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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산길따라~

소요산 (전북 고창) ........... 2016.04.10

by 마루금 2016. 4. 12.

산행날씨 : 7.1 ~ 23.9℃  미세먼지 낀 맑음   

산행코스 : 수다동 용선교 ~ 미당시문학관 ~ 서당 ~ 소요산(445.4m) ~ 연기재 ~ 338.5봉 ~ 사자봉(341.4m) ~ 226.3봉 ~ 연기마을 연기교

산행거리 : GPS거리 11.6km   

산행시간 : 3시간 48분

산행인원 : 홀산으로 ~

 

경수산-소요산(전북 고창).gpx

 

 

경수산 산행을 마치고나서 소요산을 오르기 위해 수다동 용선교를 건너가 구룡동으로 진입했다. 구룡동에서 편하게 올라붙는 등로가 있으나 서정주 생가가 있는 미당시문학관 마을을 둘러보고 소요산으로 올랐다. 

 

▼ 용선교(龍船橋) ~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용기리와 부안면 선운리를 잇는다. 1995년 건립, 주진천(인천강)을 건너는 다리로서 734번 지방도를 이용하여 미당시문학관으로 진입할 수 있다.

 

용선교에서 하전마을까지 자전거도로가 2014년에 개설됨 ~  

용선교에서 바라본 소요산 ~

주진천(舟津川) ~

주진천은 원래 인천강(仁川江)으로 기록되어 전해져 왔다.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인천강으로 부른다. 장수강,인냇강,풍천,배날이 등의 이명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11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라는 의미의 ‘배날이'에서 한자화된 주진(舟津)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그에 따라 인천강 이름도 주진천으로 바뀌었고, 현재도 주진천이라는 명칭으로 각 행정 기관이나 사전 등에서 쓰이고 있다.

 

인천강이라는 지명은 조선 영조 36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등장한다. 일부 지형도에는 인천강을 주진천, 또는 장수강, 인냇강 등으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조선 명종 때 이퇴계의 문하인 변성진(卞成振)이 이 강에 매료되어 아산초등학교 옆 강변에 두암초당을 짓고 형인 변성온과 함께 동문수학을 하였다. 학문을 닦을 당시 강물이 고창과 아산 지역에 자주 범람하자 물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로 변성진(卞成振)의 호를 인천(仁川)으로 정하고, 강 이름도 인천강으로 명명했다 한다. 그의 친형인 호암은 강변의 초당 옆에 있는 큰 바위가 큰 병처럼 툭 튀어 나왔다해서 병호(壺), 바위암(岩) 자를 써서 호로 사용하였다.

 

뒤돌아본 경수산 ~

▼ 구룡동 산행기점 ~

734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가 아래 사진의 이정표가 있는 지점에서 미당시문학관 방향으로 들어서면 소요산 등로를 쉽게 오를 수 있다. 대신 미당시문학관을 들러볼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진다. 여기서 서정주 시인의 생가를 둘러보기 위해 지방도를 따라 직진으로 진행했다. 

 

곰소만 해안의 농지 ~

소요산 ~

여기서 마을 안쪽으로 진입 ~

미당시문학관(未堂詩文學館) ~

미당 서정주의 삶과 문학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시인의 고향에 세워진 문학관이다.

 

미당 서정주 생가 ~

소요사 입구로 Go ~

마을로 깊숙이 들어서서 지형을 보고 등산로 입구를 찿아보는데 마땅한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 지나가는 동네주민에게 문의했더니 소요사 진입로를 가르키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빙글 돌게 되어 거리가 너무 멀었다. 먼 길을 돌아가기엔 시간이 부족한 것같아 벽으로 직등하면 안되냐고 물었더니 동네 주민 왈, "죽고싶으면 거기로 올라 가란다" 그래도 그 말을 무시하고 직등으로 붙었다.

 

정자 우측으로 Go ~

보도블럭이 잘 깔려있는 과수원 옆을 지나고 ~

골짜기로 들어서면 약수터가 나타난다. 등로가 있었다.

