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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발길따라~

전통사찰 안양사(안양) .... 2006.07.02

by 마루금 2006. 7. 5.

 

 

삼성산 무당바위에서 등반을 마치고, 하산하던 중에 안양사를 들렀다.  "전통사찰 제 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의 안양이란 지명이 이곳에서 유례 되었다 하는데 안양시로서도 중요한 사찰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안양사 입구

 

안양사(安養寺)는 태고종 사찰로서 신라 효공왕 3년(孝恭王 900년)에 고려태조 왕건(王建)이 남쪽을 정벌하러 지나다 오색구름이 가득 피어 오르자 이를 이상히 여겨 살펴보다가 능정(能正)이란 스님을 만나 세워진 사찰로 전해진다.

 

 

안양이란 불가(佛家)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상주하는 청정(淸靜)한 극락정토(極樂靜土)의 세계를 말하며, 현세의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나 있다는 즐거움만 있고,  자유로운 이상형(理想型) 안양세계(安養世界)를 말한다.

 

 

극락을 안양(安養) 또는 안락(安樂)이라고도 부른다. 서방정도라고 하는 데 이것은 옛날 인도인들의 방위개념이 개입된 이름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동쪽에 서서 앞쪽을 과거 뒤쪽을 미래라고 하였다. 따라서 극락은 내세에 왕생 할 세계이므로 서방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아미타경’에서는 극락을 “거기서 태어난 자에게는 고통이 없고, 오직 즐거움만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고려 때 최영(崔塋)장군이 7층 전탑(塼塔)을 세우고, 왕이 환관을 시켜 향을 보냈으며, 승려 1000명이 불사(佛事)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옛 안양사의 규모를 짐작케 하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여 주는 자료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팔각원당(八角圓堂)의 부도(浮屠)와 귀부(龜趺: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3호)가 있다. 귀부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저자 김부식(金富軾)이 글을 짓고, 명필 이원부(李元符)가 쓴 비문(碑文)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왕께서 충남 온양으로 온천욕을 하러 가던 중에 얀양사에 들렀다는 기록이 있고, 안양사와 관련하여 여러 수의 시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대웅전 내부

 

안양사 부도(安養寺浮屠)는 탑신(塔身)과 기단중석(基壇中石)은 없으며, 하대석(下臺石)은 높은 2단의 8각 지대석(地臺石)으로 복연(覆蓮)을 장식하였고, 상대석(上臺石)은 앙연(仰蓮)이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팔각3단의 옥개받침 위에 올려있고, 처마의 상한선이 전각(轉角)부분에서 반전(反轉)하며,  높이는 1.36미터, 너비 1.35미터로 양식의 특징을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부도란 고대(古代) 인도의 범어(梵語 : Buddha)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부처, 불신을 뜻하며, 불가에서 스님이 열반(涅槃) 후 사리(舍利)나 유골(遺骨)을 모시는 곳이다.

 

부도

 

대웅전을 중심으로 우측은 부도가 좌측에는 귀부가 놓여있다. 귀부는 너무도 재미있게 생겼다. 목은 잔뜩 움츠렸으나 얼굴의 표정은 인자한 것 같기도 하다. 이 귀부에는 전설이 있다. 어떤 농부가 비신을 부수어 숫돌을 만들었는데 그 후 얼마 안 가 전가족이 멸족했다고 한다. 비신(碑身)과 이수는 없어지고, 귀부(龜趺)만이 남아 있다. 몇 개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지대(地臺)를 구축했고,  굄대와 귀부가 한 개의 돌로 만들어졌다. 귀부 정상 중심에 비좌(碑座)를 설정(設定)하고,  비좌의 각면을 외겹 연꽃무늬로 돌리고 있다. 귀갑문(龜甲文)은 6 각형이며, 거북머리는 용의 머리처럼 새겨 사실적이고, 귀부(龜趺) 뒤편에 꼬리를 옆으로 새겼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이 귀부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보이는데 높이 1미터, 길이 3미터, 너비 2.18 미터에 달한다

 

귀부

 

미륵불

 

천불전 내부

 

사자상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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