그가 챙겨 둔 것이었다.  " 마누라가 준거야 ! " " 눈사태다 ! "  벽력같은 소리가 뒤에서 터져 나왔다. 10시20분 휴식 후 김호진 대원이 글리세이딩 자세를 취하려할 때 최대장의 외마디가 튀어나왔다. 순간 김대원의 눈에는 하얀 눈안개가 서렸고, 정신없이 몸이 흘러내렸을 뿐 아무것도 의식할 수가 없었다. 얼마를 눈속에서 흘러내렸을까. 움직임은 멋었고, 암흑 속에서 한 점 밝은 빛이 보이더니 점점 확대되어 온 시야는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 최수남 "

그의 시야에도 평소에 꿈처럼 찿던 "하얀산" 그 눈가루 속에서 번쩍거렸을까. 그 하얀색은 젊은 열정의 피같은 붉음과 그의 뜻같은 푸르름을 지우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8000m의 색으로 그의 눈에 빛났을 것인가.

 

그와 전재운, 송준송 대원은 눈속에 깊이 뭍혀 내렸고, 박훈규, 이기용, 김호진 대원은 빠져나왔다. 눈 바깥으로 손끝만 나온 이기용 대원과 거꾸로 엎어져 비브람이 나온 김호진 대원을 눈바깥으로 몸이 완전히 밀려나온 박훈규 대원이 끌어낸 것이었다. 사고를 모르고 이상한 예감에 올라 오던 강호기, 이윤선, 최창민, 유창서, 한정수, 문재한, 고상돈, 김영한, 이원영 대원이 필사적인 구조활동을 벌였으나 허사였다. 무심한 눈발은 계속 날렸고 사태는 계속 되었다.


그는 正道만을 행했다. 산행에서도 언제나 정통 !    오소독스를 외쳤다. 정통파였다..        

 

그는 1941년 7월15일 평북 벽동에서 태어났다. 2남4녀중 맏아들이었다. 밑으로 여동생이 둘, 남동생, 다시 여동생 둘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지주이자 기독교 집안이었다. 최수남의 조부는 초기 개척기독교인으로 유명한 최재정목사이다. 신의주와 평양에서 선구자적인 선교활동을 해온 최재정 목사는 평양 남문밖 교회의 정목사였으며 "가고파"의 김동진 부친 김화식 목사와 영락교회의 설립자인 한경직 목사와 더불어 평양에서 활약한 분이다. 최재정 목사는 벽동, 삭주를 거쳐 선천에서 순교했다.

 

1948년 전가족이 월남하여 강원도 상동에 정착하였다. 그 곳에서 그의 부친은 광산에 손을 대었으며, 생활은 넉넉한 편이 못되었다. 최수남은 상동국민학교와 상동중학교를 다녔다. 상동은 광산촌으로 사방이 함백산, 백운산, 태백산으로 둘러쌓인 산촌이었고, 최수남은 어릴적부터 그 산들을 바라보며 자랐다. 그리고 상동에서 그의 영원한 산친구가 되었던 신휘걸, 박정성씨를 골목친구로 만났다.

 

58년 서울로 유학, 대광고등학교 재학 3년동안 줄곧 학교 기숙사인 인우학사에서 생활했으며, 그 곳에서 최완택씨를 만났다. 최완택씨의 아버님도 목사였기 때문에 두 사람 다 기독교집안이라는데서 공감대를 이루어 각별히 친해졌다. 그 후 이 두사람은 나르찌스와 골드문트식의 관계로, 외우(畏友)로 20년 지기의 정을 엮다가 최완택 목사는 친구의 장례를 주례하는 얄굳은 운명을 맞게 된다.

