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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발길따라~

세중 옛 돌박물관(용인) .... 2014.10.26

by 마루금 2014. 12. 2.

 

 

世中 옛 돌박물관 ~

용인 양지의 주산인 금박산~오봉산 연계산행을 마치고나서 양지향교에 잠간 둘렀다가 '세중 옛 돌박물관'으로 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돌 전문 사립박물관이다. 돌 자료 1만 여 점이 보유되어있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은 유물을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다. 면적은 5천여 평, 야외전시관 13개, 실내전시관 1개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관은 장승, 벅수, 사대부 묘, 석인, 지방, 제주도, 석수, 생활 유물, 동자, 민속, 불교 등으로 구분되어 있고,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회수한 유물을 전시하는 특별전시관도 있다.

 

 

▼ 장승(長丞) ~
지방마다 부르는 이름이 약간씩 달랐다. 서울, 경기 등 중부지방에서는 장승이라 불렀는데, 이는 오래 살아 없어지지 않는다는 장생불사(長生不死)의 뜻을 가진 것으로 도교(道敎)의 영향을 받아 지어진 이름이다. 가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길가, 동구 밖, 서낭당, 사찰의 문전에 서서 큰 눈을 부라리며 길목을 지키는 돌이나 나무로 만든 장승 등을 볼 수 있다. 장승은 마을을 찿는 낯선 길손을 위해 곳곳에 어디까지 거리가 얼나 남았다는 이정(里程)을 표시해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주기도 하고, 마을 입구에 수문장 처럼 버티고 서서 무서운 병이나 괴질이 마을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활을 하기도 하며, 성문(城門)이나 병영에 세워져 공공시설을 지켜주는 역활을 하기도 했다.

 

 

 

▼ 망주석(望柱石) ~

무덤을 꾸미기 위하여 무덤 앞의 양쪽에 하나씩 세우는 돌로 만든 기둥을 말한다. 어느 시기부터 무덤에 사용되었는 지 확실치 않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망주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신라 왕릉 중에서 괘릉(掛陵)과 흥덕왕릉(興德王陵)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와 조선시대의 능원은 물론 사대부(士大夫)의 무덤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발견되고 있다.

 

 

▼ 솟대 ~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나무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혀 마을의 신앙대상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음력 정월 대보름에 동제(洞第)를 모실 때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농사의 풍년을 위하여 마을 입구에 솟대를 세우는데, 홀로 세워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장승, 선돌, 탑(돌무더기), 신목(神木) 등과 함께 세워 마을의 하당신(下堂神)으로 또는 상당신(上堂神)이나 주신(主神)으로 모셔졌다.  솟대신앙의 유형은 개인의 가정에서 임시로 정축이나 기도를 위해 세우는 이름 없는 신간(神竿)과,  마을의 입구나 경계 그리고 성역에 항시적으로 세우는 속칭 솟대, 거릿대, 수살목이라 불리는 신간,  그리고 과거에 급제한 자가 자기 집 앞이나 조상의 산소에 세우는 속칭 화주(華株)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솟대 모양은 보통 긴 장대 꼭대기에 세 갈래로 된 나뭇가지 위에 세 마리의 새를 조각하여 올려놓았는데,  이 솟대 위의 새는 일부지방에서는 까마귀나 기러기, 따오기, 까치 등으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물새류의 철새인 오리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러나 곳에 따라서 농기(農旗) 모양으로 꿩의 깃털이나 볏짚을 꼭대기에 장식하고 헝겊을 둘러 만들었거나 꼭대기에 용을 그리거나 새겨서 붉은 칠을 한 것도 있다. 또 일시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무 것도 조각하지 않고 다만 대나무 가지나 긴 장대 또는 소나무 가지를 서낭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솟대가 수호신의 사징이라는 점과 성역의 또는 경계나 이정표 등의 기능이 있는 것은 장승과 마친가지이다. 이러한 솟대가 안정된 농경마을을 사회 구성의 기초단위로 했던 우리의 역사 속에서 언제부터 농경마을의 신으로 모셔졌는 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북아시아의 솟대와는 달리 우리의 솟대는 농경마을의 신앙체계와 접목되어 마을의 안녕과 수호를 맡고 농사의 풍년을 보장하는 마을신의 하나로서 농경문화에 적합한 여러 다양한 형태와 기능으로 변모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벅수(法首) ~
장승을 호남지방이나 영남지방에서는 벅수라 불렀다. 또 어떤 곳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 당상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지역에 따라서는 하루방, 천하대장군, 수살, 돌미륵, 신장이라고도 불려졌다. 마을 사람들은 편의에 따라 소나무, 밤나무, 오리나무 또는 돌로 적당히 깍아 장승을 만들었는데,  얼굴은 귀신이나 장군처럼 그리거나 조각하고, 때로는 노인이나 선비, 문무관, 미륵, 부처의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는 등 일정한 형식이 없었다.

