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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암벽상식

우리나라 암벽등반의 효시는?

by 마루금 2022. 9. 8.

 

 

인수봉 한국인 초등자는 누구였을까 ?

우리나라 산악운동의 중심 무대가 된 인수봉을 처음 오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기록과 구전이 전해오고 있으나  아직도 명확히 규명된 것은 없다. 이 의문은 반세기 이상을 두고 논란만 거듭해 왔을뿐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전까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던 속설은 1926년 5월, 당시 경성주재 영국 총영사관 부영사였던 아처(C.H.Archer/ 영국 알파인클럽 회원)가  일본인 하야시(林戊)와 함께  현재 서북면 C코스 부근으로 올랐다는 것이다. 비록 하야시라는 인물의 자의적 회상에 불과한 주장이었지만, 이러한 주장은 한동안 여과없이 받아들여져 1976년에는 우정산악회 주최로 인수봉 초등 50년제라는 심포지엄이 열렸을 만큼 정설로 굳어져 왔다. 그 후 이러한 사실이 제대로 밝혀진 것은 1995년 발견된 아처 자신의 보고서 <Some Climbs in Japan and Korea]를 통해서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아처는 1922년부터 인수봉에 오르기 위하여 꾸준히 연구해왔으며, 결국 1929년 10월에 북서면(인수C코스로 추정)을 통한 정상 등정에 성공하는데, 이때 하야시라는 인물과는 동행한 바 없고, 아처 자신과 일본인 아마나가, 그리고 페이시와 함께 자신이 초등했다는 기록을 유리병 속에 넣어 인수봉 정상에 남겼다면서, 사진까지 첨부된 당시의 상세한 등반 기록을 수 년이 지난 후 1936년에 영국 알파인클럽에 제출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다녀갔다고 적은 카드를 유리병 속에 넣어 꼭대기에 남겼는데, 이후 일본인 이이야마와 임무(林茂)가 이것을 꺼내 보았다고 한다. 인수봉 초등을 한 아처는 그 후 자연동굴(고독의길로 추정)을 통해  인수봉 정상으로 가는 길을 찾아내기도 했다. 어찌됐건 현재의 정설은 인수봉의 공식적인 초등자가 1929년의 영국인 아처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아처 이전에는 아무도 인수봉에 오른 사람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아처 자신의 보고서를 봐도 언젠가 백운대에 올라 인수봉 쪽을 바라보니 그 정상에 올라가 있는 사람을 목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비공식적인 등정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는 과연 어떤 목적으로 인수봉에 올랐을까? 구한말의 법무대신이었던 신기선(1851-1909)이 남긴 <유북한기>를 보면 영남사람 김씨가 1898년경에 인수봉에 올랐다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공식적으로 확인 할 수는 없어 전설의 영역에 속하는 이야기이다. 1924년부터 인수봉 밑자락의 굴바위에서 생활했다는 이해문 노인의 증언도 흥미롭다. 그가 처음 왔을 때부터 이미 인수봉 정상에는 사람이 쌓아놓은 돌답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도 인수봉 남측 여정길 부근에 남아있는 선각 마애불의 존재 및 고독의 길에서 발견되는 질그릇 파편들과 더불어 아처의 공식적인 초등 이전에도 누군가에 의해 종교적인 목적의 등반이 행해졌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다만 그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공인 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기록으로 남아있는 한국인 초등자는 누구였을까?                    

 

 

금강산 바로봉 登岩圖와 아처의 만장봉 기록

아래의 내용은 '월간 산' 87년 1월호에 실렸던 글이며, 필자는 손경석씨로서 당시 한국산서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암벽등반의 효시에 대해 현재까지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바, 과거의 자료를 참고, 비교해서 현재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가 있을 것이다.

 

 

 

한국암벽등반의 효시는 언제인가?

우리 조상들의 산악관의 뿌리가 되는 산은 여러 곳에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관동지방의명산에서 도원향(桃源鄕)을 찿으려던 심정이 역력하다. 도원향에서의 추구는 종종 시가(詩歌)로 영탄되면서 한국의 산수에 필연적인 희열을 느끼고 노래 불렀다. 중국 도연명(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 조선조  선비들의 산수기는 한국의 산천을  바로 도원향으로 삼고 이를 구현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말하는 근대등산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18세기 말엽의 등암도(登岩圖)

그 누군가가 '유럽의 근대화는 과학기술의 개발과 등반에서 비롯됐다'고 갈파했었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1774년)과 카트라이트의 역직기 개발(1786년), 그리고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 초등정(1786년 8월7일)은 같은 시기의 쾌거였다. 하나는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고, 또 하나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탐험과 자연규명의 계기가 되면서 유럽의 근대화가 개화됐다. 과학기술이나 등산도 인간의 데모니액한(demoniac: 마귀들린) 활동의 양극을 대표하는 까닦이다.