 

고등학교시절 그는 독서광이었다. 고교시절 최수남은 몰락한 지주계급의 후예로 사회주의에 대한 분노로 일었다. 그 분노는 사회주의 책을 섭렵하도록 만들었다. 그 방면과 사회학에 대해서는 고교생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전문분야까지 파고 들었으며, 집에서 보내준 용돈은 거의 책을 사는데 썼다. 그것이 소문이 나 주위의 대학생들이 책을 빌리려 그를 찿기도 하고, 사회주의 동조자로 오해를받아 조사를 받기도 했다. 4.19때 신설동의 바리케이트를 뚫고, 고교생인 단신으로 국회의사당앞까지 나아갔다가 남대문 구치소에 감금되었다. 민족사상주의를 꿈꾸었고 히틀러의 "나치투쟁"에 심취하기도 했다. 바다를 동경했으며 "요동반도와 만주벌판은 우리땅" 이라고 언제나 고구려의 기상을 애기했다.

 

육체적 정신적 성장기에 그와 최목사는 서로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최완택 목사는 이성적이고, 지적이고, 정적인 사람으로, 최수남은 감성적이고, 동적인 사람으로 성장해 갔다. 차후에  최수남이 산에서, 생활에서 어떤 좌절을 느낄 때마다  최완택 목사를 찿은 것으로 보아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이해를 짐작할 수 있다.

 

최목사는 역사학이나 신학을 하기로, 최수남은 해양대학을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당시의 김용석 역사선생님에게서 들은  "우리땅 요동반도와 만주벌판을 되찿자" 는 애기는 그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다. 이러한 개척자적인 정신에 육당의 한민족 해방국가론에 힘입어 그는 바다사나이를 꿈꾸다.

 

60년 고3 말에 당시 특차인 해양대학을 응시했었으나 떨어졌다. 필기, 면접시험도 못보고 신체검사에서 낙방했다. 표범처럼 날쌘 몸매로 운동이라면 만능이었지만 시력이 기준 이하인 0.8로 나빴다. 기숙사 생활에 그 운영자와 식사문제로 투쟁을 벌리는 바람에 눈이 나빠진 것이다. 그는  2년동안 기숙사 밥을 먹지 않고, 미수가루로 식사를 대신하거나  근처 시장에 가서 밥을 사 먹었다.

 

군인은 싫었지만 바다의 동경이 워낙 커 간유 한통을 며칠새 먹고, 해사에 지원했으나 신체검사에또 불합격 되었다. 당시 그의 좌절감은 말할 수 없이 컸다고 최목사는 회상한다. 아버님의 원에 따라 1차는 인하공대 광산학과에 원서를 내었으나 응시하지 않았다.

 

61년 3월 말까지 기숙사에 칩거하다가 상동으로 낙향했다. 그는 경기도 연천에서 강원도 상동까지 걸어갔다. 갓 스무살의 젊은이는 처음 느끼는 좌절감에 천리를 걷는 고행으로 자신을 달구었다. 무었을 생각했을까? 십 수일을 걸어간 그는  상동의 남동생 최수영씨에게  그의 서른 다섯 해의 삶을 통해 처음이자 마지막인 선물을 하나 했다. 잠수함 ! 그의 바다는 조그만 장난감 잠수함으로끝났다.

 

1년간 상동에서 묵으며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다. 울적하다고 답답하면 한 번씩 주위 백운산, 태백산, 함백산을 올랐다. 62년 다시 상경하여 한양대학 광산학과에 응시했는데 또 낙방하였고, 한대 초급대학교 요업과에 들어갔다. 62년에 열심히 공부하여 63년에는 광산학과로 편입하였다.그해 육군에 입대했다. 신산리에서 근무했는데 그 곳이 마침 최목사의 고향인 우연으로 두 사람 간의 교유는 계속되었다.

 

 65년 제대후 복학했으며, 66년 정월에 전가족이 서울로 이사했다. 69년 2월 학교를 마치고, 지하수개발공사에 입사했다. 그 후 직장을 옮긴 적이 없고, 그 직장생활에 충실했다. 능력도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암반지하수개발에 성공했다. 기자촌 일대의 굴착공사 때 강한 기반암을 만나 다들 포기하려들었으나 그는 끈질기게 밀어부쳐  단단한 바위돌밑에 깔린 지하수를 뿜어 올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문제의 땅굴을 찿아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최수남 가는 곳에 불가능은 없다" 는 소리를 들었다.