 

장승은 마을 공동신앙의 주체로서 마을 사람들의 소망에 따라 한 해 농사의 풍년을 빌고, 고기잡이가 잘되고, 각종 사고를 없애며 병액을 막아주도록 하는 소임을 부여받았다. 또 마을 사람들은 가족의 건강과 소원성취,합격과 무운장도 등의 여러 가지 일들을 빌면서 장승의 발 밑에 돌이나 소나무 가지를 던져 쌓거나 한지, 헝겊, 오색비단, 짚신 등을 매달기도 했는데, 곳에 따라서는 서낭 제사나 당산굿을 하는 등 신앙의식이 행하여지기도 했다.  이렇게 장승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민간신앙 대상의 주체로써 이 땅에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잡아 왔는데, 지금도 전국 각처에 벅수골, 장승골, 장승백이, 짐대터 등으로 남아 있는 지명은 모두 이 장승과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사대부(士大夫)묘 ~
사대부란 고려, 조선시대 문관 관료를 총칭하는 말이다. 4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을 대부(大夫)라 하고 5품 이하를 사(士)라고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문, 무 양반관료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으로 쓰였는데,  이들은 관직에 있을 뿐만 아니라 관직을 그만둔 뒤에도 죽을 때까지 특권을 가졌고, 죽은 뒤에도 그 관직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았다. 사진의 묘(墓)는 원래 전라남도 광산지방 수몰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후손들이 이장하는 과정에서 묘비 등의 석물을 기증하게 되어 이를 복원한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피장자인 김동구(金東龜)는 죽은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추증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묘비에 그의 행장(行裝)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비를 세운 연대가 숭정기원후병신5월(崇禎紀元后四丙申五月)이고,  자신들을 현손(玄孫)이라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피장자는 18세기 중반 경에 살았던 인물로 추정된다.  통정대부는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품계로서  피장자의 관직인 공조참의(工曹參義)는 오늘날의 차관보급에 해당하는 벼슬인데,  서두에 증(贈)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벼슬을 한 것이 아니라 사후에 추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추증을 받는 경우는 생전에 자신이 벼슬을 하지 않았더라도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거나 학문적으로 조정해서 인정할 만한 업적을 이루었을 때, 또는 품계가 낮은 벼슬을 했더라도 승지(承旨)나 사괸(史官)과 같은 시종(侍慫) 벼슬로 그 공로가 인정되었을 경우에 사후에 추증받게 된다. 또 자손들이 2품 이상의 벼슬을 했을 경우에 4대 조상까지 추증받게 되는데, 올라 갈수록 한 품계씩 낮추어 추증한다.

 

따라서 피장자는 그들의 현손들이 2품 이상의 벼슬에 나감으로써 추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사대부 묘는 상석과 혼유석, 향로석, 그리고 문인석과 망주석, 석수 등을 무덤 전면에 배치하여 피장자의 신분을 과시했는데, 이 묘에서는 피장자가 죽은 당시에는 비석이나 석물을 배치하지 않았던 것 같고, 그 후 약 100여 년이 지나 추증을 받아 현손들이 묘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비석과 석물들을 새로 만들어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정낭 ~
정낭은 대문이 없는 민가 입구에 정주석(서너개의 구멍이 뚫린 커다란 돌)을 세워 출입 정보를 알리는 기능이 있다. 이것은 제주 특유의 생활 풍습으로 집에 대문이 없기 때문에 마당에 널려 있는  날래인 보리나 조등 곡식을 소나 말이 들어와서 먹지 못하도록 나무를 걸칠 것을 사용하였으며, 나중에는 집안에 사람의 존재 유, 무를 외부에 알리는 정보 표현 수단까지 겸하게 되었다. 하나가 걸쳐 있을 때에는 가까운 곳에 있으며, 두 개가 겹쳐 있으면 한참 있다가 돌아오며, 세 개가 걸쳐 있으면 저녁 무렵에야 주인이 돌아온다는 표시이다. 걸쳐진 것이 없으면 사랑이 있으니 방문하여도 좋다는 의미라고 한다.

