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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산행상식

십승지(十勝地)

by 마루금 2013. 12. 28.

 

십승지(十勝地)   

출처 : 풍수연구가  崔於中(최어중)

정감록(鄭鑑錄)에서 나온 말이다. 십승지의 십자는 처음에는 10자로 쓰였으나 후에는 '가장 좋은', '대표적','남조선에 있는' 등의 의미가 붙었다. '난리가 났을 때 반드시 그곳으로 피난가야 할 곳, 그곳은 주로 남조선에 있다'라는 뜻으로 발전했다. 여기서 남조선은 오대산 이남을 가르킨다. 정감록에 나와있는 십승지는 모두 60군데가 넘는다.

 

풍수도 좋고, 경치도 좋고, 도를 닦기 좋은 고신앙(古信仰) 성지이기도 하다. 주로 오랜 세월 짓밟히고, 억눌리고, 괄시당한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다. 화전민, 나뭇꾼, 심마니, 숯꾼, 부곡(部曲)이라 불렀던 특수천민, 의적, 동학당 잔당, 의병 패잔병, 빨치산 등... 이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이고 뭏혀서 석고처럼 굳게 응고된 곳이기도 하다.

 


십승지지(十勝之地) 

출처 :  디지탈 공주문화대전

십승지지를 십승지(十勝地)라고도 한다.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피난(避亂)과 보신(保身)의 10가지 장소를 의미한다. 즉, 십승지지란 피난하면 전쟁의 참화를 면할 뿐 아니라 식량 걱정도 없이 안주낙생(安住樂生)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10여 군데 피난처를 의미한다. 이에 대한 기록은 정감록(鄭鑑錄),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운기귀책(運奇龜責),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 택리지(擇里志)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련기록에서 대체로 공통되는 십승지지의 장소는 다음과 같다.

 

1. 풍기 금계촌 (경상북도 영주시)
2. 봉화 내성촌 (경상북도 봉화군)
3. 보은 증항촌 (충청북도 보은군)
4. 남원 운봉 동점촌 (전라북도 남원시)
5. 예천 금당동 (경상북도 예천군)
6. 공주 유마지방 (충청남도 공주시)
7. 영월 정동 상류 (강원도 영월군)
8. 무주 무풍 북동쪽 (전라북도 무주군)
9. 부안 호암 (전라북도 부안군)
10. 가야산 만수동 (경상북도 성주군)

 


풍수연구가 崔於中(최어중)


정감록은 우리에게 묘한 존재인가, 

한국사람 치고 정감록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인데, 그렇다고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인쇄로 간행된 지가 올해로 100여년,  광복 전에  일본인들이 그 일부인 감결을 번역하려고 일본식으로 토를 단 적이 있으나 해석을 못했다. 광복 후로는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 몇 권 나오기는 했으나 이것 역시 한문을 겨우 우리말로 옮겨 놓았을뿐 원문 해석에는 엄두도 못내고 있다. 일반 독자는 원문을 아예 포기하고 해제(解題)나 해설을 읽는 것이 고작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감록이 그렇게도 난해한 책인가,
아무리 난해하다 해도 이것을 해석한 책이 아직 한 권도 안나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학자들은 신라향가도 풀어냈고, 이빠진 비석문도 해독해냈는데,어째 정감록만은 아직도 해독해내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정감록은 아시다시피  왕조흥망에 관한 예언집이다.  동양의 예언은  어떤 방술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정감록은 주로 풍수지리설,   하도낙수(河圖洛水)의 태현수(太玄數),  천문기문(天文奇門) 등의 범술에 의한 예언집이다.  그래서 그 문장도 참위체(讖緯體)라는 한(漢) 시대에 유행한 예언에 쓰였던 특수한 문체다. 문체만 특수한 것이 아니라 문장도 특이하다. 즉 한국식 문장이 섞여있다. 무식한 서민층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어 한국식 한자의 용법이 생겼던 것이다. 
 
거기에다 또 서민층에서 즐겨 사용했던  파자(破字), 비어, 은어, 속어 등이 마구잡이로 사용되고 있으니  정통 한문만을 공부한 한학자에게는  그야말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이 정감록은 조선시대 광해 인조 이후의 역모사건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괴문서다.  위정자에게는  더 없이 불길하고 사치스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금서령을 내려, 위반자는 극형에 처한다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정감록은 날이 갈수록 번졌고,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 민중들 사이에는 일종의 민간신앙으로까지 발전되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1920년대 정감록의 신봉자는 수백만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왕조가 멸망한 뒤로는 정감록의 금지령도 자동적으로 무효화 되어 비로소 간행을 보게 되었다. 정감록에 대한 세상의 평은 매우 좋잖았다. 일제 총독부는 물론 유식한 한국사람은 모두 정감록을 허무맹랑한 설로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혹세무민하는 미신이라고 통렬히 비난했다. 이러한 평은 광복 후도 계속 되었다. 원문을 해독하는 노력은 포기한 채 온 세상이 사대주의에 물들었던 시대에  왕은 무능한 데다 부도덕했고, 각급 관료들은 철저하게 부패하여 민생이 완전히 파탄이 났던 그 시대에 실의에 빠져 암흑 속에서 헤메고 있던 민중에게 민족이 무었이며, 그 주체가 누군인가 일깨워주고  내일이라는 희망을 불어넣어  새로운 용기를 갖게 한 것이 정감록이다.


정감록은 남조선설(멀지 않은 장래에 이 지구상에 밝은 세상이 도래하는데,  그 때 우리민족이 동북아시아권의 종주가 된다는 설)과  후천개벽설(세상은 다시 열리어서 못난 사람도 잘 살 수 있는 이상적인 도덕사회가 출현한다는 설)을 낳았고, 역성혁명(하늘은 악덕한 왕을 내쫒고 유덕한 지도자를 내세워 새 왕조를 내세우게 한다는 설, 유교도 한나라시대까지는 이 설을 강하게 주장했으나 특히 주자학은 이 설을 부정하고 있다)사상으로 고취해서 드디어는 동학, 증산교, 정역 등의 민족주체사상을 도출하지 않았던가.

 

십승지로 찿아들어간 비결파(秘訣派) ~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은 두 파로 갈라진다. 종교화된 정감록을 신봉하는 소위 정감록당패와 정감록을 하나의 사상, 사관으로 받아들이는 비결파다. 정감록당패의 패(牌)자는 남사당패와 같이 좋은 뜻으로 쓰이는 자는 아니다. 삼십 여 년 전 신도시 건설 계획으로 퇴거 당하기 전의 계룡산 신도안 사람들은그렇게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 비결파는 새로운 천지가 열리는 것을 믿고 십승지에 들어갔다.  과거 백년 동안에 십승지를 찿아 들어간 시기는 여러번 된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이 패전하고 우리나라가 독립될 것으로 믿고 십승지로 들어간 사람들이다. 

 


 

필자 마루금의 견해는 ?

'이제 우리나라에 십승지는 없다'라고 단정하고 싶다. 꽉 막힌 오지가 없기 때문이다. 도로사정이 좋아져서 교통이 불편한 곳이 없어진 걸 이유로 꼽을 수 있겠다. 그 옛날 민초들이 한 많은 시절을 보내면서 생을 영위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찿아 들어간 오지가 바로 십승지였을 것이니 '살기가 좋아서'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허구였을 뿐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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