 

전기비저항탐사법에 의한 지하수개발에 있어서  이러한 성과들은 보이지 않는 것,  불확실한 으로 향한 그의 확신과 집념을 구체화 시켜준 듯하다. 그러한 확신은 산에서도 강하게 표출되었다. 마치 휴화산이 용암을 분출시킬 때처럼 . .  하지만 평소의 그는 지나치리만큼 과묵하고 융통성없이 직했다. 상사집에 인사를 가자고 부인이 졸라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스스로 할 일만 충실하면되지....."

 

그는 잦은 출장의 와중에서도 언제나 책을 읽었다. 마산원자력발전소 지하수개발때는 하도 책을봐서 불을 켜놓아 잠 못이루던 동료가 스탠드를 사주었다고 한다. 책을 들면 잠을 자지 않았다.그 즈음 손자병법과 성경을 탐독했다.

 

직장에서도 산사람으로 강하게 부각되었고, 또 인정해 주었다. 직장생활 중에 행한 여러 차례의 장기등반과 해외등반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특히 출장이 잦고,  지방공사현장의 책임자로 나가 일해야 하는 국영기업체의 직원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의 직장에서의 노력과  산에서의 집념은 짐작할 만하다. 후배들에게 " 직장을 가져라. 그렇치 않으면 산과 산악인을 욕먹이게 된다 " 고 애기해 왔으며, 머리를 많이 길르면 야단을 치기도 했다.  고등학교 다니는 산후배들이 공부를 등한시 하면 산에  다니지 말라고 꾸중하기도 . . .

 

71년 산에서 만난 안영남씨와 73년 결혼했다. 74년 아들 진혁이를 두었으며, 76년 2월 16일 그가 평소 50여회나 다녀갔던 설악산, 그 중에서도가장 좋아했던 설악골에서 눈사태로 묻혔다, 지금은 그 자리에 조그마한 비석이 하나 서 있으며 무덤은 금촌 기독교 묘지에 있다. 관속에는 성경과 찬송가만 넣어 주었다.      


그 해산 기한이 찬 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자는 붉고 전신이  깆옷같아서 이름을 애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애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발꿈치를잡았다는 뜻)이라 하였으며, 리브라가 그들을 낳았을 때의 이삭이 육십세이었더라. 그 아이들이 장성하메  에서는 익숙한 사냥인 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라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붉음이란 뜻)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개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 .   < 창세기 제35장 24절에서 33절까지 >

 

1976년 2월20일... 형의 장례를 치르고 팥죽을 먹던 동생 최수영씨는 울먹이며 되뇌이었다. . . "결국 여기서 형을 사는구나"  최수남은 평소에 창세기의 에서와 야곱애기를 동생에게 자주 했다. 에서가 들사람으로 동생에게장자를 팔 형으로 운명지어졌듯이 산사람으로 동생에게 형의 자리를 넘길 운명을 예감했을까.

 

묘한 것은 운명이요, 인연이고, 또 인간의 집념이다 그 운명의 멍에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집념은또 다른 운명이 되고, 그 집념과 운명은 묘한 인연으로 묶이어 한 사람의 인생을 엮는다.


겨우 지나칠 정도의 좁은 산길을 걸었습니다. 왜 이 길을 가고 있는지 잊고 있었습니다. 발길이 닿은 곳은 설악골의 베이스 캠프, 군데군데 세워진 야전텐트 옆 나무엔 말없이 돌아와 놓인 임자없는 베낭. . . . 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하얀눈, 하얀산에 말없이 돌아와 차디찬 눈위에 눈성을 쌓고 누운 그토록 고집스러웠던 산사나이 당신은 너무도 외롭고 쓸쓸해 보였습니다."  설악산에서 운구하던 날 . . . 당신을 사랑하던 산사나이들은 캠프송을 부르며 울며 따라 갔습니다. 오직 산나이들의 의리로 그들의 손에 의해 그는 늘 즐겨찿던 하얀산을  말없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한번도 자기변명하지 않고 하얀산을 찿던 그는 우리의 최고 알피니스트, 산사람이었다.  