서당터에 도착, 그러나 등로는 여기서 끝 ~

서당터 이후 더 이상 등로는 없었다. 오로지 급사면의 연속이었고, 각종 장애물이 속출하여 괴롭혔다. 움폭 패이고 습기찬 곳은 덤불과 덩굴이,  볼록한 곳에는 가끔 바위벽이 나타나 진로를 방해했다. 5시까지 선운사 입구에 도착하여 일행들과 합류해야 하기에 시간상 중도 포기할 수도 없었다. 힘들지만 어쨌든 전진 뿐이었다.

 

서당터에서 정규등산로까지 직선거리 350m, 고도 250m, 이곳을 오르는데 46분이나 시간이 소모되었다. 엄청난 체력소모가 있었다. 여기서는 오로지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 사진을 남길 여유조차 없었다. 어렵사리 난코스를 끝내고나서 소요산 정규등산로를 만나자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험로를 벗어나서 만난 소요산 정규등로 ~

오전에 올랐던 경수산(맨 뒤) ~

연기저수지 ~

정상 직전의 바위전망터에서 바라본 소요산 ~

미당시문학관 마을과 곰소만 풍경~

정상 직전의 암반 ~

소요산 정상에서 바라본 연기저수지 ~

소요산 정상(445.4m) ~

정상임을 알려주는 스텐판 ~

소요산(逍遙山) ~

산 이름이 제비와 관련있는 소요사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인천강을 사이에 두고 높이가 같은 경수산과 마주보고 있어 형제봉, 또는 걸출한 문장가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의미로 문필봉이란 별칭을 얻었다. 미당 서정주, 인촌 김성수, 보천교 창시자 차경석 등이 이 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흥덕현지>에 의하면 옛적에 소요산 산정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천제단이 있었고,  북쪽은 취은처사 황세기와 귀암 황재중 부자가  시를 읊던 명옥대와 유선대,  남쪽은 김하익의 효행일대기를 담은  백허당이 새겨진 효자바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산불감시탑 ~ 

가야할 사자봉 ~

소요산 활공장 ~

수강산(이명/수월산) ~

소요산 하산 중 비석없는 깨끗한 묘지를 만나는데 ~

묘는 산 속에 자리잡았고, 비석은 묘에서 분리되어 임도 부근에 설치하였다. 묘를 찿기 쉽도록 조치한 것 같다 ~ 

소요사 진입로 ~

연기재 ~

사자봉 ~

사자봉 전망터에서 바라본 선운저수지 ~

소요사 ~

제비가 깃든 연소혈(燕巢穴)로 소요산 목울대 부근 (동쪽 암벽 아래)에 자리한 사찰이다. 백제 위덕왕 때 소요대사가 개창해서 얻은 이름이라 하며, 신라경덕왕 때 고승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화엄사 중창과 고창 소요사 등 많은 사찰을 창건했으며, 출생지가 고창 흥덕이라는 설과 하늘에서 연을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는 설이 있다.

 

소요산과 소요사 ~

사자봉에서 90도 좌틀, 사자봉을 내려선 안부 사거리에서 90도 우틀. 이 구간에서 알바하기 쉬우므로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등로는 뚜렷하지만 숲에 가려 조망이 없는 편.

 

헬기장 ~

가끔씩 바위전망터가 나타나면서 조망을 열어준다. 소요산 주변에 저수지가 여럿인데 전망이 트일 때마다 다른 저수지가 보인다. 

 

오산저수지 ~

끄트머리만 살짝 보이는 연기저수지 ~

처마바위 ~

사거리 안부에서 직진, 연기마을로 Go ~

아름다운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 연기저수지, 사거리 안부를 지나면 전망이 탁 트인다. 바위가 있는 곳은 모두 전망대, 연기저수지 옆에는 연기조사가 창건해서 한때 38개 암자를 거느렸다던 연기사 터가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묘 ~

연기마을 ~

사람이 귀했다. 소요산 산행 중에는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연기교를 종점으로 산행을 마감짓고 선운사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일행들과 합류했다.

 

인천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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