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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산길따라~

김포 문수산 .......2009.1.11

by 마루금 2009. 1. 12.

날씨       : 맑음(기온: -12.5℃~ -4.4℃)

산행코스성동검문소 ~ 남문 ~ 산림욕장 ~ 문수산성 ~ 전망대 ~ 홍예문 ~ 중봉 ~ 문수산 ~ 문수사 ~ 해병대 유격장 ~북문 ~ 성동검문소 
산행시간 : 2시간


연초부터 독감으로 골골,

내내 고생하다가 주일 오후 겨우 컨디션을 회복,

추운 날씨에 체력이 바닥이라 비교적 짧은 산행거리인 김포 문수산을 선택했다.

 

 

강화대교 직전에서 갈라지는 월곳면 성동리 도로에 주차를 마치고 출발준비를 했다. 아차차 !!!!   어쩐지 뭘 빠트렸다는 느낌 ~  서랍에서 꺼내놓았다가 베낭에 챙겨넣치 못한 카메라가 생각났다. 기록은 남겨야겠고, 좋은 방법이 없을까 짧은 순간 고민하던 끝에 질이 좀 떨어지긴하지만 그런대로~  핸디폰 카메라를 이용하기로 ...      

 

 

예전에는 남문에서 문수산성으로 바로 오를 수 있었으나 최근 군사지역으로 설정되어 남문 위로 설치한 부대 철망 때문에 출입금지 되었다.  

 

 

▼ 보호수(경기-김포-22)

수종: 느티나무 / 지정일자: 1982년 10월 15일 / 수령: 300년 / 수고: 20m / 나무둘레: 5m

 

 

 

강화대교, 그리고 강화의 고려산과 혈구산  ... 

 

한강 건너로 북한의 개풍군이 조망된다 .... 

 

남문에서 이어지는 문수산성, 물 건너엔 강화도가 ~~ 

 

문수산성(文殊山成)의 명칭은 문수사(文殊寺)에서 유래하였다. 강화도 갑곶진(甲串鎭)을 마주보고 있는 문수산의 험준한 정상부에서 서쪽의 산줄기를 따라 내려가, 문수골과 산성포의 두 계곡을 포용하여 해안지대를 연결한 포곡식의 산성으로, 현재 해안쪽의 성벽과 문루(門樓)는 없어지고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은 본래의 것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 입구를 지키기 위하여, 1694년(숙종(肅宗)20)에 축성, 기록에는 둘레가 5,529보이고, 여장이 2173첩(堞)에 서문, 남문, 북문이 있었으며, 강화부에 소속되어 별장 한사람과 군관 161명, 사병 56명, 돈군 6명, 수첩군 80명, 모입군 72명 등을 두어 지키고 있었다.

 

1812년 (순조(純祖)12)에 대대적으로 중수, 다듬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뒤에 여장(女墻)을 둘렀다. 당시 성문은 취예루(取豫樓), 공해루(控海樓) 등 3개의 문루와 3개의 암문(暗門)이 있었다.  이 가운데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문수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문수산성 ....

 

1866년(고종(高宗)3)의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룬 곳으로 유명하다. 1866년 9월 7일  프랑스군의 로스제독이  규리르호(號)를 기함(旗艦)으로 하여  포함과 해방함 및 통보함 등 7척으로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갑곶진에  상륙,  이튿날 강화성을 점령하고,  18일에는 이곳 문수산성으로 침입,  이때 문수산성에는 봉상시사(奉常寺事) 한성근(韓聖根)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명령으로 광주(廣州)의 별파군(別破軍) 50명을 이끌고 수비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작은 배로 성의 남문 밖에 다달아 정박하였는데,  한성근이 이끄는 우리 수비군이 프랑스군을 기습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성근이 후퇴, 포수 4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 1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군은 2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입자 성안의 민가 29호를 불살라 버렸다.

 

이 격전으로 해안가의 성벽과 문루 등의 시설이 파괴되고 성안이 유린되었다. 1995년에 일부가 조사되어 길이 16m, 너비가10m 규모의 치성(雉城)이 서남쪽 끝에서 확인되었고, 평탄지에서 성벽이 내외겹축 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물 건너의 강화도 .... 

 

물 건너엔 이북땅이 ... 

 

 

 

전망대 ... 

 

문수산 정상의 헬기장 .... 

 

 

문수산(文殊山)은 해발 376m의 높이로 한강 유역과 경기 서해안 지역을 나누는 분수령이 되는 한남정맥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산이다. 한남정맥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내달려온 한남금북정맥에서  금강 북쪽의 산줄기가 되는  금북정맥과 나뉘어 갈라져 나온 산줄기. 이곳 김포 문수산이 바로 저 백두산까지 연결, 닿아 있음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김포시를 지나는 48번 국도를 줄곧 따라가다 보면 강화대교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으로 문수산 산림욕장과 문수사 이정표가 길손을 반긴다. 알게 모르게 지나는 넓어진 도로 한쪽 모두가 문수산 자락인 셈이다. 한편 정상부에서는 서쪽 산줄기를 따라 문수산성이 띠를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비솔산(比率山) 혹은  비아산(比兒山),  통진산(通津山)이라고도 불려온 산으로 요충지였다.  고려말 몽고군은  이 산에 올라 강화를 바라보고 건너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문수사 삼층 석탑 .... 

 

 

문수사(文殊寺)는 ...

신라 혜공왕(765~780) 때 창건되었다는 고찰이다. 한강이 흐르는 물길 그 끝 문수산에 자리잡아 소박한 절로 남아 있다. 876년에 창건되었다고도 하는데 그 뒤의 역사는 알려진 것이 없고, 광해군 6년(1613) 도욱(道旭)스님과 순조 9년(1809)에 광선(光善)스님에 의해 중건되었음이 '전등사본말사지' 등에 전해지고 있다. 1936년 남성(南星)스님의 대웅전 중건 이후에는 2000년 입적하신 벽응(碧應,'범패' 인간문화재 50호)스님이 1956년부터 주석, 지금의 가람을 일구어 왔다고 한다. 

 

 

문수산의 암석,  바위에 박혀있는 자갈 ...

 

성동리 체험마을의 썰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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