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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발길따라~

강화나들길 3코스 .... 2011.10.03

by 마루금 2011. 10. 4.

 

 

 

날씨 : 5.4℃ ~ 18.4℃, 맑음 
진행코스 : 길상농협~온수성당~강남중~길정저수지~길직1리 마을회관~이규보묘~연등국제선원~부대~곤릉~석릉~인천카돌릭대~가릉 

도보거리 : 16.2Km
소요시간 : 빠른 걸음으로 4시간 50분(알바 1시간)
인원 : 반은 나홀로, 나머지 반은 현지에서 만난 어느 나그네와 함께 ~

교통 : 길상농협까지 승용차로.../ 가릉에서 길상농협까지 택시 이용

 

개천절을 맞아 강화나들길을 다녀왔다. '능묘 가는길'이란 테마로 온수성당과 이규보 묘, 고려왕릉 세 곳을 둘러보는 나들길이다. 길상면 온수리 시내에서 출발하여 강화 내륙을 거치면서 한적한 마을과 들판을 지나고, 진강산의 호젓한 숲길을 감싸 돌면서 가릉에서 끝맺음하게 되는 코스다.  

 

 

 

 

 

길상농협 앞에서 출발한다. 강화나들길 팜플릿에 기록된 공영주차장은 네비로 찾을 수 없다. 승용차를 이용할 시 네비로 길상농협을 찍고 가는 것이 편하다. 농협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어 주차가 용이하다.

 

 

 

 

 

광장 앞 도로에서 좌측으로 꺾는다. 대략 200미터쯤 도로따라 진행하면 '강화온수리성공회' 이정표가 보이고, 여기서 우측 진입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한옥이 보이는데 이 건물이 바로 강화온수리성공회 성당이다.  

 

 

 

 

 

강화 온수리 성공회(江華 溫水里 聖公會)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2호. 소재는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3번지.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 건물로서 우리나라의 초기 서양 기독교 교회양식의 건물이다. 성당은 정면 9칸의 본당과 정면 3칸, 측면 1칸의 문루(정면 3칸 중 중앙 1칸을 2층 조루로 삼은 문루로 사용)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을 활용하여 종교적인 성당 건축 방법과 공간 구성을 하여 확립한 동서 절충식 강당형의 목조건물이다.

 

 

 

 

강화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 소재는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7번지. 영국인 선교사들이 1898년 온수리에 선교를 시작한 지 8년 후인 1906년에 길상준 신부가 건축한 건물이다. 1933년 한차례 중수가 있었지만 건축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사제관의 평면구성은 전통한옥이지만 내부는 매우 다양하게 조합되어 영국인 신부의 한국전통주거문화에 대한 적응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천정은 구조미를 살리기 위해 노출시켜 목재의 질박한 자연미를 표현하였다. 건물 형식은 'ㄷ'자형 기와집 구조다.

 

 

 

 

 

성당에 들렀다가 다시 되돌아나와야 한다. 삼거리에 '행복이 머무는 공간'이라는 문패가 있는데, 볼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 연밭을 지나서 마을 도로를 빠져나가면 큰도로와 만나고, 이곳 횡단보도를 건너 마을 진입로를 따라 들어간다. 정면 멀리 진강산과 덕정산이 조망된다.  

 

 

 

우측 멀리 진강산

 

 

마을 도로를 지나다가 보호수로 지정된 거목을 만난다. 수종은 느티나무, 수령 200년, 나무둘레 5,5m, 높이는 21m, 지정일 1982.10.15, 고유번호 4-9-37이다. '해랑대느티나무'라 불린다.

 

 

 

 

마을 촌로 두 분께서 멀찌기 펼쳐져 있는 밭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다. 농군의 첨단 패션에 밀집모자가 썪 잘 어울려 보인다. 모쪼록 풍년이시길 ~

 

 

 

 

 

강남중학교 앞을 지나면 비포장길로 변한다. 이곳은 강화지맥 답사 때 걸어봤던 도로라서 낯설지가 않다. '들꽃 피는 언덕'이라 적힌 작은 간판을 지나면 잠시 후 길정저수지가 보인다. 

