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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발길따라~

정안사(장흥) .... 2018.10.28

by 마루금 2018. 10. 29.

 

천관산 산행을 마치고 들렀다. 정안사(正安祠)는 장홍 임씨(長興 任氏) 종친들의 헌 성금으로 1998년도에 건립한 사당이다.

 

 

 

 

정문 입구 ~

 

장흥임씨발상지사적비(長興任氏發祥地史跡碑) ~

 

▼ 공예태후임씨기전비(恭睿太后任氏紀傳碑) ~
1991년 12월 정부에서(문화재청)는 유서 깊은 인종왕비 공예태후 탄향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장흥임씨 발상지인 당동에 비(碑)를 세웠다. 이로써 천년 前 고려 중기 번창했던 장흥임씨의 옛 면모를 재조명하게 된 것이다.

 

 

후손 송공비(頌功碑) 및 헌성 내역 ~

 

▼ 소흥문(紹興門) ~
외삼문이다.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서 시조 임호(任顥)가 태생하였다. 고려 1040년(정종 6) 현재의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 마을에 정착하고 터를 잡았다. 따라서 시조의 고향을 잊지 않고 오래토록 전하기 위해 정안사의 첫 문을 소흥문이라 명명하였다.

 

 

▼ 경모재(景慕齋) ~
대강당이다.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이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종원들이 매년 이 자리에 모여 경건한 마음으로 선조들을 추모하고 숭조사상(崇祖思想)과 족의돈목(族誼敦睦)을 앙양시키는 장소가 될 것이므로 경모재라 명명하였다.

 

 

▼ 역사관(歷史館) ~
교육장이다. 선대의 혼(魂)이 서려 있는 교지(敎旨) 등 주요 유품을 소장 전시하여  2013년 건립하면서 명명하였다.

 

 

▼ 장천당(長川堂) ~
소강당이다. 호남5대 명산의 하나인 천관산 장천동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물은 당동(堂洞) 마을 앞 개천을 휘감아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어 이곳에 강당을 세워 장천당이라 명명하였다.

 

 

경모재의 글귀들 ~

 

 

 

 

 

▼ 숭앙문(崇仰門) ~
내삼문이다. 높여 우러러 본다는 의미이다. 이곳에 들어서는 자손들은 모두 숭앙(崇仰)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고 이 문(門)을 들어서야 하며, 이 문(門)을 들어서면서 선대의 위업(偉業)을 계승 발전하겠다는 마음을 다지기 위하여 숭앙문이라 명명하였다.

 

 

 

▼ 정안사(定安祠) ~
조상을 모신 신실이다.장흥임씨의 발상(發祥)은 고려 정안현(定安縣)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제일 토성(土姓)이기도 하였다. 이에 정안(定安)은 영원히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서 신실의 명칭을 정안사라 명명하였다.

 

 

숭앙문 ~

 

 

경모재 ~

 

소흥문 ~

 

 

 

당동 마을 입구 정안사(定安祠) 앞에 소(沼)의 흔적이 남아 있어 2005년(戊寅) 장흥임씨 대종회에서는 1040년(庚辰) 시조 임호(任顥)의 입국과 관련된 석가(石?) 시비(詩碑)를 비롯하여 정자(亭子), 표석(標石) 등을 세우고 주위를 정비하였다. 

 

 

 

 

각시소(沼) 일명 아지(娥池) 전설(傳說) ~
공예태후의 임씨에게는 언니 한명이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언니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좋은 꿈을 꾸었다며 아우에게 자랑스럽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꿈에 갑자기 하늘엔 오색구름이 영롱하게 빛나 가득하고, 땅위엔 상서로운 기운이 온 누리에 감돌아 황홀한데 자기 집 대문 앞에 갑자기 황금 빛 비단 폭이 쭉 멀리 펼쳐 깔려지고, 그 위를 고운 옷 차려 입은 처녀가 사푼사푼 걸어가니 용상에 앉아있던 임금이 환희 웃으며 내려와 반겨 맞으며, 두 팔로 곱게 안아 그 처녀를 옥좌 옆자리에 앉히더라는 것이었다. 이 꿈 이야기를 듣고 난 아우 임씨는 꿈의 내용이 너무나도 기특하고 황홀해서 어린 마음에도 어찌나 부러웠는지 그 꿈을 비단 한단과 바꾸자고 언니에게 졸라댔다. 언니는 아우의 어리광 섞인 성화에 못 이겨 그만 허락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것이 훗날 언니에게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그 후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이들이 장성하였을 무렵 때마침 조정에서는 이자겸(李資謙)의 딸인 두 왕비를 폐위(廢位)하고 새 왕비를 간택하게 되었다. 이때 어의(御醫) 최사전(崔思全)이 당시 전중내금사(殿中內給事)로 있던 임원후(任元厚)의 딸인 아우를 추천하여 간택이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언니는 지난날 꿈을 팔았던 자기 잘못을 크게 한탄하고 그만 마을 앞 소(沼)에 몸을 던져 버렸으니 그때부터 이 못을 예쁜 여인이 빠져 죽은 못이라고해서 천년이 가까운 오늘날까지 "각시소"또는 아지(娥池)로 불리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任氏(임씨) ~

임씨는 문헌에 120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장흥, 풍천 2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미고이다. 장흥임씨의 시조 임호는 원래 중국 소흥부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중국에서 이부상서를 지내다가 국난이 일어나자 정안(장흥의 별호) 현 천관산 아래 임지도에 망명하여 그곳에 세거하게 되었고 그의 손자 원후가 고려 인종 때 문하시중에 이르고 정안 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다고 한다. 풍천임씨는 중국소흥부 사람인 임은의 6세손 임주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왕으로부터 관향을 하사받아 풍천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장흥 임씨는 풍천임씨와는 달리 고려조에서는 대대로 명신을 배출했는데 이조에 들어와서는 정계와 절연한 감이 있다.

 
◈ 長興任氏(장흥임씨) ~
시조 灝(호)는 원래 소흥부 출신이다. 그는 일찍이 중국에서 이부상서를 지냈고 그후 국난이 일어나자 망명하여 정안(장흥의 별호)현 천관산 아래 임씨도에 정박한 후 그곳에서 세거하였다. 뒤에 그의 손자 원후가 고려 인종때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정안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장흥으로 하게 된 것이다.

<행렬자> ..... 23(錫석 鉉현) 24(泰태) 25(模모 植식) 26(炳병 炯형) 27(圭규) 28(鍾종) 29(洙수) 30(榮영 相상) 31(煥환 烈열) 32(敎교) 33(鐸탁) 34(漢한) 35(根근) 36(炯형) 37(達달) 38(鎬호)


◈ 豊川任氏(풍천임씨)
시조 임온(任溫)은 중국 소흥부 자계현 사람으로서 관직이 은자광록대부에 올랐다. 그의 6세손주가 고려 충렬왕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경상도 추동등안찰사를 거쳐 어사대부, 감문위대장군을 지내고 치사 풍천으로 사적되고 이루었으므로 후손들이 임온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풍천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任주의 묘소는 풍천 전석산하 자좌에 있고 매년 음9월 13일에 향사한다.

<행렬자>..... 25(準준) 26(鎬호) 27(宰재) 28(公공 淳순) 29(彬빈 植식 東동) 30(赫혁 熙희 烈열) 31(中중 均균 世세) 32(鍾종 善선 鎭진) 33(源원 洙수 漢한) 34(桂계 相상 九구) 35(炳병 憲헌 煥환) 36(孝효 範범 圭규) 37(鉉현 鎭진 鈺옥) 38(淵연 雨우) 39(根근) 40(烈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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