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행*여행/산길따라~

문수산(경기 김포) ........2012.3.31

by 마루금 2012. 4. 1.

산행코스 : 산림욕장 주차장 ~성곽 ~팔각정 ~성곽 ~헬기장 ~문수산 정상 ~북문 능선 ~북문 ~산림욕장 주차장

산행거리 : 도상 4.4Km 

산행시간 : 총 1시간20분

산행은 홀로 ~


강화 나들길 답사를 마치고 시간이 남아서 돌아오던 길에 전망이 매우 뛰어난 문수산을 올랐다. 강화도와 북한 개성땅이 훤하게 보이며,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교하지점, 그리고 서해바다까지 두루 조망되는 곳이다. 늦은 시간에 올라 코스를 짧게 잡았다. 산정에서 갑짜기 날씨가 이상해져 눈발이 날리기도 했고, 심한 황사로 입속에서 돌가루가 씹히기도 했다. 

 

물건너 강화도 ~

물건너 마니산과 진강산 ~

눈발이 휘날리는 팔각정 ~

문수산 정상부 ~

문수산성(文殊山成) ~

명칭은 문수사(文殊寺)에서 유래하였다. 강화도 갑곶진(甲串鎭)을 마주보고 있는 문수산의 험준한 정상부에서 서쪽의 산줄기를 따라 내려가, 문수골과 산성포의 두 계곡을 포용하여 해안지대를 연결한 포곡식의 산성으로, 현재 해안쪽의 성벽과 문루(門樓)는 없어지고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은 본래의 것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 입구를 지키기 위해, 1694년(숙종(肅宗)20)에 축성 되었고, 기록에는 둘레가 5,529보이고, 여장이 2173첩(堞)에 서문, 남문, 북문이 있었으며, 강화부에 소속되어 별장 한사람과 군관 161명, 사병 56명, 돈군 6명, 수첩군 80명, 모입군 72명 등을 두어 지키게 했다. 1812년(순조(純祖)12)에 대대적으로 중수, 다듬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뒤에 여장(女墻)을 둘렀다. 당시 성문은 취예루(取豫樓), 공해루(控海樓) 등 3개의 문루와 3개의 암문(暗門)이 있었다.  이 가운데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했다.

 

문수산의 격전 ~

1866년(고종(高宗)3)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룬 곳으로 유명하다. 1866년 9월7일 프랑스군의 로스제독이 규리르호(號)를 기함(旗艦)으로 하여 포함과 해방함 및 통보함 등 7척으로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갑곶진에 상륙, 이튿날 강화성을 점령하고, 18일에는 이곳 문수산성으로 침입, 이때 문수산성에는 봉상시사(奉常寺事) 한성근(韓聖根)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명령으로 광주(廣州)의 별파군(別破軍) 50명을 이끌고 수비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작은 배로 성의 남문 밖에 다달아 정박하였는데, 한성근이 이끄는 우리 수비군이 프랑스군을 기습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성근이 후퇴, 포수 4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 1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군은 2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입자 성안의 민가 29호를 불살라 버렸다. 이 격전으로 해안가의 성벽과 문루 등의 시설이 파괴되고 성안이 유린되었다. 1995년에 일부가 조사되어 길이 16m, 너비가10m 규모의 치성(雉城)이 서남쪽 끝에서 확인 되었고, 평탄지에서 성벽이 내외겹축 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홍예문(虹霓門) ~

문수재단 ~

전에 보지 못했던 '문수재단'이란 석물을 헬기장에다 설치해 놓았다. 그 곁에는 안내판도 있는데, 어느 새 빛이 바래서 허름해졌다. 안내판에는 이 헬기장이 병영터였슴을 설명하고 있다.

 

문수산 정상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장대지'라고 하며, 문화재 복원을 위해 통제하고 있다.

.

 

문수산(文殊山) ~

해발 376m의 높이로 한강 유역과 경기 서해안 지역을 나누는 분수령이 되는 한남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다. 한남정맥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내달려온 한남금북정맥에서 금강 북쪽의 산줄기가 되는 금북정맥과 나뉘어 갈라져 나온 산줄기. 이곳 김포 문수산이 바로 저 백두산까지 연결, 닿아 있음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김포시를 지나는 48번 국도를 줄곧 따라가다 보면 강화대교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으로 문수산 산림욕장과 문수사 이정표가 길손을 반긴다. 알게 모르게 지나는 넓어진도로 한쪽 모두가 문수산 자락인 셈이다. 한편 정상부에서는 서쪽 산줄기를 따라 문수산성이 띠를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비솔산(比率山) 혹은 비아산(比兒山), 통진산(通津山)이라고도 불려온 산으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려말 몽고군은 이 산에 올라 강화를 바라보고 건너보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수점, 물건너는 북한 개성땅 ~

강화도~

강화대교 ~

강화도(좌)와 북한의 장산곳(우) ~

문수산의 암질 ~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고 하는 사질역암(礫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래나 점토가 자갈과 섞여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응축된 돌이라고 하는데 마이산 암질도 이에 속한다. 문수산 바위를 잘 살펴보면 크고 작은 자갈이 돌에 박혀서 마치 콘크리트를 한 것 처럼 보인다. 자갈이란 냇물이나 강바닥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깎이고 갈려서 모양이 둥글고, 표면이 반들반들해진 돌을 말하는데. 따라서 문수산이 오랜 옛날에는 평지이다가 지각변동에 의해 땅이 융기되어 산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곽의 재료들 ~

문수산 지구에 구성된 돌은 어디를 봐도 역암뿐이다. 그러나 산꼭대기에서 바라본 성문으로 쓰인 재료는 화강암이다. 홍예문도 마찬가지다. 화강암은 눈을 씻고 찿아봐도 볼 수가 없는 곳에서 과연 성곽이 건축되던 그 시대에 이런 돌을 산꼭대기까지 운반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성문의 재료들로 보아 그리 오래된 것으로 보여지질 않는데, 만약 복구를 위해서 새로이 증축을 한 것이라면 이런 점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강화도(좌)와 북한의 장산곳(우) ~

북문 ~

 

 

728x90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