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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발길따라~

천년고찰 사나사(양평) .... 2008.02.03

by 마루금 2008. 2. 4.

 

 

용문산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던 중 전통사찰인 사나사(舍那寺)에 들렀다. 용문사의 유명세에 가려 아직 덜 알려져 있으나 용문사에 결코 뒤지지 않는 문화적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절이다. 사나사는 '전통사찰 제48호'로 지정되어있다.   

    

 

 

<위치>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번지

 

< 사찰이력>

923년(신라 경명왕 7년):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 사나사(舍那寺)로 명명. 5층 석탑노사나불상 조성, 봉안 
1367년(고려 공민왕 16년): 태고왕사 보우가 140여칸 규모로 중건.

1382년(고려 우왕 8년): 12월 24일 보우스님이 용문산 소설암에서 입적,

1383년 : 문인 '달심'이 태고의 부도와 비를 세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사찰이 불타버림.         

1608년(선조 41년): 단월 '한방손'이 재건. 
1773년(영조 51년): 양평군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 조직, 향답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광담 마련,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
에 비를 세움

1907년(순종 원년):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움.

1909년 :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

1937년 : 주지 '맹현우 화상'이 대웅전 15칸을 재건하고 조사전 5칸을 지었슴.
1950년 : 6.25사변으로 사찰 전소.

1956년 :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 협력,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슴.

1993년 : 주지 '한영상'이 대웅전과 지장전을 재건, 현 주지 화암스님이 주석하면서 포교와 교육, 기도 도량으로 일신함.   경기도유형문화재 72호인 원증국 사석종탑과 도유형문화재 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가 있슴.
 

 

 

 

 

석탑

1983년 9월19일 문화재자료 21호로 지정, 대웅전 앞에 있는 4층 석탑으로, 기단부와 탑신부, 머리장식을 갖추고 있다. 바닥돌 위에는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로 보이는 부재가 놓여있고, 위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다. 특히 탑신의 1층 몸돌을 다른 층에 비해 월등히 높게 만들어 놓은 것이 독특한 모습니다. 지붕돌은 윗면에 느린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위로 들려 있으며,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이 있다.

 

 

비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 고려 1386년 건립, 비신높이 103cm, 이 비석은 경내 함씨각과 산신각 사이의 평지에 있다. 비좌를 따로 만들어 비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위쪽을 평평하게 다듬어 그 위에 비신을 세웠다. 땅 속에 깊이 묻혀 있고, 일부만 땅에서 솟은 바위는 대석과 비좌의 몫을 맡고 있다.

 

비신은 널리 알려진 방식과 달리 비신의 좌우에 각각 1매의 장방형 돌기둥을 세워 비신을 감싸고 있다. 돌기둥은 화강암을 다듬어 만들었고, 비신 양측면과 맞닿는 부분에 비신의 두께만큼 홈을 파서 비신이 꼭 끼게 하여 지주석(支柱石)의 역할과 더불어 장식 효과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말에 조성된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鍾碑, 보물 제229호)와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한 시대에 유행하였던 형식적 특징을 보인다.

 

덮개돌 개석은 1매의 돌로 만들었다. 윗면은 평평하고, 아무런 새김이 없으며, 측면은 갑석(甲石)처럼 수직의 굽을 돌렸고,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원호(圓弧)를 이루고 있다. 아랫면 역시 평평하면서 아무런 새김이 없지만 중심부에 가늘고 긴 홈을 파서 비신의 상단과 비신을 감싼 좌우의 지주석의 정상부가 꽂히도록 마련하였다.

 

비신은 검은빛의 점판암이다. 전면에 상단부분에 ‘원증국사석종명(圓證國師石鍾銘)’이란 7자가 전서체로 큼직하게 가로로 음각되어 있다. 비신에는 비신의 주연부을 따라 2줄의 음각선이 새겨져 방곽(方廓)을 이루며, 그 안에 20행으로 이루어진 비문이 새겨 있다. 비신의 뒷면에는 상,하 2단으로 나누어 16행의 비문을 새기고 있는데 비의 건립에 동참한 사람들의 명단, 조연기(助緣記)가 그 내용을 이룬다.

 

비의 재질이 무른 점판암이어서 위쪽에 균열이 있고, 여러 곳에 깨져 나간 부분이 있어 현재로는 비문 전체를 읽기 어렵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가 103cm 너비 67.5cm 두께 3.8cm이다. 지주석은 높이가 109cm 너비 14cm 두께20.5cm이고 덮개돌은 가로 112cm세로 44cm 두께 13.5cm이다.

 

 

부도

1978년 10월10일 '시도유형문화재 72호'로 지정,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며,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이 부도는 고려 후기의 승려인 태고화상 보우(1301~1382)의 사리를모시고 있다. 국사는 13세에 회암사 광지선사에 의해 중이 되었고, 충목왕 2년(1346) 원나라에 가서 청공의 법을 이어 받았고, 충목왕 4년(1348)에 귀국하여 소설암이라는 암자에서 수도를 하고, 왕사국사가 되었으며, 이 암자에서 입적하였다. 부도는 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돌종 형태를 띠고 있다. 높직하고 네모진 기단 윗면에는 연꽃을 새겼고, 둥글고 길쭉한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꼭대기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솟아 있다. 부도를 세운 시기는 가까이에 서 있는 탑비에 고려 우왕 9년(1383) 문인 달심이 이 부도와 탑비를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임을 알 수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받침돌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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