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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발길따라~

충무공 김시민 장군 .... 2005.08.01

by 마루금 2005. 8. 9.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  

(높이 7m )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호국 충절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한 진주 수호상으로 2001년 1월1일 제막하였다. 

 

 

 

김시민 장군과 진주성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최초로 대대적 승리를 거둔 곳이 바로 이곳 진주성이다.
그리고 그 주역이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었다. 이때 왜적을 크게 물리친 진주성 대첩은 충무공의 한산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더불어 임진왜란 3 대첩이라고 한다. ‘대첩(大捷)’은 크게 이긴 전투를 일컫는 것이다. 

 

임진왜란 3대 첩지의 하나인 진주성과 김시민 장군.
청사에 길이 남을 역사를 이루었으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느낌이 없지
않다. 진주의 긍지를 태동시킨 진주성 대첩의 주역들이 ‘의기 논개’의 명성에 밀려 흔적조차 찾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사실 진주성 입구에서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논개 시비’이다. 또 진주성문을 지나 곧장 촉석루에 들어서도 의기사, 의암 등 역시 논개 흔적뿐이다.  이러다 보니 진주성을 찾은 사람들은 논개만 보고 돌아간다. 그리고 진주성 하면 너나없이 ‘촉석루’ ‘논개’만을 떠올린다.  한산도에 가서 이충무공을 생각하지 않고, 행주산성에 가서 권율 장군을 떠올리지 않고 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진주에 와서는 김시민 장군을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91년 진주판관으로 부임하고부터이다.
부임한 지 1년 후 1592년(선조 25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당시 진주목사 이경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진주목사 대행에 임명된 장군은 병기를 수 리하고, 성지를 구축하는 한편 수성군을 모집하여 진주성을 사수하고자 했다. 장군은 모집된 수성군에게 맹훈련을 시키고 병기와 자재를 정비하고, 양곡을 비치하였다.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호남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만약 이곳이 무너지면 왜적은 바로 호남 지역을 휩쓸게 되는 상항이었다.

또한 장군은 의병장 김면의 요청에 따라 거창으로 나가 왜적을 크게 무찔러 이 공로로
1592년 7월 26일 진주목사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9월에는 진해에서 왜군장수 평소태를 생포하여 의주의 조정에 보내 경상우병사에 임명되었으며, 고성, 창원까지 진격하여 왜적을 무찌르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왜적은 김해, 고성, 창원 등 경상도 남부지역에서 연패하자 경상우도의 조선군 주력
부대가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이를 함락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왜적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등원랑, 평조신 등을 주축으로 부산, 동래, 김해지역에 포진하고 있던 정예병 3만여 명을 동원하여 1592년 10월 5일 진주성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진주성에는 김시민 목사가 거느린 군사 3,700명과 곤양군수 이광악의 100명 등 도합
3,800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정예병이라기보다는 새로 모집한 장정들이었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민들의 필사적인 단결과 곽재우·최강· 이달 등 각처 의병들의 열렬한 성원에 고무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진주성을 사수키로 결심한 후 화살 하나 탄환 한 발이라도 낭비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 만반의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10월 5일 아침부터 왜군은 신식 무기인 조총을 주 무기로 3개 부대로 나누어 공격을 감행
하였다. 김시민 장군은 적군의 화력을 최대한 소모시키고자 일정한 거리에 올 때까지 대적하지 않고, 성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는 한편, 직접 성내를 순회하면서 임전태세를 점검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자신도 병사와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솔선수범 하였다. 이 같은 장군의 헌신적 노력에 감복한 군사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게 되었다.

비록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김시민 장군을 중심으로 진주의 민관군은 혼연일체가 되어
비격진천뢰등 무기와 화살을 쏘아 왜군의 공격을 막았고, 백성들은 돌을 던지거나 물을 끼얹어 적을 물리쳤다. 왜적의 공격이 5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때마다 진주의 민, 관, 군은철통 같은 대응으로 왜적을 물리쳤다.

김시민 장군은 전투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인 10월 9일 전투 지역을 순시하던 중 왜병의
저격에 의해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치료받다가 며칠 후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진주대첩은 왜적의 호남지역 침공을 좌절시켜 국내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온전히 보전하는데 기여하여 결국은 임란을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진주대첩이 있은지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진주성에는 그날 청사에 빛나는 전공을
기리는 변변한 기념물조차 없다. 다만 최근에 세운 김시민 장군 동상만이 그날의 전공을 되새기게 하고 있을 뿐이다. 기자는 진주성을 나오면서 청사에 길이 빛나는 진주대첩을 기리는 ‘진주대첩비’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진주시내 어디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높다란 진주대첩비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에서 6일간의 혈투 끝에 왜군을 격퇴하고 순절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석이다,

 

 

 

호국의 종  

(종신 2.7m  지름 1.7m) 진주성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진주시가 문화재 육성기금으로 1980년에 재작한 범종으로 종신에는 각종 문양이 부조되어 있고, 이은상 시인의 명문이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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