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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발길따라~

정온선생 종택(거창) .... 2018.09.09

by 마루금 2018. 9. 12.

 

현성산 산행을 마치고나서 수승대를 둘러보고도 시간이 많이 남아 추가로 들러봤다. 수승대에서 정온종택까지는 도보로 약 15분쯤의 멀지 않은 거리다. 후미조 도착 때까지는 2시간이나 여유가 있었다.

 

 

 

정온종택 앞 ~

 

 

 

 

정온(1569~1632)선생의 생가로 그의 후손들이 그의 생가를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솟을대문의 대문간 채를 들어서면 남향한 사랑채가 있다. ㄱ자형 평면이며, 정면 6칸, 측면은 2칸 반이고, ㄱ자로 꺾여 나온 내루(內樓)부분이 간반(間半) 규모이다. 이 집에서 주목되는 점은 두 줄로 된 겹집이며 전퇴를 두었다는 것과 내루에 눈섭지붕이 따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안채도 남향인데, 정면 8칸, 측면 3칸 반의 전·후퇴 있는 두 줄의 겹집으로 사랑채의 평면구성과 함께 주목된다.

 

 

 

 

 

 

 

 

 

 

 

 

거창은 남쪽지방인데도 북쪽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겹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안채나 사랑채는 기단이 낮은 반면 툇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남쪽지방의 특색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안채로 들어가려면 사랑채 좌측의 중문을 통하도록 되어 있으며, 중문채는 3칸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네모의 안뜰인데,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내정 좌우로 각각 부속건물이 있다.

 

 

 

 

 

 

 

 

 

서쪽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큼직한 곡간이 있다. 곡간 뒤편에는 화장실이 있다. 마당 동쪽에는 서향한 뜰 아래채가 있는데 4칸 집이다. 사당은 안채의 향원에 삼문을 짓고 그안에 있는데, 전퇴가 있는 3칸 집이다. 규모가 큰 기와집들이 부재도 넉넉하면서 장대하고 훤칠해 보인다. 학술적 가치는 집 전체의 평면구성에 있다.

 

 

화장실 ~

 

반구헌응 정온고택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다. 정온고택에는 후손이 살고 있지만 반구헌은 빈집이다 ~

 

 

앞채 ~

 

뒷채 ~

 

 

 

 

▼ 은사 정해균 선생 추모비 ~

수승대에서 정온종택 방향으로 가던 길에 위천교를 건너고나서 만났다. 수많은 문인들이 선생을 기리는 비로 1973년에 세웠다. 아래는 비문의 글이다.

 

< 은사정해균선생추모비서 >
부모에서 몸을 받고 스승에서 글을 배워 정력과 지식을 나라 일에 바치는 것은 인간생활에 최고 윤리라 하겠다. 우리 은사 정해균 선생은 국가가 위태할 즈음 1891년에 사인 조계 정연대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이 국가가 쇠잔해짐이 봉건정치의 잔재로 과학문명에 낙후되었음을 인식하시고 약관에 경성공업학교를 졸업하시었으나 이 나라는 횡폭한 일제에 강탈되어 정력과 지식을 활용할 바가 아득하였다. 선생은 비바람 바다위서 나침반을 믿은 항해사의 심정으로 향토자제의 교육재건에 뜻을 품어 위북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고 산간벽지를 찿으면서 생도모집에 힘쓰시어 난삼한 한문습득 보다는 실용될 이교해독의 필요성을 설명하시었으며 모집된 생도중에 생활이 궁핍하여 학업이 중단될 자에게는 월사금도 대납하시었고 기식도 앙선하시었다. 백설이 쌓인 교정에서는 설전도 하시면서 생도들의 패기를 양성하시었고 반딧불 여름밤에 피로를 모르시고 복습소를 순행하시면서 우리에게 면학을 격려하시었다. 또 교과서 중에 식민정치를 찬양하는 구절에는 신산한 표정으로 나라 잃은 백성의 서러움도 가르쳐주시었다. 선생이 이십여년 내내 우리들에게 끼치신 심려를 일일이 매거할 수 있으리오. 선생은 다만 석학도 아니시며 철인도 아니시다. 오직 지성인이시며 우리들의 은사이시다. 일제말기에 2차대전이 발발하여 우리 민족은 물심양면으로 더욱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굳게 견디면서 신조를 굽히지 아니하였다. 815 광복을 맞이한 뒤 장남 종구군이 효성으로 여년을 편안히 계시다가 1972년 7월에 82세를 일기로 영서하시었다. 그 부언을 들은 문인들은 사은의 애도에 감기어 동문일동은 추모비를 세우게 되었다. 가로되 꽃핀 산 소풍갈 때 날씨는 화창하고 버들피리 시냇가 우리가 뒤따랐다. 금원산이 높이 높이 천만리 방박하고 학당물 출렁출렁 창해에 흐르느니 민족은 영원하고 성쇠는 때때있다. 빛나는 예의동방 수도에 힘입었네. 교훈에 차원높고 인자는 일관했소. 종덕이 헛되리오. 이 돌이 입증한다. 이 글월은 동문일동의 비망과 고증을 기술하노라.  서기 1973년 6월 문인일동 근수

 

 

봄철이면 화사하게 단장되는 수승대트레킹길의 벗꽃공원 ~

 

위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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