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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산사람들~

라인홀트 메스너

by 마루금 2007. 11. 30.

히말리야의 8천m 자이안트급 14좌를 세계 최초로 오른 사나이다. 1970년 6월에 레이스를 시작, 1986년 10월16일에 모두 완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세기의 철인으로 일반인에게는 칭송을 받았던 한편, 일부 산악인들로 부터는 비난 받기도 했던 이탈리아의 등산가 '라인홀트 메스너' (당시 나이 42세)는 로체(8,516m)를 마지막으로 올라 사상 최초로 8,000m급 14좌 거봉을 모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14개 자이안트 봉우리 중에서 세계 제4위와 5위인 로체(8,516m)와 마칼루(8,463m)의 두 봉우리를 제외한 12개 봉을 오른 기록으로'8,000m급 등정 레이스'에서 폴란드의 '쿠쿠츠카'(당시 37세, 10개봉 등정), 서독의 '미하엘'(당시 52세, 8개봉 등정), 스위스의 '에르하르트'(당시 27세, 7개봉 등정)의 추격을 받고 있던 메스너가 결승점에 제일 먼저 선착한 것이다.

 

14개 자이안트 중에서 1985년도 까지 등정을 거부하며, 메스너의 애를 태웠던 마칼루는 1986년 9월27일에 등정을 허락했다. 메스너는 마칼루의 등정을 자신감으로 삼아 마지막 남았던 로체에도 도전, 파트너 '조안 커머랜드'와 함께 1986년 10월16일 오후1시 45분 세계 제4위의 고봉 로체에 우뚝 섬으로서 히말라야의 모든 자이안트를 순례해 온 등산 인생의 최정점을 맞았다.             
       
메스너의 등정 레이스는 1970년 6월 낭가파르밧 원정에서 스타트를 끊었다. 그
때 메스너는 동생 '귄터 메스너'와 함께 표고차 4,500m나 되는 루팔벽을 뚫고, 무산소로 낭가파르밧 정상에 올랐다. 하산 루트로 등정루트의 반대편인 디아미르벽을 택하여 사상 최초의 자이안트급 횡단등반을 기록했으나, 하산 도중 메스너는 동생을 잃는 비운을 맞았다.

 

낭가파르밧 등정 이후, 그는 무산소 8,000m급 등반에 심혈을 기울였다. 따라서 자이안트급 무산소 초등은 거의 메스너에 의해 기록되었다. 마나슬루(8,163m /1972년), 가셔브룸1봉(8,68m /1975년), 초오유(8,201m /1976년), 다울라기리1봉(8,167m /1977년) 등이 산소도 없이 덤벼들었던 이 야심만만한 산사나이게 정상을 내놓았던 것이다.한 두명의 등반대원으로 산소 없이 8,000m의 웅자에 도전하는 그의 등반스타일은 그후 히말라야의 등반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계기를 만들었고, 그는 그 선두주자의 자리를 굳혔다.             

 

무산소등반에 대한 메스너의 의욕은 지구의 용마루인 에베레스트에도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반은 1920년대 에레스트 도전이 개시된 이래 반세기에 걸친 세계 산악계의 최대 이슈였다. 고산의학계의 '불가능'이라는 진단으로 그의 도전 정신을 극하여, 1978년 동료 '피터 하벨러'와의 2인조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반대를 꾸리게 했다.

 

그해 1978년 5월 8일은 고산의학계가 메스너와 하벨러에 의해 코가 납작해진 날이기도 하다. 두 철인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하얀 선을 넘어 지구의 최고봉 꼭대기에 올랐다가 생환한 것이다. 1953년 힐러리와 텐징의 에베스트 초등에 필적할만한 쾌거로  세계등반사에 기록된 이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으로 메스너는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고, 8,000m 레이스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사회적으로도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다. 

 

1978년에는 동생을 앗아갔던 낭가파르밧의 다아미르벽을 단독으로 초등했고, 이어 1979년 K2봉 무산소 등정에도 성공하여 메스너의8,000m 레이스 완주는 단지 시간문제로 간주되었다. 1980년 8월에는 자신의 두 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이자 단독 초등이라는 대위업을 세웠다. 그는 이 해 티베트의 타자에 설치된 베이스 캠프에 애인인 캐나다의 '리나 리치'양을 남겨두고, 혼자서 에베레스트 북면에 도전하여 3일만에 단독등정 했었다.

 

8,000m를 향한 그의 집념의 레이스는  1982년 5월  세계 제3위봉 칸첸중가(8,586m)의 관문을 통과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카라코롬의 브로드피크(8,047m)와 가셔브룸2봉(8,035m)을 연등하여 골인지점으로 향해 스퍼트 하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힘있게 뻗어 나가던그의 최종 스퍼트는 마칼루와 로체라는 마지막 고비를 남겨두고 번번히 제동이 걸렸다. 1983년 이후 여러차례 마지막 남은 두 자이안트에 도전했으나 거푸 실패를 했다. 영웅적인 초인들, 대개 그 생애의 마지막에 대두 되었던 운명적 함정이 마칼루와 로체라는 이름으로 메스너의 생애를 가로막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마저 일축하며, 드디어 1986년 10월16일에 메스너는 과거 16년동안 달려온 알피니즘 사상 최초의 레이스를 '인간승리'란 이름으로 완주한 것이다.                                                   

 

지구의 용마루를 연결한 메스너의 레이스에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되었던 것은 그가 출중한 등반역량 못지않게 뛰어난 표현력과 사고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도 풀이된다. 산악문학작가 또는 철저한 극기정신과 사색으로 전인간적인 알피니스트를 열망한 알피니즘의 구도자로 불려진만큼 메스너는 그 방면의 뛰어난 저술가이다. 자신의 등반경험을 토대로 20여 권의 저작을 남겼으며, 1968년과 1975년, 1976년에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산악문학상'을 수상하기도했다. 그의 저서 중에서 제7급, 도전, 검은고독 흰고독, 죽음의 지대, 등은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출판되었을 만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산악저술가이다.

 

1944년 이탈리아의 돌로미테(남부 티롤)의 휠뇌스마을에서  9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교장이며 등산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청소년 때부터 등산가로 활약했다. 1960년대 후반기에는 알프스에서 500여 개의 전문루트를 등반하였고, 파투아대학의 공학도였던 1970년 낭가파르밧 원정에 참가하며 학업을 중단했다. 그 후 고향에서 일시적으로 교직에 몸담은 적도 있었으며, 1982년부터는'토니 히벨러'가 주간으로 있던  산악지 '알피니무스'(Alpinimus)를 인수하여  '알핀'(Alpin)으로 제호를 바꾸어 자신이 발행하였다. 14좌 완등 후 고향에서 등산학교를 설립해 운영을 하기도했으며, 서적출판, 강연 등의 활동으로 바쁘게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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