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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발길따라~

다산의 자취를 따라서(남양주) .... 2011.04.16

by 마루금 2011. 4. 18.

경기도 남양주판 올레길인 '다산길' 트래킹을 마친 후 다산유적지에 들렀다. 시대를 초월한 세계인의 스승이라는 실학의 선구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과 그의 삶을 조명해 보는 시간이다. 유적지에는 다산기념관, 다산문화관,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 동상과 문도사(文度詞), 언덕 위에는 다산의 묘, 외부에는 문화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대중교통편>청량리에서 8번, 167번 노선버스 (배차간격 10~15분)

강변역에서 2000-1번 노선버스(배차간격 20~30분) 

팔당역에서 8번, 167번, 2000-1번

운길산역에서 56번 버스

다산유적지에서 하차

 

 

 

< 다산 정약용의 삶 >

1762년(영조38년) 6월16일(음) 정재원의 4남으로 해남윤씨 소생이다. 

15세인 1776년 풍산홍씨 홍화보 따님과 혼인, 서울에 살면서

16세에 이승훈, 이기환 등을 만났고, 성호 이익의 유고를 읽고서 실학에 뜻을 두었다. 그의 부친이 부임한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등지를 돌면서 과거공부를 계속했다.  

22세인 1783년 과거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했다.

23세에 한강을 따라 서울로 오는 배 안에서 큰형(약현) 처남인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말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28세에 문과에 합격, 벼슬을 시작하여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었다.

31세에 수원 화성을 설계했고, 거중기 녹로등을 고안하여 축성 경비 4만냥을 절감했다. 아울러 공사기간도 7년이나 단축시켰다.

33세에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수령의 비정을 고발했다.

36세에는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음을 밝혔다. 이후 황해도 곡산부사로 제수되어 목민관으로서의 능력을 보였다.

38세에 3농정책을 밝힌 '음지농정소'를 올렸다.

39세(1800년) 봄 고향으로 돌아와서 당호(黨號)를 여유(與猶)라 정하고 은둔했다. 그해 여름 정조가 승하햇다.

40세(1801년)에 책롱사건으로 다산 3형제가 체포되어 의금부에 투옥되면서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해 10월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면서 다산은 다시 서울로 압송, 조사를 받은 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57세인 1818년 9월에 유배생활을 청산하고,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배를 전후해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완성했다.

58세 가을에 용문산을 올랐고, 59세에 춘천 청평산을 유람, 61세 회갑에는 '자찬묘지명'을 지었다.

75세인 1836년 2월22일 고향 마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1910년(순종4년) 7월18일 정이품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종되고, 시호를 문도(文度)라 했다.          

 

 

다산은 5백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대표작으로 1표2서(一表二書: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와 의학서 '마과회통'이 있다. 정약용은 묘지명을 스스로 썼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다. 다산의 자서전인 셈이다.  억울하게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학문에 힘써 업적을 남기는 등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다. 묘지명(墓誌銘)이란 죽은 이에 대해 간략히 일생을 정리해 밝히는 것으로 가까운 친지가 쓰게 된다. 자신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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