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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발길따라~

황희선생 유적지(파주) .... 2011.06.19

by 마루금 2011. 6. 21.

 

 

 

방촌 황희(尨村 黃喜) 1363~1452

초명은 수로(壽老), 호는 방촌(尨村), 본관은 장수(長水),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정치가로서 청백리의 표상이다. 저서로 방촌집(尨村集)이 있다. 1363년(공민왕 12)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 어머니 용궁김씨가 그를 잉태했던 10달 동안 송악산 용암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소 물이 쏟아져 내렸다 한다.

 

1378년(우왕2) 음직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조선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고, 그 후 직예문 춘추관, 사헌감찰, 우습유, 경기도도사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형조, 예조, 이조 등의 정량을 거쳐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 그 후 형조, 병조, 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1416년 이조판서로 세자 폐출을 반대하여 공조판서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교하(交河)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남원으로 이배(移配)되었으나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관찰사, 예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복직, 영의정에 올랐다.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9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소생의 천역(賤役)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으로부터 가장 신망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령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파주의 방촌영당(尨村影堂),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 등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방촌 황희 선생 연보>

1363           개성 가조리서 출생

1376(14세)   음보로 복안궁 녹사가 됨

1383(21세)   생원시에 급제

1385(23세)   진사시에 급제

1389(27세)   문과에 급제

1390(28세)   성균관 학관

1394(32세)   세자우정자

1395(33세)   사헌부 감찰, 우습유

1399(37세)   경기도사

1400(38세)   형조, 예조, 병조, 이조정랑

1404(42세)   우사간대부, 좌부대언

1405(43세)   승정원도승지

1410(48세)   사헌부 대사헌

1411(49세)   병조판서, 예조판서

1415(53세)   이조판서, 의정부 참찬, 호조판서

1416(54세)   세자폐출을 반대하다가 공조판서로 좌천

1417(55세)   평안도순무사 겸 평양부사

1418(56세)   서인이 되어 교하로 귀양감

1419(57세)   남원으로 이배

1422(60세)   유배에서 풀려남, 의정부 좌참찬

1423(61세)   강원도관찰사

1426(64세)  이조판서, 우의정

1427(65세)   좌의정 겸 세자사

1429(67세)   평안도 도체찰사

1431(69세)   영의정에 오름

1432(70세)   70세가 되어 퇴직을 상소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을 받음

1433(71세)   함경도 도체찰사

1449(87세)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1452(90세)   병이나자 왕이 내의(內醫)를 보냄

1452(90세)   사망, 왕이 익성(翼成)이란 시호를 내리고 세종의 묘향에 배향을 명함

 

 

<방촌기념관>

황희선생 유적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1999년 7월 착공하여 2000년 6월에 완공, 황희선생의 일대기를 비롯해 선생의 삶과 사상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만든 가종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반구정>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정자로 낙하진에 인접해 있어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팔도의 유림들이 유적지로 수호하여 내려왔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그 뒤 이 일대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정자를 복원해 오다가 1967년 개축을 하고, 1975년 단청과 축대를 보수했다. 1998년에는 유적지 정화사업 일환으로 반구정과 앙지대 등을 목조건물로 새롭게 개축했다.  

 

반구정 ~

 

 

반구정에서 바라본 임진강 ~

 

<앙지대>

앙지대(仰止臺)는 원래 반구정이 위치했던 자리다. 1915년 반구정을 현 위치에 옮겨 지으면서 그 자리에 황희선생의 유덕을 우르르는 마음을 담아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 이름하였다.

 

앙지대 상량문에 ...

'오직 선(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다른 마음이 없는 한 신하기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이 앙지대란 이름은 시경(詩經)의 호인(好人)이라는 뜻을 취했다' 라고 적고 있다.

 

앙지대 ~

 

황희선생이 1423년(세종 5) 감사 재직시 남긴 유묵(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의 내용이다. 동상 좌대에 음각되어 있다.

 

觀風樓(관풍루)

軒高能却暑(헌고능각서)    

집이 높으니 능히 더위를 물리치고

簷豁易爲風(첨활이위풍)     

처마가 넓으니 통하기 쉽네

老樹陰垂地(노수음수지)    

큰 나무는 땅에 그늘을 만들고

遙岑翠掃空(요잠취소공)    

먼 산봉우리는 푸르네 하늘을 쓰는 것 같네

 

 

 

 

 

 

 

 

 

 

 

<월헌사>

월헌사(月軒祠)는 황희선생의 고손(高孫)인 소양공 월헌 황맹헌(黃孟獻, 1472~1535) 선생의 신위를 모신 부조묘이다. 황맹헌은 황희선생의 증손인 부사(府使) 황관(黃瓘)의 아들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소세양, 정사룡과 함께 당대에 이름이 높았고, 그의 죽지사(竹枝詞)는 명나라에서 극찬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월헌사 ~

 

 

 

< 대중교통편 >

* 서울역(9710번)이나 불광동(909번)에서 버스 이용, 월롱역 하차~길 건너 파출소 앞에서 6번 버스 이용, 금승리 마을회관 하차~황희선생 유적지까지 도보 10분 거리

* 서울역에서 문산행(경의선) 열차 이용, 월롱역 하차~길 건너 파출소 앞에서 6번 버스 이용, 금승리 마을회관 하차~황희선생 유적지까지 도보 10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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