 

 

 

제주(濟州) 통시 ~
제주도는 삼국시대에는 탐라(耽羅)라고 불려지다가 고려 말부터 오늘날처럼 제주도로 불려지게 되었다. 제주도 지역에서 돼지 사육은 육지와는 달리 특이한 방식을 택하고 있다. 집 안의 공동시설인 화장실의 지하 바닥 한 켠을 이용하여 돼지를 사육하는데 집 안 사람들의 
배변을 돼지의 먹이로 활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농가에서는 자연스럽게 인분을 처리할 수 있어 일손을 들게 되고,  돼지가 남긴 거름은 토지를 더욱 비옥하게 만들어 작물의 성장을 도와 밭농사를 풍작으로 만든다. 또 인분을 먹고 자란 돼지는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좋아 옛날부터 '제주똥돼지'라는 이름으로 좋은 가격에 팔리게 됨으로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의 시설은 '제주똥돼지'를 키우던 실물로  제주에서 흔한 화산석인 현무암을 이용해 만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 전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제주 농가의 전통 화장실로 일명 '제주통시'라고 불려지는데, 제주도 한 농가로부터 기증받아 복원해 놓은 것이다.

 

 

 

 

 

 

 

 

 

 

 

 

 

 

 

 

 

관솔대 ~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관청이나 사찰의 야간 행사 때 블을 피워 그 주변을 밝히는데 사용되었다. 관솔이란 소나무의 가지를 자른 부분의 끝에 송진이 묻어있는 부분을 이르는데, 기름기가 엉켜있기 때문에 불이 잘 붙고, 오래 타며 불길이 세다. 산간지방에서는 관솔을 따로 모아 두었다가 집안에 불을 밝히거나 각종 행사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

 

 

 

 

 

 

 

돌짐승과 함께 ~
돌로만든 동물 모양의 상(像)으로 좁게는 능묘 앞이나 무덤 안에 놓아두는 석조 동물상을 가리킨다.  넓게는 무덤의 호석(護石)이나 석탑의 기반부 등에 옿여 있거나 부조되어 있는 동물 조각을 포함한다. 돌짐승의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 한(漢)나라 이후 후장의 풍습에 따라 묘를 수호한다는 뜻에서 짐승을 조각하여 묘 앞이나 둘레에 세웠던 것에서 찿을 수 있다.  그리고 당나라 때 이러한 풍습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었지만 한국에서는 그 이전에 이 풍습이 전해져 석수가 조성되었던 것으로 여긴다. 현재 가장 오래된 작품은 삼국시대의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석수이다. 통일신라 이후 묘 앞에 석수를 세우는 풍습이 성행하였으며, 현존하는 석수 중에는 석사자상이 많은데 성덕왕릉, 괘릉, 흥덕왕릉 앞의 석사자상이 유명하다. 사자 이외의 동물상으로는 석마, 석양, 석우 등이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의 능묘 앞의 수호상으로서 많이 조성되었으며, 십이지상을 조각하기도 하였다. 궁전 앞에는 석해태를 세워 화재 예방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석수로서 당시의 조각 양식의 경향을 알 수 있어 한국 조각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구유 ~
소나 말, 돼지, 개 등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의 하나로 여물통이라 한다. 나무로 만들 때는 통나무 토막의 한 쪽만 거죽을 떼어내고 양쪽 거죽의 속을 파내어 만든다.  지방에 따라 구시, 구이 등과 같이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그러나 돌로 만든 구유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데, 이는 나무에 비해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밥을 담아 두는 밥 구유가 사찰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한국 불교와 돌 ~
사찰은 부처님의 존상(尊像)을 봉안하고 스님들이 머무르는 곳이며, 모든 불자의 수행과 전법의 중심이 되는 곳을 말한다. 탑은 본래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이나 한국에 불교가 들어와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대신 불경이나 불상 등을 봉안한 탑도 건립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불탑이 처음 세워진 것은 대략 삼국 시대 후기인 6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존하는 1천여 기의 탑 가운데 대부분이 석탑이고, 양식에 있어서도 다양한 기법을 보이고 있다. 불교의 전래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주검을 화장하여 그 유골을 거두는 장골(藏骨)이라는 불교식 장제가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부도가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선종이 크게 성행함에 따라 스님들의 지위도 높아져 불탑처럼 스님의 부도도  많이 건립하게 되었다. 석등은 대개 사찰의 중앙에 불탑과 더불어 배치되는데, 법당이나 불탑 앞에 설치하여 부처님의 광명을 상징한다는 뜻에서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부터는 왕이나 고관들의 무덤 앞에도 간간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불교가 쇠퇴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무덤 앞에 세워 장명등이라 일컬었다.

