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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발길따라~

남연군묘(예산) .... 2019.10.26

by 마루금 2019. 10. 26.

 

가야산 등산로 입구에 있다. 

상가리미륵불을 먼저 들러보고나서 조금 이동하여 가야사지와 남연군묘를 차례로 돌아봤다. 

 

 

남연군 묘 ~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에 지정되어 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 이구(李球)의 묘다. 높은 언덕에 반구형 봉분이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앞에 석물과 비석이 서있다.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것을 1846년 이곳으로 이장했다. 이하응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 자리를 찾기 위하여 지사(地師)인 정만인(鄭萬仁)에게 부탁하였다. 지사는 전국을 두루 살펴보고 이곳을 ‘두 대에 걸쳐 천자가 나는 자리(二代天子之地)’라고 지목하였다. 이곳에는 본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고, 묘자리에는 탑이 서 있었으나, 대원군에 의해 폐사되고, 남연군의 무덤이 옮겨졌다. 이장한 7년 후 차남 명복(命福)을 낳았다. 철종이 후사 없이 돌아가자 종손이었던 명복이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 뒤 1866년(고종 3) 통상을 요구하다가 실패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E.J.)가 미국인 젠킨스(Jenkins,F.)를 자본주로, 프랑스 선교사 훼론(Feron)을 통역관으로 삼아 백인 8명, 말레이지아인 20명 등 약 100여 명의 중국인 청년을 무장시켜 4월 18일 홍주에 정박하고 고덕으로 들어왔다. 러시아 병사라고 칭하고 남연군의 무덤을 훼손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엄히 하였다. 이 무덤을 파헤친 사건은 국내외로 커다란 비난을 받았다. 무덤 주변에서는 조선시대 기와가 많이 나오고, 또 탑을 파괴할 때 백자 2개와 단차(團茶) 2덩이, 사리도 3개가 나왔다고 이건창(李建昌)은 적고 있다

 

 

 

 

 

가야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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