 

 

에밀레박물관에 금강산 비로봉 암벽을 밧줄로 오르는 민화가 있었다. 이 민화는 18세기말엽의 그림으로 감정되고 있다. 이것이 등산도라면 몽블랑의 초등과 같은 시대가 되고우리나라 근대등반의 분명한 예명적 효시가 아닐까 싶다. 어떤 일본인이 이 그림을 보고 함경남도, 강원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이버섯 채취 그림이 아니냐고 한 것은 잘못된 견해다.  왜냐하면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산 위에  먼저 올라가 있는 사람과 술병과 안주가 있는 것을 보아  버섯을 따는생업을 위한 등산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일행 중에 벼랑을 내려다보는 사람의 모습이라든가 바위 아래서 흥겹게 유람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또한,  밧줄에 매듭을 지어 미끄러지는 것을 방비한 것이라든지 나무뿌리에 줄을 확보해 놓고 연속등반 하는 모습, 여러 사람이 모여 마치 차례를 기다리는듯한 인상은 틀림없이 근대등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암벽등반의 모습이다. 더구나 장소가 이상향인 도원향으로 알고 있는 금강산의 비로봉인데, 아무리 한들 석이버섯을 딸까? 일가견이 있다는 그 일본인의 그릇된 해석은 부정되어야 한다. 금강산은 한국인에게 있어 이상향의 표본이다. 그 이상향에서의 암벽등반을 클라이머들도 꿈꾸고 있는 것이다. 18세기에 벌써 그런 등반이 이뤄졌다면 우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근대등반의 효시는 암벽등반

대체로 우리나라 등산사에서나 외국의 경우이거나 초기의 예명, 개척, 황금시대를 거치는 등산사 분류에서 암벽등반의 효시가 근대등산운동의 원점이 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근대등반이 비롯됐다고 할 수 있을까? 1986년1월, 출판인산악회(당시 회장 허창성)에서 주최한 '산악도서전'에 5,000여 점의 국내외 각종 산악도서와 자료가 전시돼 주목을 끌었다. 그 중에서도 규장각 소장의 조선시대의 산악기행서와 알려지지 않았던 광복 이전의 기록들이 전시되어 우리나라 등산사에 있어 큰 서광을 비쳤다. 특히 1927년 한국인 박석인의 유럽 알프스의 몰블랑등산기(별건곤 1928년 9월호)를 비롯해서, 영국인산악회의 <알파인저널>에 실린 1925~1930년간의 서울근교 암벽등반기 등이 확실히 중요한 자료였다. 이 기회에 새로이 발견된 귀중한 자료에 의한 등산사 재조명을 시도하면서 과연 우리나라 암벽등반의 효시와 근대 등산의 정립 초기는 언제인가를 새롭게 규명해 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북한산 인수봉 암벽 초등정은 임무(林戊)와 아처(C.H.Archer. 당시 영국 부영사)에 의해 1926년 5월에 이룩된 기록으로 거의 굳어져 가고 있다. 당시 한국에 와 있던 일본인 고전클라이머였던 이야마(飯山達雄)의 저서 <나의 베거본드 2만Km>에도 기록돼 있고, 이즈미(당시 경성대학산악부 리더)의 저서 <먼 산들>이란 등산 회고록에도 기술되어 있다. 특히 이야마는 인수봉을 그해 2등 하면서 아처와 임무가 인수봉 정상에 남겨 놓은 명함과 초등일시 메모를 확인했음을 밝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김정태씨(당시 한국산악회 고문)는 아처의 기록<편집자주 : 1931년판 Alpine Journal>을 '월간 산'에 발표하면서 인수봉 초등 이전의 도봉산 만장봉 초등(편집자주:  김정태씨는 1925년 4월로 추정)을 우리나라 암벽등반의  효시로 보고 있다. (편집자주: 월간 산 83년 3월호 참조)  그런데 필자의 의견은 '1925'라는 연도가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아처의 만장봉과 오봉의 기록

