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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발길따라~

천년고찰 무암사 .... 2006.11.19

by 마루금 2006. 11. 25.

 

 

鵲城山(까치성산) 배바위 등반을 하러 갔다가 잠시 들러보았다. 무암사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아늑하여 배경이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르는 길에 KBS 부속 촬영장을 지나는데 이곳도 역시 좋은 볼거리였다.

 

 

 

무암사(霧巖寺)는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이기도 하며,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사찰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는데 창건 당시에는 무림사(霧林寺)라 칭하였다. 그 후 우암사(牛岩寺)로도 부르다가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무암사(霧巖寺)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청풍군 불우조(佛宇條)에 '무암사 구재백야산'(霧巖寺俱在白夜山)이라 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 청풍부 사찰조에도 무암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무암사 유래에 대한 설화이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무림사를 세우려고, 큰 나무들을 잘라 다듬어 힘겹게 나르고 있었다. 이때 황우가 나타나서 목재 운반을 도와 손쉽게 절을 세울 수 있었다. 이후로 대사는 소를 극진히 위해주었는데 얼마 뒤에 죽게되었다. 소를 화장하였더니 여러 개의 사리가 나왔고, 소의 불심에 감동하여 사리탑(소부도)을 세웠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때부터때 무림사를 우암사(牛岩寺)라 불렀다 한다.

 

 

절 건너편의 서남방 약 1킬로 지점에 높이 5미터, 둘레 3미터가량의 노장암(老丈巖)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늙은 중이 서 있는 듯이 보인다. 이 노장암이 청명한 날씨에는 산과 암석이 일체(一體)로 보여 바위가 뚜렷하지 않고, 운무(雲霧)가 산을 덮으면 바위가 뚜렷하게 보여서 마치 노승이 팔장을 끼고 서있는 것 같다고 하여, 안개 '霧'(무), 바위 '巖'(암) 자를 따서 무암사라 하였다. 풍수학에서 절 입구나 근처에 중의 모양을 한 바위, 혹은 지명이 있으면,  사맥(寺脈)이 끊이지 않고, 그 절은 오래 유지한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또한 식량도 넉넉하다고 한다.

 

 

현재의 사찰은 목조와즙의 10간 맛배집의 극락전(極樂殿)과 1간의 7성각(七星閣), 1간의 산신각(山神閣), 10간의 요사(寮舍) 및 객실과 수호실이 있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지붕위 망와(望瓦)에 건융(乾隆) 5년이라 새겨져 있으며, 2000년에 이 절의 극락전 보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의 기록에 의해 조선영조(英祖) 16년(1740)에 중창한 것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대웅전 전면의 기둥이 수령 1200년이 넘는 싸리나무 기둥이라 하는데 굵기로 보아 싸리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오래된 것으로 보존 가치가 충분한 만은 틀림없다.

 

 

통나무로 조각한 극락전의 주존불로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座像), 충북 유형문화재 제214호 이다. 오랜 세월에  떨어져 나갔던 두 손을 따로 만들어 붙였고, 머리의 나발은 흙으로 만들어 붙였다지만 금빛으로 찬란한 모습이다.

    

  

사리가 나와 봉안하였다는 소부도와 수월당 부도가 현 사찰 동북쪽 200m 지점에 있다. 이 부도가 있는 남쪽에 200여평의 밭이 있는데 이곳에서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기와편이 산재하여 있어 옛 사지추정하고 있다. 성내리로 나오는 길 1.5㎞ 지점에는 청사당명(淸沙堂銘)의 옥개석이 있는 부도와 이름이 없는 부도 2기가 있다. 부도와 아미타불 외에도 후불탱화, 신중탱화, 지장탱화, 칠성탱화, 산신탱화 등이 있는데 작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대체로 최근에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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