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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공유/령이름들~

옥정재 (경기 안성/ 충북 진천)

by 마루금 2008. 11. 19.

 

 

 

< 옥정재, 옥정치(玉井峙) >

 

경기도와 충청북도를 가르는 도계에 놓인 고개다. 387번 지방도가 지나며, 해발 390m의 높이로 금북정맥에 걸쳐있다. 행정지명으로 동쪽은 충북 진천 이월면 신계리, 서쪽은 경기도 안성 금광면 옥정리가 된다. 

 

이 고개 이름은 충북 진천 쪽에서 안성으로 넘어가는 장꾼들이 만든 이름이다. 고개를 넘으면 처음 만나는 마을이 옥정리이기 때문인데, 반면 옥정리 사람들은 이 고개를 이월고개라고 한다. 옥정리 사람들이 고개를 넘으면 이월면이라서 그렇다.

 

과거 진천쪽 장꾼들이 주막에서 쉬어갈 때 우물물의 맛이 좋다고 해서 '옥쟁이'라 불렀다. 다시 '옥장이'라 했다가 지금은 옥정(玉井)으로 되었다. 하지만 부근에 우물은 없다. 

 

인근의 다른 고개보다 왕래가 빈번했다 한다. 서울을 능가할 정도라는 안성장으로 소와 소금이 넘나들던 고개였다. 지금은 2차선 포장도로가 깔려 각종 차량들이 질주하고 있다


< 채꾼들이 넘던 고개 >

 

옥정고개를 넘던 물자의 흐름은 대개 일방적이었다. 소와 쌀이 안성 쪽으로 가는 주요 물자라면 소금은 역방향인 진천 쪽으로 가는 주요 물자였다. 특히 옥장고개의 중요성은 소의 이동로라는 점에 있었다.

 

채꾼이라 부르는 소몰이꾼은 대개 다섯 마리까지 소를 몰고 쇠장을 옮겨 다녔다. 진천 쇠장에는 경상도 각지에서 출발하여 청주장 등을 거쳐 온 소로 넘쳤다. 그러나 진천장은 구매력이 약하여 미처 팔리지 못한 소와 진천 소가 합쳐져 옥장고개를 넘었다.


1925년(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장이 잠긴 이후 광주로 향하던 소들이 용인으로 몰리면서 안성장으로의 쏠림은 더욱 심해졌다.
안성장에서도 팔리지 못한 소는 다음 장인 오산장과 수원장으로 가는데 이때부터는 팔아도 밑지는 장사가 되었다고 한다.


< 옥정리(玉井里) 마을의 특징 >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는 조금 특징있는 마을이었다. 진천에서 출발한 소가 옥장고개를 넘으면 날이 저무는데, 이때 만나는 마을이 옥정마을이다. 작은 마을인데도 지친 소를 먹이고 재우기 위한 마방(馬房)이 세 곳이나 있었다 한다. 소를 먹이는 곳이라고 하여 ‘소마방’이라고도 불렀다.

 

장거리 이동에 가파른 재를 넘은 소들은 고통을 견디지 못해 발광하는가 하면 기가 다해 강제로 입을 벌려 죽을 쑤셔 넣다시피 할 정도였다. 한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40~50필의 소를 이곳에서 먹였기 때문에 겨울철에는 소죽을 끓일 짚이 모자라 다른 마을에서 짚을 사다가 쓰기도 했다 한다.


옥정리의 또 다른 점으로 작은 규모지만 이 마을에서 소금장이 열렸다는 것,  직접 본 주민은 현재 없지만  과거 어느 땐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소금장이 사라진 시기는  공급 루트가  다변화 한 일제 초기로 짐작되는데,  옥정마을 소금장은  소금장수와  진천사람 모두에게 이득이 되었을 것이다. 소금장수는 한 번에 많은 고객을 만날 수 있고 진천사람들은 굳이 안성장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소금 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도정한 쌀을  지고 가야 했는데 아마 중간지점인 이곳에서 두 물자의 맞교환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옥정고개로 마차가 다닐 수 없었다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참조하면  이곳이 안성 관내에서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끝 지점이란 점도 소금장 형성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이곳의 마차는 앞바퀴가 작고 뒷바퀴가 큰 네 바퀴 마차로 두 바퀴 마차만 있는 남쪽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다. 마차는 소와 마찬가지로 농촌에서는 재산목록 1호에 해당하며 그 수에 따라 부농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마차나 소를 빌리면 그 대가로 주인집에 이틀 일을 해주어야 했을 정도다.

 

옥정리가 있는 금광면 일대에는 일제 때 몇몇 부농들이 땔감 운반용 마차를 상업적으로 운영한 결과 면내에만 200대가 넘었다고 한다. 겨울철에는 귀가하는 빈 마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늦은 밤까지 이어져 잠을 설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상황이 짐작된다. 일대가 유독 국유림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안성시내와 평택에서의  땔감 수요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진천 사람이 옥정고개를 넘어 안성장을 보러 가는 경우는 많았지만 반대로 안성 사람이 진천으로 넘어가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간혹 있었다면 그것은 신랑 신부의 신행(新行) 길이 아니면 친정에 가는 며느리의 근친(覲親) 길 정도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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