아처 자신이 쓴 영국산악회의 1931년도 <알파인저널>의 기사를 먼저 옮긴다. 한국은 산악국이지만 아시아인들의 통념으로 높이에는 관심이 적다. 가장 높은 산이 백두산이고, 1886년에 영 허즈번드 일행이 만주쪽으로 올라간 기록이 있다. (필자주: 이 이전에 이미 한국인의 초등 기록과 만주쪽의 중국인 기록이 있다) 산높이는 이 산에 미치지 않으나 좋은 암벽의 산들이 많고, 등반에도 어려움이 수반한다. 하나 이제 겨우 이런 암봉이 산악인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가장 수려하고 유명한 금강산도 한일산악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으나 대부분 유람등산에 불과하다. 집선봉 암벽은 등반상의 기술적 문제가 필요하다. 비단 이곳뿐 아니라 서을 근교의 암봉은 집선봉에 비견될 북한산, 도봉산 암벽들이 있고, 최고봉인 백운대에는 바위를 깎아 계단을 만들었고, 철책까지 완성되어 있다. 인수봉은 '콜롬보스의 계란'처럼 생겼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난공불락으로 알고 있었다. 만경대는 날카로운 톱니모양의 3개의 암봉이 있으나 그 중 2개는 미등인 채 남아 있다. 도봉산의 만장봉은 등반이 어렵게 보였고, 북한, 도봉 사이의 오봉은 전혀 등반되지 않고 있다고 알고있다. 이들 암봉은 남면이 어렵고, 북면이 비교적 쉬운 루트를 제공해 주고, 드문드문 자란 나무들이 확보지점 역활을 한다. 때때로 아이스 액스(피켈)가 홀드를 잡아주는 역활도 하지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특히 크랙과 크랙 사이를 횡단할 때도 15피트(약 4.5m)의 대나무 끝에 쇠갈고리를 달고 자일과 연결해서 간간이 있는 나무에 걸어 잡고 올라 갈 수 있다. 이것이 어쩌면 스포츠맨답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겠지만, 어려운 암벽을 오를 때 필요한 장비는 무엇이든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문제는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하는데 큰 뜻이 있다. 또한 이것은 새로운 고안이 아니다. 일본인 마쓰가다(松方三浪)가 아이거와 마터호른 훼른리 등을 오를 때에는 5m반짜리 긴 장대를 사용한 바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윔퍼의 유명한 알프스 등반기 5장에 보면 '단독등반은 올라갈 때보다 하산할 때 더욱 위험하다'는 기록과 함께 두 가지 기구를 고안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나는 이 기구를 사용해서 만장봉 남벽 300피트(90m) 벼랑의 침니코스를 올랐다. 주일영국대사관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등산가인 메크리(H.A.MacRae)가 지난 4월에 한국에 온 김에 일본인 2명과 함께 등반한 것이다. 1시간 45분이 소요됐고, 이 루트는 만장봉 암벽코스 중 가장 쉬운 코스일 것이다. 6개월 후 메크리가 다시 한국에 와서 이번에는 북면을 시도했다. 이곳은 약 900피트(270m)의 암벽이고, 하단부는 절벽에 가깝다. 우리는 이것을 만장봉 북면코스라 불렀다. (중략) 이 코스는 7시간이나 걸렸다. 그러나 점심휴식과 촬영시간을 빼면 3시간 소요된 셈이다. 오봉은 북한산이나 도봉산 암벽보다 접근이 어렵다. 내가 오봉에 관심을 가진 것은 만장봉 북면 등반 때였다. 특히 C봉(3봉을 뜻함)의 북면 침니코스는 처음에는 시간이 없어 포기했다. 그후 만장봉 등정 후에 메크리와 함께 또 찿았다. C봉은 포기했기 때문에 E봉(5봉)을 메크리가 톱으로 침니를 올라 정상에 섰다. D봉(4봉)과 E봉 사이 안부로 내려와서 D봉을 공격했다. (중략) 결국 시간이 늦어 다음날 D봉을 다시 찿았다. 이번에는 C봉과 D봉 안부에서 루트를 찿았으나 실패, D봉과 E봉 사이로 다시 가서 대나무 장대를 사용해 보았으나 50피트(약 15m)를 남기고 역시 실패했다. A,B,C봉만을 오른 뒤 하산했다. 메크리는 휴가가 끝나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후 쇠갈고리와 대나무 장대 등을 이용해 D봉을 올랐고, 하강할 때는 이중으로 자일을 사용했다.(중략)

 

한국에서의 암벽등반이나 등산을 4월에서 6월사이와 9월에서 10월사이가 가장 적기이다. 겨울에는 춥고 암벽이 매끄럽고 얼어서 북면은 불가능하다. 한국에서 파트너를 얻기가 아주 어려운데 하야시(林茂인듯)라는 일본인(한일 혼혈)은 내가 그를 만나기 전에도 어떤 봉을 개척등반한 바 있는 능력있고, 첨예적인 클라이머이다. 나는 일본에 7년, 한국에 2년 있었지만 일본의 산은 높지만 한국의 산은 새로운 초등반의 진지한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고 단언한다. 많은 공백부와 초등되지 않은 산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을 말해 두고자 한다.

