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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산길따라~

은석산..........2007.6/3

by 마루금 2007. 6. 4.

< 병천암장 > 

천안 은석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병천암을 찿아갔다.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암장관리가 부실하여 등반하기에 부적합했다. 왼편 벽에는 토사가 흘러내려 홀드가 불안한 상태였고, 오른쪽은 담쟁이 덩굴과등나무 줄기가 코스를 뒤덮고 있었다. 더더구나 더위까지 가세하여 등반하고 싶은 욕구를 잃게했다. 채석장이었던 암장은 지형적으로 산 사면에서 옴폭 파져있어 내부로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무풍지대였다. 결국 등반을 포기하고, 점심요기를 위해 병천시내로 나섰다.

 

순대로 유명하다는 병천의 자랑거리를  점심 메뉴로  선택했다. 몇 군데의 식당이 있으나 간판에는 저마다 원조라고 쓰여 있어 어느 곳이 진짜 원조인지는 알 길이 없다. 대충 보기에도 맛이 좋아보이는 한 곳을 찿아 들었다. 시골 인심이라 그런지 값이 저렴하고 양도 푸짐했다. 맛있게 점심 요기마친 일행은 은석산의 포근한 품을 맛보기 위해 병천시내를 빠져나와 산으로 이동했다.  

 

< 병천암장 > 

 

 

<은석산>

충남 천안시 북면 용암리, 은지리, 매송리, 병천면 병천리와의 경계에 놓여있다. 해발 455m로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울창한 수림과 수량이 있는 계곡을 갖추고 있어 깊은 산중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비교적 경사도가 완만하여 크게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으며, 정상까지는 대략 1시간 내외로 산행시간이 소요된다.

 

은석골에는 여러 명이 앉아 쉴 수 있는 반석(盤石)이 개울 옆으로 있고, 남쪽으로 은석사란 고찰이 있다. 남동계곡에는 '서원(書院)말'이 있는데, 이 고장에서 오직 하나만 있었던 도동서원(道東書院)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마을이름이라고 한다. 주자, 정구, 김일손과 목천현 출신의 유학자 황종해를 배향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때 유명했던 '어사 박문수'의  묘가 은석산 중턱에 있어서 잠시 둘러보는 의미가 있다. 

 

< 고령 박씨 재실과 주차장 > 

 

 

 < 등산로 입구 > 

 

 

 < 고찰 은석사로 오르는 오솔길 > 

 

 < 계곡의 반석 > 

 

 < 자주 나타나는 돌탑 >  

 

 < 계곡에서 두꺼비를 만나고...> 

 

 < 고찰 은석사 > 

 

< 은석산 정상 > 

 

 

 

< 고찰 은석사 >

은석사는 천안시 북면 상동리, 은석산 남쪽 중턱에 위치해있다. 장작을 패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하고, 난방도 함께 겸하는 보기 드문 산중암자다. 산에 둘러쌓여 여느 시골집처럼 자리잡은 절 마당에는 350살 먹은 팽나무가 오랜 세월의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큰 규모로 창건했다고 전하는 고찰이지만,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건축물로는 법당과 요사채를 겸한 보광전과 위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삼성각만이 남아있다. 주춧돌과 터의 흔적으로 보아 조선시대 전소되기 전 절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보광전에는 도지정문화재인 조선시대 목조여래좌상이 허리를 곧추 세운 채 은석산을 굽어보고 있다. 
 

 

 < 사찰 마당의 팽나무 > 

 

 

 

 

< 어사 박문수 >

본관 : 고령
호    : 기은
별칭 : 자 성보.  시호: 충헌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급제, 사관이 되었고, 1724년 병조정랑에 올랐다가 노론(老論)이 집권하자삭탈관직당했다.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少論)이 득세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 영남암행어사로 나가 부정관리를 적발.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어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 호서어사로  기민(飢民) 구제에 힘썼고, 1734년 진주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738년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앞서 안동서원(安東書院)을 철폐시킨 일탄핵을 받아 풍덕부사로 좌천. 1741년 어영대장에 이어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가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병조판서를 지냈고.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의 폐해를 논하다가 다시 충주목사로 좌천. 그 뒤 영남균세사 등을 거쳐 세손사부를 지냈고, 1752년 왕세손이 죽자 약방제조서 책임을 추궁당해 제주에 안치, 이듬해 풀려나 우참찬이 되었다. 

 

< 박문수 묘 > 

 

 

 

 

 

 < 가는 길 안내 >

경부고속도로 목천 IC로 나간 후, 독립기념관 앞 사거리에서 병천방향으로 21번 국도 이용, 상동리연춘교까지 약 2㎞, 연춘교 건너 약 5백 미터지점 좌측 안내판을 따라 어사 박문수 재실 주차장에 도착. 대중교통으로는 천안시내에서 상동까지 좌석/ 시내버스 수시운행(약 4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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