 

 

 

그는 한국 에베레스트원정대의 선봉장이었다. 山정신, 山에 관한 지식, 능력, 카리스마적인 리더쉽 등 어느 면에서나 최고의 산악인이었다. 71년부터 76년까지의 모든 훈련, 준비과정을 리드해왔다. 그의 체력, 능력, 성격을 봐서 76년 조난 당하지 않았다면 그가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섰을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누구나 애기한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죽은 몸으로 그 곳에 묻힐 것을.....

1977년 9월15일 고상돈은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서자 바로 그의 사진을 꺼내 눈속에 묻고 고개숙여 묵념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고상돈마저 산에서 질 것을....

 

산사람이여! 산사람 최수남이여!  그의 산사람으로서의 운명은 일찍 지워졌다.

 

산투성이인 상동으로 들어가면서부터 산소년이었다. 체계를 갗춘 산행은 61년 바다로의 꿈이 좌절되면서 시작되었다. 천리길을 걸어 낙향하며 그는 내땅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했고 모든 것을 제쳐 놓은 상태에서 올라 보았던 태백, 함백, 백운산은 그에게 새로운 열정의 대상으로 결정되었다.

 

62년 서울에서 고향친구인 신휘걸, 박정성과 재회를 가졌다. 그들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 산악부원이었다.  그들이 묵고 있던 성동의 바울학사를 드나들며 그들과 산행을 시작했다.         

 

63년에 입대하면서 일단 산행은 중지 되었으나  휴가만 오면 혼자서 산에 가기도 했다.그때만 해도 자일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는데 그는 용하게도 하나 구해 사용했다. 제대 후에 박정성씨와 산행을 했으며 이때부터 산악계에 실력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57년 창립되어 당시의 우리 산악게에 큰 역활을 해오던 하켄클럽의 명노천씨와도 교분이 두터워졌다. 이때쯤 최완택 목사도 최수남을 따라 몇 번 산에 갔으며, 최목사도 나름대로 산을 익혔다.가족들도 전부 산을 좋아했다. 66년 서울로 이사하기 전 상동을 떠나는 기념 전가족 적설기 태백산행을 할 정도였다. 최목사도 끼인 가족등반대는 태백산, 함백산, 백운산을 2박3일에 종주했다.

 

서울로 이사한 66년부터 최수남은 산에 완전히 미쳐갔다.이 무렵 친구 2명과 전국일주 도보여행을 한 적이 있다. 친구들은 10일만에 발이 터지고, 지쳐 돌아왔으나 그는 혼자서 31일동안 전국일주를 마쳤다. 산에 미친 악귀였다. 그래서 친구들은 광산(狂山)이라 했다.

 

66년 대한산악연맹 창설로 산악계에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될 때이다. 그해 신휘걸, 박정성씨와 더불어 설령회라는 산악회를 만들었다. 이숭녕박사를 회장으로 모셨다. 설령회가 산을 사랑하는 고운 모임이기는 했지만 그가 몸담기에는 너무 좁은 도랑이었다.

 

그는 하얀산과 알피니스트를 꿈꾼다. 그래서 67년 하켄클럽이라는 격류에 몸을 담는다. 그것은 당시 하켄클럽의 총무였던 명노천씨의 영향이 컸다. 하켄클럽은 상하 위계질서가 뚜렸한 수직조직의 강력한 팀이었다. 최수남은 그 하켄클럽을 리드하며 산행활동을 폈다.

 

두 사람은 음악을 좋아해 더욱 친해졌다. 최수남은 명창이었고,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다. 독일군가 중 일부가 독일민요를 편곡한 매우 아름다운 곡이라고 생각한 명씨는 여러 독일군가를 알아내었다. 최수남이 독일군가를 특히 좋아했다. 18번은 독일군가였다. 그것은 그 음악성보다도그 선동적인 힘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독일군가를,"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내 주여 뜻대로 임하소서" " Ich hat eine kamerade..."