 

 

 

 

연도가 불분명한 아처의 기록

이상은 아처의 기록 중 우리의 관심을 끄는 주요 부분을 추려서 옮긴 것이다. 이 기록의 시기가 언제였고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가~ 우선 그 당시의 흥미로운 등반기술이나 등반기구는 유럽의 황금시대 말기의 그것을 면치 못한 점을 발견 할 수 있고, 아처가 말하듯 전통적인 영국인들의 인공등반기구 사용의 규제도 암벽의 형태에 따라서는 만부득이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합리화 하기 위해 에드워드 윔퍼 등을 등장시켜 한국의 암벽에서의 기구사용이 불가피함을 역설하고 있음이 흥미롭다. 또한 산의 높이보다는 산의 경승이 아시아인들의 보편적인 산악관으로 보고 있는 것도 그 시대의 풍조일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등반 시기이다. 이 등반기는 1931년 5월에 발간된 영국산악회의 <알파인 저널>에 실려 있다. 그런데 글 속에 연도를 밝히지 않고,  다만 지난 4월(last Alpine)이라고만 밝힌 어귀가 나온다. 1931년 5월판이니 1931년 4월일까?   아니면 책을 만드는 기간을 고려해서 1930년 4월일까?  'last'의 의미로 봐서는 글을 쓴 달이 4월 이후라면 그 해 4월을, 4월 이전이라면 그 전 해 4월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의 '라스트'는 바로 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글을 쓴 해가 밝혀지면 등반시기도 밝혀질 것인데, 문제는 글을 쓴 해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6년 5월의 인수봉 초등 기록이 아처와 임무의 기록이었다면, 만장봉과 오봉 초등은 그 후의 기록일까, 아니면 그 전의 기록일까?

 

 

 

 

뿌리있는 새로움 추구해야

아처는 한국의 암장을 소개하면서 가장 눈에 드러나는 인수봉에 관한 자신의 등반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는 것이 답답하다. 아처의 만장봉 등반이 1926년 이전이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나라 암벽 초등의 효시는 기록을 달리해야 한다. 이즈미(泉立靑一)의 회고록에는 임무가 한국에서의 선구적 클라이머로서 알고 있다고 회고하고 있으며, 아처도 그를 만나기 전에 어떤 봉을 초등했다고 쓰고 있는데, 이것이 자기와 같이 등반한 인수봉일까? 아니면 초기 이야마와 같이 초등한 1925년의 비봉, 보현봉 초등을 말하는 것일까? 또한 도봉산에선 1926년 6월 임무와 이야마가 만장봉 서면, 선인봉 서면, 오봉의 1,2,3 봉을 초등했다고 하는데, 아처는 이것에 대해 언급이 없다. 등반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과정에서 당시 창립된 한국산서학회에서는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현지답사를 통해 규명했을 것이고, 이런 일련의 작업을 통해 우리의 등산사를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일본인이 1921년 무렵 자기네들 나라에서 암벽등반기술을 도입, 보급시켰다지만 우리는 이 무렵 불행하게도 일제 치하에 있었고, 뜻있는 산악인들의 조직도 없이 1931년 한국에 있던 일본인들끼리 조선산악회를 설립했다. 이때도 임무라는 한일 혼혈의 한국산악인(?)의 이름을 <조선산악>1호에서 찿아 볼 수는 있지만, 임무 자신이 직접 쓴 등반기는 아직 찿지 못하고 있다. 한복을 입고  밧줄 타던 금강산 비로봉 등암도가 단순한 민화가 아닌 역사적 묘사였다면, 이런 연대를 앞선 우리 암벽등반기록도 확립되어 유럽이나 일본을 앞질러 '산 타는 근대적 등산'이 일찌기 개화되고 있었음을 구거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새(新)'는 무조것 새 것이기보다  유구한 전통 위에 적립된 뿌리 있는 새로움이어야 하겠다. 결국 여기서부터의 새 것이란 여태 우리가 생각해 오던 뿌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닐런지. 한국의 산천이 도원향이라면 이 도원향에서의 근대적 등산사의 개화를 끈질기게 추구해 봄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END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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