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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발길따라~

세중 옛 돌박물관(용인) .... 2014.10.26

by 마루금 2014. 12. 2.

 

동자들의 마을 ~
상투를 튼 두 어린이를 망주석 안쪽으로 마주보게 세운 석물로 여러 가지 석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종류와 형태를 보여준다. 불교에서 동자는 부처님이나 보살, 명왕, 산신 등을 모시는 어린아이다. 때로는 부처, 보살이 직접 동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동자석이 반드시 불교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도교, 무속, 유교 등과 같이 여러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어 조각적으로도 풍요롭고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 역활 또한 무덤의 수호신 마을의 지킴이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민속 신앙 속의 돌 ~
민속 신앙이란 민간에서 자연적으로 전승되어 온 신앙으로 교조, 경전과 체계화된 조직 없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 지 알 수 없는 신앙을 뜻한다. 이와 같은 민간 신앙의 한 형태로 기자 신앙이나 남근 신앙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 가부장 사회에서는 가문을 잇는 자로서 남아를 선호하는 풍조가 유행하였다. 이에 따라 부녀자들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사찰을 찿아 불공을 드리거나 남근석과 여근석에 잉태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미륵불이나 기자석을 신앙한 데에는 이같은 남아 선호 사상이 일정한 역활을 하였다.  그리고 마을에 따라 남근석과 여근석을 함께 두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신당은 민간 신앙에서 신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를 말하며, 당집 혹은 당산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신당에서 무당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노래와 춤으로 인간의 불행을 막고, 복을 불러오는 굿을 하기도 한다. 굿에는 신관, 우주관, 영혼관, 내세관 등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에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 민불 ~
전문 장인에 의해 조각된 세련된 형태의 불상에 비해 민간에서 제작되어 믿음의 대상이 되었던 민불은 불상의 기본적인 형태만 살린 것이 일반적이다. 이 불상도 역시 민간에서 만들어진 민불로서 백성들의 소박한 표현미가 제대로 반응된 좋은 작품 받고의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 흥인군 묘 ~
이 무덤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의 무덤을 후손들이 다른 곳으로 이장해 가면서 무덤에 장식되었던 석물들을 기증받아 이 곳으로 옮겨 복원해 놓은 것이다.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1815 ~182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양백, 호는 산향(山響)이다. 남연군 구의 아들이고 흥선대원군 하응의 형으로 흥인군에 봉하여졌으며, 민씨정권의 주요 인물로서 아우인 대원군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1865년(고종 2) 4월 영건도감제조를 지냈고, 9월에는 관의금부사, 호위대장 등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실권을 잡자 관직에서 물러나 등용되지 못하다가 1873년에 대원군이 실각하자 다시 요직에 등용되기 시작하여 그 해 12월에 좌의정이 되었고, 1878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1880년에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어어 영의정이 총리대신으로 바뀜에 따라 총리대신이 되었으나 1881년 유림들의 영남만인소로 인해 사직하고,  한직인 영돈녕부사를 지냈다. 1882년 잠시 광주부유수를 지낸 뒤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나 그 해 6월 10일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대원군이 사주한 폭동 군인들이 그의 집을 습격했는데 이 때 피살되었다.

 

일본에 갔던 김흥집 일행이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서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이른바,  연미론을 일으키자 이를 적극 수용하여 고종으로  하여금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도록 결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주화, 척화, 개국 등에 대하여 뚜렸한 주관없이 모두 옳다고 함으로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유유정승이라고 불렀다. 시호는 충익이었으나 1905년에 문충으로 다시 내려졌다.이 묘의 문인석은 다른 묘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매우 세련되고 날렵한 동작을 취하고 있으며, 비교적 정교하게 조각되어 한 눈에 피장자의 신분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이렇듯 왕족들의 무덤은 일반 사대부의 묘 보다는 훨씬 더 격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외형적인 규모에서부터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3층 석탑 (고려초기 11C) ~

 

사랑의 샘(동전을 던져 넣는 곳) ~

 

 

석등과 장명등 ~
석등은 예불을 올리는 의식에서 뺄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일 뿐만 아니라 사찰에서 실시하는 모든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의 하나로 여겨져 일찍부터 제작되었다. 장명등은 분묘 앞에 세우는 석조등의 일종으로서 불을 밝힐 수 있도록 돌로 만든 등이다.

 

 

 

 

 

 

 

 

 

 

 

 

 

 

 

 

해시계 ~

 

주춧돌 ~

 

 

맷돌 ~

 

돌절구 ~

 

돌확 (절구의 구멍으로 사용되는 부분) ~

 

 

떡판 ~

 

우물 ~

 

약연(한약재를 갈아 부드러운 가루를 만들 때 사용)~

 

돌세관(사찰의 법당 옆에 물을 담아 놓을 수 있도록 세워논 기둥) ~

 

 

돌화로 ~

 

 

석조약사여래입상(통일신라 9세기) ~

 

 

일본 유출 환수 문화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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