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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산길따라~

지리산 묘향대 ...........2013.6.6

by 마루금 2013. 6. 8.

산행날씨 : 평지기온으로 17℃ ~ 31.5℃,  맑음.

산행코스 : 반선 ~뱀사골 ~함박골(이끼폭포) ~묘향대 ~폭포수골(박영발 은신처) ~뱀사골 ~반선 

산행거리 : 도상 16Km  

산행시간 : 아주 느긋하게 9시간 

산행인원 : 40명쯤 ~


오늘은 현충일,

새벽 달빛을 받으며 출발, 뱀사골 지곡을 탐방,

비탐지 이끼폭포, 묘향대, 박영발 비트 등을 차례로 만나면서 의미가 깊었던 날이다.

 

이끼폭포 가는 길 ~

뱀사골에서 화개재로 오르다가 재승교를 지나 250m쯤에서 .. 무지개 다리를 넘기 전 무명 아치형 다리의 우측 출입통제 푯말 뒤쪽으로 진입, 함박골을 따라 약 30분쯤 올라가는 곳에 있다. 묘향대에서 중봉갈림길을 지나 동쪽 함박골 계곡을 따라서 약 1시간 20분쯤 내려와도 된다.

 

이끼폭포 ~
'실비단폭포'라는 이름도 있다. 지리산 반야봉 중봉과 심마니능선 사이 함박골에 위치해 있다.
남한에서는 산청, 청도, 남원 등 3곳 정도가 있는데, 그 중 뱀사골 이끼폭포가 가장 으뜸이다.

 

묘향대 가는 길~

지리주능선의 삼도봉에서 반야봉으로 오르기 전 소금장수무덤에서 표지판 뒤쪽으로 진입하는 방법, 반야봉을 지나 중봉 헬리포트에서 무덤 옆 구상나무 부근으로 내려가는 방법, 뱀사골에서 함박골이나 폭포수골로 진입하는 방법 등이 있다.

 

묘향대(妙香臺) ~

행정구역상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소재. 해발고도 1485m, 남한의 사찰 중 가장 높은 곳이다.(설악산 봉정암 1224m) 반야봉 중봉 아래의 작은 암자로서 예전 토굴이었으나 화엄사 불사를 완성한 도광스님이 현 절집을 지었다. 뱀사골 전체를 발치에 둔 장대한 풍광을 지닌 곳, 한국 불교의 마지막 전설로 불린다. 근처 금강굴이 있다는데 아무도 그 위치를 알지 못한다.

 

묘향대 석간수 ~

한바탕 땀과 씨름하고나면 기다려 지는 것이 물이다. 절집을 돌아서 큰 바위 밑으로 바짝 다가서면 나타나는 옹달샘, 목말라 있던 갈증을 여기서 한방에 해결한다. 

 

문수보살의 문수를 한역하면 묘수(妙首), 묘덕(妙德), 묘길상(妙吉祥), 다시 말해서 문수의 체(體)는 바로 묘유(妙有)라는 것, 향상 변함이 없는 자성(自性)자리를 가리키는 것이니 이 묘유를 묘향(妙香)이라 일컬은 것이다. 묘향대는 반야봉 정수리에서 묘시 방향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영발 비트 가는 길 ~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 비트는 반야봉 사면에 있다. 묘향대에서 내려서는 방법은 아래쪽 돌담 부근에서 원시림으로 진입,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나타난다. 뱀사골에서 오르는 방법은 유유교 윗쪽 이정표(반선 7.2Km / 화개재 2Km) 부근의 우측 계곡 건너 제방처럼 둘처쳐진 너덜을 올라가면 또다른 계곡이 보이는데, 이 계곡이 폭포수골이다. 폭포수골 계곡을 따라 여럿의 폭포를 거쳐 오르고 나면 물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11시 방향의 고도 1330m 부근에 위치해 있다. 찿아내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박영발 비트 ~

박영발 비트 ~

소년빨치산 출신 김영승씨가 발견한 박영발 비트는 발견당시 등사기 잉크통의 잉크도 마르지 않은채 발견 되었고,  통신선로나 전용 전지밧데리 등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비정규탐방로에 위치해 있어 지리메니아가 아니면 찾아드는 곳이 아니지만 가능한한 역사의 현장이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존하여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 이다. 불과 이십여 년 전만해도 거론조차 못했던 공산당 빨치산, 이념이 서로 다른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이다.

 

동굴 내부 ~

박영발 ~

경북 봉화군 출신.

1930년대 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좌익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1940년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받았고, 1945년 경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1945년에 태평양 전쟁이 종전, 적색노조운동을 벌이면서 토목노동자로 일했고, 미군정 초기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토목노조위원장을 맡고, 집행위원도 겸임했다.

1946년에 남조선로동당을 창당하여 간부가 되었다.
1947년 경에 월북하여 박헌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했다.
1950년 한국전쟁 시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남하 했을때 결성된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에 올랐다.
          그러나 전세가 역전되어 인민군이 후퇴하자 전남지역에 남아 김선우와 함께 유격전을 지휘 하였다.
           박영발은 한국전쟁 중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이현상의 남부군활동을 견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51년 남부군의 이현상이 제안한 유격대 개편안을 방준표와 함께 반대하는 등 이현상과는 대치되는 지점에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1953년 이현상이 사망하기 직전 제5지구당이 해체될 때도 이현상을 비판하여 평당원으로 강등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4년 1월 중순에 지리산 뱀사골에서 토벌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월에 자살한 것이 아니라 2월 말에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는 등, 정확한 사망 시점과 경위에 대해서는 증언이 다소 엇갈린다.
           토벌대를 이끈 백선엽은 공산주의사상에 대한 정신력이 대단했던 인물로 평가한 바 있다.
2003년 평양 애국렬사릉에 이현상, 방준표 등과 함께 박영발 가묘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폭포수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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