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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발길따라~

전통사찰 왕산사(포천) .... 2006.08.08

by 마루금 2006. 8. 8.

 

 

왕산사  : 전통사찰 제92호 창립 연대 : 신라 말기

 

신라 도선국사가 창건

왕산사는 <봉선사본말사약지>에 의하면 877년 신라 헌강왕 3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창건과 함께  왕이 친히 방문하여 격려해 주었으므로  산 이름을 왕방산(王方山)이라 하고  절 이름은  왕산사(王山寺)라  했다고  이 약지는  전하고  있다. 헌강왕이 도선국사의 높은 덕을 흠모해 자주 궁으로 모셨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이 같은 약지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일설에는 조선을 세운 태조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咸興)으로 가서 나오지 않으므로 무학스님이 직접 가 설득해 모셔오던 중 왕자의 난이 일어났음을 감지하고 발길을 돌려 이 절에 머무르며 안정을 되찾고 가면서부터 왕방사라 불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청산, 무영 스님이 중창 

이러한  왕방사가  어떻게 유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572년 조선(朝鮮)  선조(宣祖)5년에  청암(靑巖)과 백운(白雲) 두 스님이 고쳐지었고  1627년 인조7년에는 청산(靑山)과 무영(無影) 두 스님 이중창하고는 왕산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본시  이동면에 소재한 흥용사에 전하는 백운산 내원사 사적기를 살피건대  1638년과  1648년에 백운 청암 두 스님이 흥용사의 본래의 이름인 내원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하였으니 이 절은 그 보다 앞서서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매화상이 보덕사로 . . .

해방 직후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청매화상이 중생구제의 뜻을 품고 제방으로 보임을 다니다가 이 지역을 지나면서 이 터가 매우 수려함을 보고 들어오니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빈터에 천년석불(千年石佛)만이 지하에  묻혀있다는 현몽을 받고 백일기도를 봉행하여 마치는 날  미륵불이 현신하여  이 터에 인연이 있으니 잘 가꾸어 요익중생 즉 중생을 널리 구제하라 하는 서상(瑞相)을 나투었다 한다.

 

화정화상이 주지로 . . .

이 일이 인연이 되어  1947년에  초가삼간을 짓고 보덕사(普德寺)라 편액(扁額)하고는 34년 동안 수행과 포교에 힘쓰니  드나드는 불자 모두가  가피(加被)를 입어 명실 공히  이 지역의  기도처(祈禱處)로 자리매김하였다. 청매 화상(靑梅和尙)의 뒤를 이어 화정화상(和靜和尙)이 주지로 부임하여 20년 동안 가람수호와 수도정진에 힘써 오늘의 사세를 확고히 했다.                                               

 

 

 

 

최근에 세운 듯한 왕산사 입석비가 절 입구에 반듯하게 놓여 있다. 넓은 주차장을 지나면 수련이 곱게 깔린 조그만 못이 나오는데,  못 가운데의 반석에 기이한 형상의 바위를 얹어 놓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 느낌이 서로 다르겠지만  거북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한 고사 지낼 때 고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려놓은 것 같게도 보인다.   

 

 

경내에는 중혜전, 대웅전, 지장전, 산신각과 요사채 2채가 있다. 왕이 방문했었다는 사찰 치고는 전체적으로 왜소하며, 창건 후 여러 차례 개축을 했던 이유로 경내의 건축물에서 특이한 고풍스러움의 맛을 느낄 수가 없다. 단지 사찰 천년의 역사가 지금까지 존재하여 그 명맥이 이어져왔던 것이다.

 

 

삼성각은 해방 직후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청매화상이 1947년에 지었다고 한다. 비좁고 가파른 곳에 산신각과 나란히 위치해있었고, 그 주변에 수풀이 우거져있어서 정비가 필요하였다.  법해스님께서 2004년 6월 15일 착공을 하여 약 6개월간의 공사로 2004년 12월 15일경에 완공을 하였 다한다.  삼성각의 건축방법은  전통사찰의 모양인 목조방식으로 지어졌으며, 현재는 목재가 충분히 건조하지 않아 외부 도장작업을 미루어놓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경내를 통하여 108계단을 오르면 미륵전에 도착하게 된다. 살짝 머금은 미소에 온화함을 풍기는 미륵불과 단 옆에 버려진 듯이 놓인 돌거북은 경내의 건축물과 달리 고찰로서의 풍미를 느끼게 한다.  화강암재의 석상에 살짝 입혀진 이끼와  때 묻은 듯한 은은한 색상이 천년의 세월을 말해 주는 듯하다.

 

 


왕산사의 출토유물

한자로 왕산사(王山寺)라 새겨진 암기와( 가로 30cm x  세로 38cm x 두께 2cm )가 출토되었고, 용 그림이 새겨진 막새기( 지름 17cm x 두께 2cm )와 미륵전의 돌거북, 미륵불 등이 있다.

 

 

 

 

 

 

왕산사의 지세

왕산사 터의 지세를 보면  백두대간에서 시작해 동쪽으로는 오봉산 금강산 향로봉으로 이어졌다. 서쪽으로는 한북정맥(漢北正脈)이  백암산, 대성산, 백운산, 운악산, 국사봉, 왕방산으로  용트림하면서  이어져  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합수지점에  이르러  장명산이 한북정맥의  끝을 맺는다. 바로 이 사이에 왕방산 왕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풍수지리  원전인  장경(葬經)이나  '금낭경'에 따르면  관지지법(觀支之法)  은은륭륭(隱隱隆隆) 미묘현통(微妙玄通) 길재기중(吉在基中)이라고 하고 있다.  용과 지룡을 보는 법은 은복(隱伏)이되어 잘 보이지 않으나 돌출되는 용맥의 진행을 잘 관찰해야 하므로 물의 분합(分合) 주변의 좋은 봉우리와 영송(迎送)등이 잘 아루어지는지를 살펴야 한다.

지룡은  물이 고여 만나  멈추는 곳에 사방이 흩어지지 않고 결합을 이루며  왕성한 힘을 얻는다. 이와 같은 곳은 미묘하기 때문에 신묘한 영기와 상통하는 길지가 된다.  이러한 지덕을 갖춘 곳이 왕방산 왕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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