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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산길따라~

구룡산~민백산~삼동산(봉화)......2020.07.19

by 마루금 2020. 7. 20.
날씨 13.5~22.7 ℃ / 흐림
코스 상금정~임도~구룡산(1345.7m)~민백산(1212m)~삼동산(1179.8m)~사방댐~신촌~상금정
거리 10.77㎞
시간 4시간 57분
인원 거리두기 만차
교통 산악회 버스
특징 구룡산 등로인 백두대간을 제외하곤 모두 오지 산행임. 삼동산 하산길로 잡은 계곡은 개척산행이나 다를 바 없슴. 

구룡산~민백산~삼동산.gpx
0.10MB

경북 봉화군과 강원도 영월군 도계에 걸친 오지 구룡산, 민백산, 삼동산을 다녀왔다. 산행은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상금정 마을에서 출발,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서 원점산행으로 마쳤다. 백두대간에 걸친 구룡산을 제외하곤 오지구간이다.

 

상금정 마을에서 하차 ~

마을 앞 삼거리에서 우측도로 다리를 건너간다 ~

도로변에 쌓아논 춘양목 ~

" 왔네 왔네 나 여기 왔네 억지춘양 나 여기 왔네/ 햇밥 고기 배부르게 먹고 떠나려 하니 생각 나네/ 햇밥고기 생각나네 울고 왔던 억지 춘양 떠나려 하니 생각 나네…” 이 가사는 봉화군 춘양면 일원에 전래되는 ‘억지춘양’ 속요다. 까마득한 옛날 도로 여건이 좋지 못할 때 춘양이라는 곳은 상당히 외진 곳이었다. 워낙 외진 곳이라 외지에서 온 아낙들이 춘양에 한 번 들어가면 다시 가는 친정길은 한낱 마음뿐이었다 한다. 그래서 가기 힘든 발걸음을 ‘억지춘양’이라 했다는 설이다.

 

열린 차단기 통과 ~

도로가 휘어지는 지점에서 묵은 수렛길로 진입 ~

잡풀이 잔뜩 뒤덮인 수렛길 ~

수렛길이 희미해질 즈음에 좌측 능선으로 붙어서 백두대간 능선에 합류했다 ~

임도 ~

사초가 깔려있는 등로 ~

구룡산 정상 ~

거칠어지기 시작하는 등로 ~

자주 나타나는 산죽 고사지 ~

민백산(1212m) ~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와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천평리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지형도에는 없는 이름이다. 정상은 밋밋하며, 숲에 둘러싸여 조망은 꽝이다. 여기서 유턴하여 거꾸로 빠져나가 30m쯤에서 분기되는 능선을 따라간다.  

 

민백산에 설치된 사격장 경고문 ~

삼동산 하산길에서까지 보게 되는 군통신 케이블 ~ 

바람의 언덕 ~

거칠게 저항하는 삼동산 오르막 등로의 미역줄 덩쿨 ~

삼동산(三洞山/ 1179.8m) ~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와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덕구리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다. 산 능선을 경계로 경상북도와 강원도로 나뉜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우구치 마을 뒷산을 수다산(水多山)이라 했다. 지금은 삼동산과 민백산 그리고 구룡산이 있지만 수다산이란 이름이 없어진지 오래다. 수다산에서 흘러내려 이 마을 중간으로 흐르는 내를 중심으로 마을 위쪽에 상금정이라는 자연부락과 아래쪽 하금정과 와흥 그리고 강원도 내리 마을 조제가 각각 자리해 경계를 이룬다.

 

삼동산 하산길에 깔려있는 사초 ~

안부로 내려서다가 만나는 풍경, 강원도 영월의 고랭지 채소밭 ~

능선 안부에서 계곡으로 하산,  이후 등로를 만들어가면서 아랫쪽으로 내려서야 했다 ~

중도에 만났다가 헤어지는 임도 ~

임도를 가로질러 계곡으로 진입 ~

자주 나타나는 화전민 주거 흔적 ~

사방댐 ~

사방댐에서 신촌마을 임도가 보임 ~ 

임도에 안착, 오지탐험은 여기서 끝 ~

신촌마을 세멘포장로 ~

임도변의 사방댐 위에 있는 실폭 ~

양봉 농가 ~

예전 구멍가게(미닫이 유리문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폐가 ~

삼동산과 민백산 사이 기슭에 금광이 있었다. 일제 때인 1920년경 금광에 관심이 많았던 김태원이라는 사람이 수 년의 노력 끝에 금맥을 찾아 순도 높은 우구치의 금과 은, 동을 캐기 시작했다. 그 후 1923년부터 1943년까지 20년간 일인들이 대량 채굴하였으며, 해방 후 대명광업이 운영하다가 중단되고, 다시 1970년대 초 함태탄광에서 인수하여 재개발에 착수해 운영하다 폐광됐다. 일제 치하에 대량 채굴을 통해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금의 양이 엄청났을 것이라 한다. 

 

우구치리(宇龜峙里) ~

자연마을로 새터, 상금정, 상시장, 사호, 하금정, 샘골, 와흥 등이 있다. 산 기슭에 금광이 개발되면서 주변이 크게 번성하였다. 한 때 상금정 안쪽으로 1,000여 세대 이상이 살면서 5일장이나 3일장이 아닌 매일 장이 서는 상설시장이 상금정과 하금정, 노루목 부근에서 세 곳이나 서고, 흥청망청 불야성을 이루던 도시마을이었다. 일본 순사가 10명이 넘는 주재소도 있었고, 상주인구만 15,000명이 살았고, 한국인 학교와 일본인 학교가 따로 있었다. 길손의 고단함을 달래주던 주막집도 여러 곳 있었고, 호텔과 여관도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금광이 폐광되면서 마을 역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상금정(上金井) ~

아직도 일제시대 잔재인 ‘금정’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곳이다. 이는 일본 사람들이 광산을 운영할 당시 금광에 물이 많이 차있어서 마치 우물 속에서 금을 캐는 것 같다 하여 금정(金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광산 흔적이 사라졌지만 그 옛날의 영화를 잊지 못해 훌쩍 떠나지 못하는 몇몇 촌로들과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산천, 넓은 평지 등이 좋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살아가는 주민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주로 고랭지 채소와 약초, 옥수수, 감자 등으로 밭을 일구며, 현재 6여 세대가 오붓하게 살고 있다는 정겨운 마을이다. 

 

상금정에 도착해서 원점산행으로 마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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