 

70년 마라도에서 출발하여 향로봉까지 국토종주 삼천리를 마쳤고, 71년에는 로체 샤르(8383m) 등반대에 참가했다. 그때 그는 셀파 상계와 둘이서 무산소로 8100m까지 진출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8000m를 첫 돌파한 신기록이었다. 대원들중의 한명은 고산병으로 의식불명에 빠짐으로 등반대가 만신창이 되었는데 정상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최수남씨 개인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히말라야원정의 여명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그가 로체 사르에서 보여준 과감한 산행활동은 국내 산악계에 에베레스트에 대한 자신감과 가능성을 심어 주었다. 로체 샤르에서 돌아오며, 75년 프레몬순기 에베레스트 입산신청을 내었다. 그때부터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원정사업은 불이 당겨졌다. 이후로 그는 우리 산악계에 최고의 정통산악인으로 공인 받았다.

 

74년 1~2월에는 지리산 칠선게곡에서 가진 에베레스트 제1차 동게훈련에 그는 트레이너 역활을 성실히 해내었다. 이즈음 에베레스트 원정은 77년으로 연기되었다. 75년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실시한 2차 등반훈련에도 트레이너로 참가했다. 75년 8월에는 에베레스트 제1차 정찰대장으로 다시 히말라야를 밟았다. 이때 아일랜드 피크(6189m)를 등정했고, 푸모리를 시등 하요6200m까지 진출했다. 아마랍챠(7100m)를 정찰했으며, 에베레스트 쿰부빙하 마의 아이스 폴지대를 통과하여 전진캠프 예정지까지 도달했다.

 

이 때 아이스 폴을 통과한 것은 그의 최대 업적 중의 하나로 꼽힌다. 왜냐하면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아이스 폴지대 통과가 최대의 난관이기 때문이다. 이 성공적인 정찰등반은 우리 산악계에 에베레스트 성공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었다. 76년 2월 설악골 일대에서 가진 에베레스트 제3차 훈련에 그는 다시 트레이너로 참가했다. 어디엔가 있을 못내 그리운 노루목  산사람의 넋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한 지 48시간후에 또 다른 그리운 넋으로 설악에서 타오르고 말았다.


崔씨에다 옥니에 곱슬머리였다. 마른 얼굴과 몸매에 171cm의 작은 체구였다. 양쪽에 덧니가 나 별명이 도깨비였다. 산자락 자락마다 숨어 있는 넋들이 그리워 하나의 도깨비가 되어 삼천리 내 강토와 히말라야의 8000m를 헤메었던가.  

 

군주둔부대 근처에 야영이라도 할라치면 그는 군부대장과 내기를 했다. 어느 쪽이 기가 더 센가를... 얼음 깨고, 물속에 들어가 오래 있기..., 그의 후배 산사나이들은 져본 적이 없다.

 

73년 신혼여행서도 산, 한라산으로 갔다. 결혼 전도, 후도 그는 사랑 따위를 입에 올린 적이 없다. 신혼여행 사진에 손 잡고 찍은 사진 한 장 없다. 결혼 초기 산에 다니는 것을 말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림없는 것이었다. 그는 가끔 "왜 내가 산에 가는 것을 불평하지 않느냐" 고 되물었다. 그는 분명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집에 있을 때는 언제나 책을 보고 있었다. 결혼할 때 부인에게 비결을 하나 가르쳐 주었다. "만약 내가 화를 낼 때 음악을 틀어 달라" 고...

 

산은 어머니같다 했다. 지극한 효자였다. 부모보다 일찍 죽는 효자가 어디 있느냐 하면 할 말 없다. 하지만 그는 죽으러 간 것이 아니라 삶을 뜨겁게 사랑하러 간 것이다. 그는 어머니와는 애기를 잘하였다. 4.19때 남대문구치소에 잡혔을 때 어머님께 몰래 보낸 편지는 그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두주불사 술꾼이었다. 동계등반을 마치는 날 각자 신고있던 등산화(그 때는 생선장수들이 신는왕방울이라 부르는 고무장화)를 벗어 그 속에 막걸리를 붓고, 입 한 번 떼지 않고 들이키게 했다. 매일  술이었고, 술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와 잤다.  밤 늦게 친구가 왔을 때 집사람이 조금이라도 언짢은 눈치를 보이면 다음날 야단났다. 

