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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산길따라~

감악지맥(마차산에서 감악산까지 2).......2008.6.22

by 마루금 2008. 6. 23.

마차산에서 하산, 간패고개를 건너면 감악산으로 영역이 바뀐다. 긴 시간을 걸었지만 느긋한 기분으로 감악산 정상을 향해 다시 힘을 쏟는다. 낮이 가장 긴 시기, 갖가지 위험성과 시간에 쪼달리는 동계시즌에 비해 한결 여유로운 산행이다.   

 

 

마차산과 감악산을 구분짓는 간패고개

 

패랭이와 망초의 어울림, 무덤가 공터에서 ~  

 

 

낮은 중턱에서 산짐승을 만났다. 짧은 순간에 사라져 미처 촬영을 준비할 틈도 없었다. 증거는 없다. 믿거나 말거나~ 단지 기억으로서만 내 머릿속에 남아 있을 뿐~ 몸길이(꼬리는 제외) 대략 80Cm 검누런 흙 색깔에 입이 약간 뾰쪽한 여우의 생김새, 움직임과 모양으로 보아 개과에 속하는 동물로 추측되지만 전문가가 아니라서 확신은 없다. 

 

 

멀리서 바라보는 도봉산 오봉과 삼각산의 멋...

 

좌 수락산, 우 도봉산, 가운데는 채석장의 도락산과 그 우측의 불곡산 

 

정상이 눈앞에..

 

임걱정봉

 

정상 근처의 성모상 

 

 

< 마리아상 비문에 새겨진 글 >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상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감악산(紺岳山, 675m)

경기도 파주시, 양주시, 연천군에 걸친 산으로 예부터 명산으로 알려져 온 산이다. 지역 주민들은 '감박산'으로 부르기도 하며,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경기 오악(五嶽)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위치나 지형상의 가치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이 지역을 차지하려고 하던 곳이기도 하다.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쏟아져 나온다 하여 감악(紺岳), 즉 감색 바위산이라 불렀다고 하며, 신지비기(神誌秘記)에 의하면 이 산이 서울의 주산인 삼각산을 뒷받침하고, 수성 곧 수덕(水德)을 이루어, 서울의 땅기운을 북돋아 주게 되어서울의 번영을 크게 하였다고 한다. 

 

감악산에  운계사, 감악사, 법륜사, 운림사 등 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 소실되고 없다. 임진왜란 당시 전소되어 폐허로 남아 있던 옛 운계사 터에 금봉화상(錦峰和尙)이 1970년에 지금의 '범륜사'를 창건하였다. 일부 자료에는 '법륜사'로도 되어 있는데, 감악산 등산로의 이정표나 사찰 내부의 안내판에는 '범륜사'로 표기되어 있어 '법'이 아닌 '범'자로

불러야 옳을 것이다.

 

감악산이 영검하다는 전설도 많다. 고려 현종 때 거란 왕이  군사를 이끌고 장단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며 감악산사 근처에서 깃발, 창검들이 보이고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날뛰어 크게 놀라  달아났다고 한다. 충렬왕 때에는 원나라에서 내안왕의 반란을 치기 위하여  우리에게 귀찮게 계속 원군을 요청했는데,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 후부터 원군 요청이 사라졌다고 한다.

 

 

정상의 감악산 비 

정상에 '감악산 비'(빗돌대왕이라 하는 옛 비석)가 있는데, 글씨가 보이지 않아 그 연대나 동기를 알 수가 없다. 모양이 진흥왕 순수비를 닮아 삼국시대 것으로 추측할 뿐인데, 이 비석이 정상에 서게 된 내력으로 아래와 같은 전설로 전해져 올뿐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성모상 

 

까치능선의 팔각정 

 

까치봉의 멋 

 

 

감악산에 올라서 송악산을 바라보니

손에 잡힐 듯 가까운데 천만 리나 먼 것 같다

같은 땅에 선 하나 그어서 마음까지 갈라버렸으니

기구하고 서러운 역사의 한을 한탄강이 어찌 알겠냐마는

 

 

줌으로 당겨본 개성 송악산과 한탄강  

 

 

양주군 남면 황뱅이(篁芳:본래 적성군 남면) 북쪽 눌매기(訥木:전곡읍)에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이 근처 황뱅이, 붉바위(赤岩), 간패(干波)마을에서 소를 기르며 살던 농민들이 일제히 같은 꿈을 꾸었다. 한 노인이 나타나 소를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소를 빌려 주기로 한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외양간의 소가 온통 땀에 젖은 채  몹시 피곤한 기색이었다. 반대로 소를 빌려 주지 않겠다고 한 집의 소들은 모두 죽어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눌메기 길가에 서 있던 빗돌이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그것이 감악산 꼭대기에 옮겨져 있질  않는가!    마을 사람들은 감악산 신령이 근처 마을 소의 힘을 빌어 비석을 옮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소문이 퍼진 뒤로 많은 사람들이 이 비석의 영검함을 믿고 치성드리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는 것이다.

 

전설과는 달리,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세웠다고 하여 '설인귀비'라고도 한다는 이 비석을 근처 사람들은  '삐뚤대왕비'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로부터 조선 초까지 집을 짓고 중사(中祀)로 모시어 나라에서 봄과 가을에 향촉과  축(祝)을 지내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설인귀는 적성면 잇개(六溪城: 지금의 주월리)에서 출생,  감악산에서 말을 달려 훈련하고 당나라에 나아가 장수가 되어 고구려를 쳤는데, 나중에 모국(고구려)을 친 죄를 뉘우쳐 죽은 후 감악산 산신이 되어 이 나라를 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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