 

 

 

 

강화지맥이 덕정산으로 이어진다. 길정저수지를 지나면서 진강산(좌)과 덕정산(우)을 정면에 두고 걷게 된다. 중간에서 정자도 만나며, 고구마 밭도 실컷 구경하면서 지나간다. 길찍 1리 마을회관 갈림길을 만나면 강화지맥과 헤어진다. 

 

 

 

정자

 

고구마밭 

 

길직1리 마을회관 갈림길

 

 

길찍 1리 마을회관 방향으로 진행하다 보면 최근 신설 포장된 도로를 만난다. 여기서 안내표시가 사라지므로 잠시 혼란을 겪을 수도 있다. 큰 도로를 횡단해서 다음 안내표시가 보일 때까지 직진이다. 무덤이 있는 곳 사거리에서 이정표를 만나고, 여기서 우측으로 꺾어 진행하면 강화마니포도농원과 사슴농장을 차례로 지난다. 이 도로 이름은 '피미길 32번'이다.

 

 

 

 

 

 

 

길찍 1리 마을회관 앞 삼거리에서도 길 안내표지가 사라진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 ~ 처음부터 안내표지를 안 한 건지, 아니면 누가 치워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인삼밭 뒤로 그럴싸한 건물이 보여서 무작정 들어가 보는데 다행히 길찍 1리 마을회관이다. 제대로 찾아서 다행이라 여기지만 이후 여러 번 곤란을 겪었다. 

 

 

 

 

 

이규보(李奎報) 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5호 / 소재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산 15번지. 이규보(1168~1241)는 명종 19년(1191) 진사시에 합격한 뒤 당시 실권자인 최충현에게 기용된 '문인으로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동명왕 편을 통해 고구려인의 큰 포부와 활동을 읊어 민족의식을 크게 떨쳤다. 또 몽고군의 침입을 받게 되자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대장경을 조판할 때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을 지었고,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이 있다. 묘역의 석물들은 고려 강도시기의 대표적 유물들이다.

 

 

 

 

 

 

 

 

 

'이규보 묘'를 구경하고 나서 첫 알바를 했다. 연등국제선원을 지나서 까치골로 넘어가야 하는데 도무지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규보 묘를 빠져나와서 이쪽저쪽으로 도로를 따라 가보지만 당최 안내표지가 보이질 않아서 도로 이규보 묘지로 되돌아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뒤를 바짝 따라온 다른 나그네 분을 만났다. 그분께서도 이규보 묘 앞에 도착해서 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는 도착지가 같아서 이후 함께 동행하기로 하고 같이 길을 찾아 나섰다.

 

인근 동네 사람께 물어봐도 '나들길'이란 게 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차분히 길을 찾기 시작, 이규보 묘 앞 도로 좌측으로 아주 작은 팻말이 하나 꽂힌 것을 발견했다. 논 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으로써 길이 없는 것처럼 보여서 속는 셈 치고 돌아서 가보니 산 쪽으로 숨은 임도가 나타나면서 나뭇가지에 걸린 안내리본이 보였다.

 

 

 

 

 

산속에서 연등국제선원 건축물을 만난다. 그 앞을 지나서 산 중 임도를 따라가면 야트막한 고개를 넘게 된다. 고개를 넘어가면 까치골 마을이고, 이 마을을 빠져나가면서 비포장 임도는 포장도로로 바뀐다.

 

 

 

 

 

 

 

 

까치골 마을을 빠져나가면 큰 도로와 만나며, 접속로 좌측으로 진행해 간다. 큰도로 행진 중 예비군 훈련부대 직전에서 양방향으로 진로를 표시한 이정표를 만난다. 부대 뒤쪽으로는 리본이 보이질 않고, 큰도로 쪽으로만 리본이 보여서 큰 도로를 따라 직진 이동했다.  