 

부인보다 친구와 후배, 그리고 술을  더 좋아했다. 결혼 100일날 그는 조금 일찍 귀가했다. 빈 손목을 보이며 "결혼시계를 소매치기 당했어" 했다. 알고보니 그것도 시계를 잡혀 후배 술을 사준 것이었다. 마지막 산행인 에베레스트 원정  제3차 설악산 동계훈련을 마치는 날 밤도 그는 부인과 다투고 친구와 잤다. 부인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애기는 20년동안 사귄 친구의 우정이 당신 보다 더 좋다 라는 것이었다

 

양복 한 벌 제대로 없었다. 에베레스트 정찰 갈 때 한 벌 해 입히려고 했으나 양복점 앞에서 그는 돌아서고 말았다. " 이렇게 비싼 걸, 넌 정신이 틀렸어 " 횡하니 가버렸다. 그는 기성복 한 벌 뿐이었다. 그래도 동생들 대학공부까지 시켰다. 동생 수영씨에게 네가 장남으로 남을 수 있다고 늘 애기 했지만 평소 장남구실을 피하거나 못한 적은 없다.

 

그는 아무 말도 누구탓도 할 줄 몰라 바보같은 사나이라고 하면 두 덧니를 내보이며 웃었다. 그가 에베레스트 원정을 앞두고 친구의 의리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것을 양보하겠다고 술취해서 울먹이기도 했다.

 

두 번의 원정으로 갖게 된 외제 장비를 그는 혼자서만 쓰지 않았다. 피켈도 후배 빌려 줘 부러졌고 블란스제 드메종 우모복도 하도 빌려줘서 성한 곳 하나 없었다. 제1차 에베레스트 지리산 동계훈련 때 그는 k사에서 지원해 준 카시미르 하나로 열흘을 보내 김영도회장을 놀라게 했다. 다른 사람들은 외제 우모복으로도 춥다고 난리였는데, 한 번도 신지않은 외제등산화도 그는 서슴없이 빌려주었다. 그러한 것에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영혼이 트인 사람이었다.

 

75년 그가 에베레스트 1차 정찰대를 이끌었을 때 그 정찰대는 네팔주재 한국대사관과 교민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사관에는 입국인사, 하산인사 할 때만 들르고, 행정 일체의 일거리를 대원들이 직접하게 했다.  그리고 교민 초대에는 한 번만 응했다. 이 모두가 최대장 성격의 결백성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 팀은 그동안 그 곳 주민의 " 한국등반대는 구걸팀" 이라는 인상을 벗겼다.

 

네팔까지 가는 도중 최대장은 대원들에게 영수증을 나눠주고, 택시 탈 때도 운전기사에게 사인을 받아 오게 한 것은 그의 고지식하고 고집스런 성격을 잘 말해 준다.  그것 때문에 대원들이 괴롭기도 했다. 그 영수증은 산악연맹에 보관되어 있다.

 

에베레스트1차 원정대장으로 히말라야를 다녀올 때 외아들과 부인에게 선물 하나 사오지 않았다. 어느 누구의 선물도 없었다. 그는 에델바이스 몇 포기만  갖고왔다.   경비 중 1000불이 남았다며 부인더러 산악연맹에 갔다주라 했다. 이러한 근검 절약 때문에 히말라야 등반사상 유례없이 등반경비가 1000불이나 남았다. 네팔에는 암거래시장이 많았지만 그는 일체의 돈을 공정환율로 은행에서 바꾸었다.

 

그는 正道만을 행했다. 산행에서도 그는 언제나 정통! 오소독스를 외쳤다. 정통파였다.

 

그 때 집으로 엽서 한 장을 보냈다." 진혁이 잘 키워라, 잘 있다. " 는 간단한 내용으로  돌아올 때 아들 장난감 하나 사탕 한 알 사오지 않았다. 베낭에 빨래거리만 잔뜩...  그리고 에델바이스 몇 포기만.....