 

 

 

석불입상 (고려시대 11세기) ~

 

석조미륵불입상 (고려시대 12세기) ~

 

석조미륵불입상 (고려시대 13세기) ~

 

 

무인석(武人石) ~
무인석은 무덤을 지키기 위하여 무덤 앞에 배치하는 석물의 하나로 석수, 문인석과 함께 능묘를 수호하는 조각물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무인석은 일반적으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어 무장을 한 무관(武官)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칼을 들고 있다. 무인석에 나타나는 칼은 앞으로 두 손을 모아 칼을 땅에 짚고 있는 형상이 보통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칼을 허리에 차거나 허리에 찬 칼을 당장 뽑을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도 있다. 능묘 주위에 무인석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의 전한대(BC206~AD24)부터 시작되었는데,  묘 앞에서 석사(石祠)나 석궐(石闕)을 세우고,  신도의 양쪽에 무인석과 문인석, 석수를 함께 세워 묘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러한 습속은 후한 대애 이르러 후장의 풍습이 널리 퍼지자 일반화되기 시작하여 청나라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리나라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8세기 중반 경에 이르면 능묘제도가 정비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신라 성덕왕릉과 괘릉, 흥덕왕릉의 무인석을 들 수 있는데, 특히 괘릉의 무인석은 서역적인 용모를 하고 있어 주목된다.  즉, 움푹 들어간 눈, 메부리 코,  짙은 구레나루 등은 이국인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데,  당시 활발했던 신라와 서역 사이의 관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영향을 받아 능묘 앞에 문인석, 석수와 함께 무인석을 세웠으나 초기 무인석은 사라지고 문인석만 배치하다가 14세기 중엽 충목왕의 무덤인 명릉(明陵)에서 다시 문, 무인석이 함께 배치되어 나타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능묘 앞에 무인석이 계속 배치되지만 고려시대에 비하여 조각수법이 현저히 퇴화되어 조각 작품이라기 보다는 상징적인 의물로 남게 되었다. 무인석은 문인석, 석수와 함께 능묘를 옹위하는 수호자로서 당시의 조각양식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능묘제도의 변천을 알게 해주는 좋은 자료로서 우리나라 조각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월연석 ~
월연석은 무덤을 지키는 의미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무덤에 묻힌 사람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주로 귀면이나 거북, 봉황 등이 조각되었으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좀 더 다양한 문양들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월연석에서 나타내는 문양 가운데 포도는 자손들의 번성을, 봉황이나 거북은 후손들의 입신출신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조각되었다.  특히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일대의 해안가에 많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 고석(鼓石) ~
무덤 앞의 상석을 받치는 북처럼 만든 석물로서 일명 '북돌'이라고도 한다. 겉면에서는 귀면(鬼面)이나 여러 문양들이 조각되어 있다.

 

 

 

비갈(碑碣) ~
비란 어떤 사적을 후세에 오래토록 전하기 위해 나무나 돌, 금속 등에 글을 세겨놓은 것을 말한다. 비는 그 것을 세울 당시 사건이나 사회상을 기록하고 비를 세우는 정확한 연대를 밝혀주기 때문에 여러 분야의 중요한 연구자료가 된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시대에 당의 풍습이 그대로 전해져 능묘비나 탑비에만 격식이 적용되었는데, 귀족들에 대한 특별한 규정이 없어  이들은 주로 묘지명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경국대전에 정3품 이상은 신도비를 세우고,  그 이하는 묘갈을 세우도록 규정함으로서 비로소 비갈이 보편화 되었다.


석문은 그 형태에 따라 비와 갈로 구분한다. 비는 석재를 방각형으로 깍아서 만들고, 위에 이수나 가점석을 올린 것이고, 갈은 개석을 올리지 않고 비신의 상부를 둥글게 처리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수를 갖춘 것도 갈이라 하고, 이수가 없는 것도 비라 하기도 하여 구별이 없어지게 되었다. 

 

석비의 형태는 비석을 받치는 대좌, 비문을 새기는 비신, 그리고 비신을 덮는 개석 또는 관석으로 이루어진다. 대좌는 비신 받침으로 거북 모양을 조각한 귀부와 네모로 깍은 방부의 두 가지가 있는데, 직사각형의 홈을 파서 비신을 끼우게 되어있다. 대좌로 귀부를 많이 쓰게 된 것은 거북의 수명장존을 상징하는 신령스런 영물로 인식되어 비문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상징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비신은 대개 정육면체로 깍아 세우는데 비문은 주로 앞뒤의 음양면에 새기며,  비신의 상단부 또는 이수에 비의 명칭을 새긴다.  이수란 이무기를 새긴 개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세 쌍이 서로 뒤엉킨 능주 형태로 새겨졌다.  이수가 변형되어 단순히 이수의 윤곽만을 나타내거나 꽃잎의 문양만을 새긴 것을 관석이라 하는데,  대개 꽃이 피는 형상을 취하여 그 꼭대기에 화관식이라고 불리는 화심형의 꼭지를 두는 것이 보통이다. 또 이수나 화관석 위에 지붕 모양의 개석을 가청석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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