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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산길따라~

홍복산(의정부)......2019.09.14

by 마루금 2019. 9. 14.

산행날씨 : 21.7 ~ 24.1℃,  흐림

산행코스 : 녹양역(1호선)~까페 여로~홍복산(462.3m)~한강봉 갈림길~군작전로~고개~홍복저수지~고개~343.8봉~294.7봉~맑은물사업소~흥선역(의정부경전철)

산행거리 : GPS거리 10.85Km 

산행시간 : 3시간 13분

산행인원 : 홀산으로

홍복산(의정부).gpx
0.20MB

 

 

 

 

추석 연휴에 다녀온 산행이다. 대상지는 의정부 소재의 홍복산이며, 교통편은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인근 도봉산이나 수락산과는 달리 바위가 없는 전형적인 육산이며, 의정부 둘레길인 소풍길이 걸치는 곳이다.  

 

 

 

소풍길

 

 

교차로를 지나서 고향산천 사잇길로 진입

 

 

푸른숲요양원

 

 

홍복산(弘福山) 전설

여러 설화가 전해 오고 있다. 먼저 서울의 주산이 되어 백성들의 복을 누리게 하는 산이라는 데서 홍복산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이 외에 종루(鐘樓)처럼 생겨서 온 겨레를 깨우치는 산이라는 이야기나 부처 모양으로 생겨서 산이 보이는 지역에서 문장가나 명필가가 많이 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남양 홍씨의 선조들이 서울에서 낙향할 때 산마루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남면 상수리가 적지라고 판단되어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자손이 번성하고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서 가문이 영화로워지자 홍씨가 번성하게 된 산이라 하여 홍복산(洪福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수리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전국을 순행하면서 감악산을 거쳐 상수리를 둘러보고 홍복산을 넘어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홍복산에서 뒤를 돌아보며 상수리를 향해 “이것은 과인의 홍복이로다.”라고 말한 데서 홍복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홍복산

 

사패산 & 도봉산

 

 

 

 

등로는 카페 입구로 가기 전 우측 숲에 나있다. 

 

 

 

 

 

 

 

잣나무 숲 

 

잣나무 숲 속의 작은 웅덩이 

 

 

헬기장

 

헬기장에서 도봉산 줌인 

 

불곡산 줌인

 

 

홍복산(弘福山, 洪福山)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과 어둔동 및 의정부시 녹양동 일대에 걸쳐 있는 산이다. 15세기 중반 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1448년(세종 30) 12월 10일 기록에 홍복산(洪福山)을 경기 지역의 대표적인 강무장(講武場)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 성종과 연산군 시대에도 강무장 관련 기사가 실려있다. 그러나 1486년(성종 17) 10월 2일 기록부터 홍복산(弘福山)으로 되어 있어 변화가 감지된다. 홍복산이라는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대동여지도(1861), 양주목읍지, 신편조선지지(1924), 조선환여승람(1937)에도 실려 있다. 

 

 

 

홍복산 정상에 공군부대가 있어 민간인 출입은 금지된다. 

 

 

홍복산 정상 우회길

 

한강봉 갈림길에서 쉬고 있던 두 분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홍복산 정상을 우회해서 돌아나가면 만나는 군작전로, 홍복저수지로 넘어가는 고개를 만날 때까지 이 도로를 계속 따르게 된다. 

 

 

한강봉 

 

의정부 & 수락산 

 

 

홍복저수지로 넘어가는 고개, 여기서 저수지를 잠시 다녀오기로 한다.

 

 

 

고개에서 343.8봉 들머리로 진입

 

묵은 임도를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343.8봉 정상이다. 이번 태풍에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있다.

 

 

군부대가 주둔했던 흔적

 

343.8봉 정상

 

343.8봉에서 하산하다가 만나는 철조망

 

맑은물사업소 방향으로 진행

 

 

장수약수 

 

약수터 쉼터 

 

 

 

하산로 우측에 군사격장이 있다는 경고판이 자주 보인다. 

 

 

 

맑은물사업소 건믈 & 철도 건널목 

 

 

흥선역 도착으로 산행 끝

 

 

홍복산(洪福山/ 弘福山) 유래
이 산 정상에 미군부대(C.R.C 레이더 기지)가 차지하고 있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널리 복되게 하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홍복산이라는 땅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해동지도(1760), 여지도서(1757∼1765), 팔도군현지도(1767∼1776), 동국여도(1801∼1822), 청구도(1834). 동국여지지(19C중엽), 대동여지도(1861), 양주목읍지(1871),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 1888), 양주군읍지(1899), 양주읍지(1899),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 신편조선지지(新編朝鮮地誌, 1924), 조선환여승람(1937) 등에서 골고루 확인되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종루처럼 생겨서 온 겨레를 깨우쳐 준다 하여 종루봉(鐘樓峰)이라고도 했고, 이 산이 보이는 곳에는 명필이 많다 하여 필봉(筆鋒)이라고도 불렀다.

남면 상수리에 살았던 홍씨 선조들이 서울에서 이곳으로 낙향할 때, 이 산마루에 올라가서 보니 상수리가 제일 적지라고 판단되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한다. 그 후 자손도 번성하고, 가문도 영화롭게 되어 홍씨의 번영을 발견한 산이라 해서 홍복산(洪福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상수리 쪽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전국을 순행하면서 감악산을 거쳐 상수리를 둘러보고 홍복산을 넘어 한양으로 돌아가다가 홍복고개에서 뒤를 돌아보면서 상수리 쪽을 향해 "이는 과인의 홍복이도다”라고 말하였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홍복산의 한자는 조선 성종 17년(1486) 10월 2일 조부터 홍복산의 한자는 홍복산(弘福山)으로 변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홍복산’과 관련하여 총 48건의 기록이 확인되는데, 왕의 강무(講武) 즉 수렵행위나 국방문제와 관련된 기사가 주종을 이룬다. 홍복산(洪福山)은 15세기 중반의 사실을 전하는 세종실록에서 처음 확인된다. 30년(1448) 12월 10 일조에는 이곳을 경기지역의 대표적인 강무장(講武場) 즉 왕을 위한 수렵장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 소개되었다.  성종 및 연산군 대에도 강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홍복산과 관련하여 일정한 특징을 발견되는데 조선 중기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조정의 외적 방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남한산성과 견줄 수 있는 산성을 한양 북쪽에도 쌓아야 한다는 의견이 자주 대두되었다. 이에 홍복산은 북한산과 더불어 산성 축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숙종대에는 산성 축조 문제를 둘러싼 시비가 빈번하였다. 숙종 29년(1703) 1월 20일 기록에서 이유(李濡)에 따르면, 홍복산은 사방에 규봉(窺峰; 풍수에서 숨어서 엿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산봉우리를 가리키는 말로 묏자리 주위에 이런 산봉우리가 보이면 화를 받는다고 한다)이 없고 물과 풀이 매우 무성하며, 앞에는 도봉산과 삼각산이 있어 백악(白岳)에 이르니 사민(士民)이 피난하는 길이 될만하고, 북문이 험하고, 막혀있어서 수레 두 채가 나란히 갈 수없으며, 기름진 들에 서로 접해있고, 또 수리(水利)가 있으므로, 들어가면 지킬만하고 나가면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형세가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숙종 8년(1682) 10월 8일 조에서 산성 공사가 시작되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1일 중지되었다. 

 

 

 
 
 
 
 
홍복산(의정부).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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