 

그래도 그녀는 "그이는 진혁이의 좋은 아빠였으며, 또한 좋은 남편이었습니다. 청빈과 고집으로뭉쳐진 의리있고, 정직하며, 검소한 그리고 훌륭한 등산가였슴에 틀림 없었습니다." 라고  굳게 믿고 있다. 3년간 소복을 하고, 매년 2월 10일이면 금촌의 묘를 찿던 미망인 안영남씨는 81년 4월 12일 진혁군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그는 핏발선 눈망울로 산을 올랐다. 목마른 용기로 로체 샤르의 흰산을 올랐다. 하늘마저 지쳐 끝난 고원을 가숨이 끓어지도록 밀어붙여 8000m의 위!  그 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는 8000m의 아래로 돌아오며, 왜 취하지 않고는 못배겼을까!  8000m의 上과 下,  그 이상과 현실, 자유와 책임, 진리와 사랑의 괴리를 온몸으로 몸부림쳐 울던 쓸쓸한 한 마리의  산짐승, 우리의 산사람 최수남은 설악의 온 산능성이가 눈보라로 빛나던 그 날 우리를 떠났다.

 

그는 언제나 하얀산을 애기했다. 로체 샤르에서, 아일랜드 피크를 오르며 , 아이스폴의 얼음강을 건너며, "하얀산"을 보아왔고 결국 설악이 온통 하얀산으로 변했을 때 그 곳에 묻혔다. 8000m의 위, 그것은 바로 하얀산으로 표현되는 이상향이요 자유로운 권리이다.  8000m 아래 그것은 현실이요 구속이요 게임이다. 그것은 살아가는데 둘 다 필요하지만 서로 모순이 되어 조화를 이루기 힘들다. 그래서 인생살이는 수월치 않다.  눈 덮힌 산에서 세상으로 돌아오면 알 수 없이 붙어다니는 공허함과 소외감,  높은 산으로 갔을 때 부인하면서도 발길에 채이는 행복감과 도피의식 그것 때문이다.

 

우리시대를 온몸으로 뜨겁게 밀어 부치며 살았던 산사람 최수남은 8000m 상하의 갭을 슬픔으로 통곡했고, 그것을 메우고 건너고자 평생 산으로 헤메었다. 로체 샤르에서 눈잎에 보이는 하얀산을 잡지 못했다. 그에게는 자일이 없었다. 자일 ! 그것은 연결의 상징이다. 그 자일이 부족했다는 것은 연결성 부족을 애기한다. 때로 언어가 자일의 역활을 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부인한다. 그리고 그것을 고민한다. 가정과 직장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그는 아들로, 아빠로 좋은 사람이었고 능력있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연결성 없음을 번민한다.

 

그것은 술취해 산에서 내려오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는 고독한 그러나 트인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진리를 안 이상,  사랑을 현실이라 불러 본다면  우리는 누구나 이상과 현실을 방황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대게 나이가 들면서  이상에서 현실 즉  진리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며, 진리를 포기한다. 또 그것 때문에 세상의 대부분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진리에 대한 향수, 영원에 대한 열망은 무의미하지 않아 의식의 바닥에 넓게 깔려 여차하면 바람이 불면 고개를 든다. 그것이  산사람에게는 하얀산이다.  

 

산사람의 경우 산행생활에서 그 진리의  얼굴을 보게되고, 그것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본능적이고, 가장 순수한 생명의 힘을 얻게 된다. 알피니스트, 산사람의 가장 긍정적인 답은 바로 일상에 쓰러지지 않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얻는다.

 

따라서 아직 직업화될 수없는, 아니 되어서는 안되고, 생활을 무시하지 않아야 하는 우리나라의 산사람이 가장 이상적인 산행을 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직업이 되어 버리면 그것은 이미 현실로 변해 버리기 때문이요,  상황밖에 없는 산이 된다.  그러한 면에서 한 번도 자기변명하지 않고, 하얀산을 찿던 최수남은 우리의 최고 알피니스트, 산사람이었다.    

 

1982. 2.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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