 

 

 

부대 직전의 양방향 이정표

 

 

부대를 지나고 나면 전봇대에 걸린 나들길 이정표가 우측 마을로 진입할 것을 알린다. 마을 진입로 끝지점은 삼거리 갈림길이다. 이곳 삼거리에서의 잘못된 길안내 표시로 1시간 넘도록 신나게 알바를 하고 말았다. 삼거리에서 우측 편으로만 길 안내 표시가 보였고, 좌측편으로는 길 안내 표시가 없었다. 그래서 우측편 길로 들었다가 부대 직전의 양방향 이정표를 또 만난 것이다.

 

짜증 나는 혼란의 시간이었다. 누가 길을 이렇게 만들어 논 건지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삼거리 좌측 편 길에는 안내표시의 위치 선정이 잘못되어 찾을 수가 없었다. 알바를 마치고, 마을 삼거리로 다시 돌아와 좌측으로 진입해 살펴보니 안내리본이 깊이 숨어 있었다.

 

 

 

부대 뒤편 코스 

 

 

< 혼란을 가중시키는 지점>

부대 직전에서 이정표가 양방향으로 진로를 표시하고 있다. 부대 앞 큰 도로를 따라가던지, 아니면 부대 뒤쪽 산 허리를 돌아가던지 양자택일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 논 것이 진행하는 데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이 된다. 부대를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이 위치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양방향 중 한쪽 코스를 폐쇄하던지, 아니면 마을 삼거리의 길 안내 표시를 개선해야 된다는 것이다.   

 

 

 

알바 때문에 두 번씩이나 만나게 된 양방향 이정표

 

 

곤릉(坤陵)
사적 제371호 / 소재는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고려 강종(재위:1211~1213)의 비 원덕태후(元德太后) 유(柳)씨의 능이다.
왕비 원덕태후는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이 능의 봉분과 석축의 곡장은 붕괴되고, 각종 석조물은 없어진 채 폐허이었던 것을 1974년 정화하였다. 강종은 고려 22대 왕으로 60세에 즉위, 62세에 사망하여 왕권이 3년뿐이다. 

 

 

 

 

 

권능교회 

 

 

 

 

 

석릉(碩陵)
사적 제369호/ 소재는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182번지. 고려 21대 왕인 희종(재위:1204~1211)의 무덤이다. 희종은 최충헌의 횡포가 심해지자 그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재위 7년(1211)에 폐위되어 교동도로 유배되었다. 고종 24년(1237) 8월 용유도에서 세상을 떠나 이곳에 안장되었다. 2002년에 발국조사를 통해 청자상감국화문잔탁 등 12~13세기 상감청자 정성기에 만들어진 유물이 출토되었다.

 

 

 

 

 

 

 

 

마니산 

 

 

 

강화능내리 석실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8호 / 소재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 16~1번지, 고려시대 무덤이다. 무덤의 앞쪽에는 고려 원종(재위: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인 가릉이 있다. 무덤의 주인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석실 규모와 은으로 만든 장식 등 출토 유물로 보아 왕실과 관련된 인물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축조연대는 강화 한도시기(1232~1270)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2007년 발굴조사를 통해 2008년 정비하였다.

 

 

 

 

가릉(嘉陵) 
사적 제370호 / 소재는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 16-2번지. 고려 24대 원종(1259~1274)의 왕비인 순경태후(順慶太后)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로 책봉되자 태자비가 되었으며, 그다음 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그리고 고종 31년(1244) 무렵에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그 후 충렬왕이 즉위(1274)하자 순경태후로 추존되었다. 무덤 주변의 석조물은 파괴되어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보수하였다.  

 

 

 

 

 

 

가릉 주차장

 

진강산을 배경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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